3. 신무협의 탄생, 클리셰에서 키치로!

무림동(武林洞) 시대 그리고 태극문이 있었다!

by 포레스트 하이
무협소설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


누구의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맞는 말이다. 한국 무협에 실망하여 떠났던 마니아들은 1990년대 들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영웅문』으로 촉발된 무협소설의 선풍은 젊은 독자층으로 대변되는 대학가까지 흔들어 버렸다. 전통적인 독자층인 월급쟁이 회사원이 전통적인 독자층이었지만, 연령층이 대폭 낮아졌다. 어느 대학도서관의 대출 순위 10위 중 『동방불패』, 『장백산맥』 등 다섯 편이 목록에 올랐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조협려.jpg 중국 드라마 신조협려, 소용녀(유역비)와 양과


이러한 현상은 무협의 새로운 경향 즉, 신무협(新武俠)의 등장과 함께였다. 신무협은 천편일률적인 클리세에 빠진 90년대 이전의 ‘구무협’을 밀어내어 버렸다. 무협 칼럼니스트 김요석의 글을 보자.


신무협은 80년대 무협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조어이지요. 그 시작은 하이텔 무림동에서였습니다. 이후 90년대 신인 작가들의 실험적이면서 퀄리티를 유지한 작품을 우리는 신무협이라 부르게 됩니다. 새로운 무협 장르가 등장한 것이지요.


신무협의 비조가 용대운의 『태극문』(전형준 주장)이냐, 좌백의 『대도오』(육홍타 주장)냐의 논쟁은 있지만, 그것은 각자의 성향일 뿐이다. 2014년 용대운의 『태극문』20주년 기념 헌정 도서 『태극문이 있었다』가 발간되었다. 좌백은 인터뷰에서 신무협 탄생의 공을 태극문에 돌렸다.


신무협의 등장에 시장은 다시 격하게 반응했고, 젊은 층이 새로운 독자층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일등 공신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이었다. 하이텔 통신망에 ‘무림동(武林洞)’공간이 만들어졌고, 무협 공모전도 열렸다. 수많은 걸출한 신예 작가들이 배출되었는데, 중편 「칠석야(七夕夜)」로 당선된 이재일도 그중 하나였다.


글을 쓸 수 있는 판이 마련되자 컴퓨터 속에서 잠자고 있던 재야 고수들의 작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젊은 층에 맞춰 책의 판형도 바뀌었고, 활자의 식자(植字)도 세로에서 가로로 달라졌다. 때마침 도서대여점이 새로운 산업으로 떠올랐고, IMF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치킨집 개업과 같았다. 반지하에서 머물던 만화 대본소가 양지로 서식지를 옮겼다. 이런 흐름은 2010년 즈음하여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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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에‘무(武)’와 ‘협(俠)’이 있다고 한다. 武는 일종의 수단이며 俠은 목적이다. 俠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武는 부차적인 것이다. 무공은 전혀 없어도 상관없지만 협이 없어서는 안 된다. - 량샤오 중의 『무림세계 구축대전』 중 양우생의 글


양우생의 말은 무너트릴 수 없는 아성이었지만, 신무협은 이를 깨부수었다. “무협이란 무와 협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사실 俠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것 없이도 무협은 성립한다.”라는 좌백의 말이 그것이다. 신무협의 특수한 환경을 끌어들이기 위해 조금 길게 인용했다.


신무협의 이정표는 기정(奇情) 무협소설이 가졌던 클리셰(cliché, 판박이 표현)를 과감히 벗어던짐으로써 구축되었다. 김현 선생의 지적대로 하나의 스타일, 즉 ‘키치(kitsch)’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강한 개성과 뚜렷한 캐릭터 - 용대운은 인물의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를 지닌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반세기 이상 주인공의 지위를 독점했던 명문 세가(世家)의 초인(超人)과 대협(大俠), 반안·송옥으로 대변되던 절세 미남은 여전했지만, 표사, 호위, 학사, 의생, 살수, 낭인, 숙수, 파계승, 귀환 병사, 악당 등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확장되었다. 요즘은 돌아온 탕아, 즉 개과천선하는 '망나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무협의 르네상스, 백화제방의 시기였다.


허구 맹랑한 기연을 배제하고 개연성 있는 무공 수련 과정을 가미함으로써 독자와의 감정이입을 통한 성장소설의 맛을 더하기도 했고, 등장할 때부터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선인지로(仙人之路), 횡소천군(橫掃千軍), 태산압정(泰山壓頂) 같은 초식들은 작가의 숙고를 거쳐 새로운 무공이 창안되었다. 소림의 백보신권,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 곤륜의 운룡대팔식, 해남의 남해삼십육검, 종남의 천하삼십육검은 순수 한국산 무공이다.


‘노루표 무협지’ 혹은 색마로 느껴질 정도의 염문을 뿌리던 남녀상열지사도 나름 순수한 사랑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였다.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하고, 적절히 가미함으로써 교양소설의 요소도 충분히 담았다. 이 시기 걸작들로 용대운의『마검패검, 유성검, 탈명검』 등 검(劍) 연작 시리즈와 『군림천하』, 좌백의 『대도오』, 풍종호의 『일대마도』, 진산의『홍엽만리』, 최후식의 『표류공주』, 한수오의 『월야강호』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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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진화로 작가군과 독자층이 동시에 두꺼워졌다. 종전 무협 작가의 진입 경롤가 자료의 제한, 출판시장의 한계로 일종의 도제 성격을 지녔던 독점적 구조였다면, 이제 필력만 있으면 누구나 글을 쓰고 작가로 등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와 스타일, 그리고 탄탄한 구성으로 입지를 구축한 작가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 스스로 힘으로 등단한 작가로는 최초로 중국에 한국 무협을 수출 작품인 초우의 『호위무사』와 장영훈의 『보표무적』, 한백림의 『무당마검』, 전동조의『묵향』, 조진행의『칠정검 칠살도』 등이 있다.


이밖에도 청바지와 같은 가벼운 무협을 써겠다던 황규영의 『잠룡전설』과 검류혼의 『비뢰도』, 학사 무협이란 장르를 탄생시킨 최현우의 『학사검전』, 삼국지 이상의 집단 전투 장면을 담은 수담 옥의 『사라전종횡기』, 선도 소설을 이끈 이우형의 『유수행』, 흥신소 해결사와 악공을 각각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문혁의『무림 해결사 고봉팔』과 문우영의 『악공전기』등이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관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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