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기: 삶의 가장 자리에서 바라보다!

김훈의 늙기와 파커 J. 파머의 늙기

by 포레스트 하이

전작주의자(全作主義者)!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전작주의자의 꿈》이라는 책을 쓴 조희봉 작가의 조어다. 나는 김훈의 전작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그의 소설, 산문, 유튜브 인터뷰 그리고 비평까지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가진 가장 낡은 책은 한국일보 기자 시절 일요 연재로 썼던 《문학기행(1987)》이다. 1980년대 후반 일요일이면 한국일보 가판을 사러 지하철역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김훈의 문체는 그 시절에도 몽롱하고 황홀했다. 《문학기행》의 서문 〈대답 없는 산하에서〉이렇게 적고 있다. 김훈 특유의 반복적 어구의 문체는 1980년대로 회귀해봐도 여전히 독보적이다.

나는 내 자신의 쓸쓸함으로 남의 쓸쓸함을 공격하는 죄업을 저질렀다. 나는 내 죄업 때문에 또 쓸쓸해졌고, 그 쓸쓸함 때문에 또다시 남의 쓸쓸함을 공격했다. (…) 우리들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가던 시절의 기쁨과 쓸쓸함만은 나의 것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 《문학기행》 서문 〈대답 없는 산하에서> 일부

《문학기행》중 김훈이 썼던 김승옥의 <무진기행> 편


새 책을 주로 샀지만, 헌책방에서 수집한 책도 만만치 않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던 <화장>이 수록된 《2004년 이상 문학상 작품집》 같은 거다. 《바다의 기별》은 같은 책으로 두 권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를 주려니 서운하여 아직 책꽂이를 채우고 있다.




그 천하의 김훈이 책의 추천사를 썼다. 파커 J. 파머의 책을 번역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On the Brink of Everything)》이다. 오롯이 김훈이 추천사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딱히 필요한 나이도 아니었는데 사버렸다. 지금에야 꽤 오래된 과거로 다가오는 2018년은 활발히 일하던 중이었고, 자리를 비켜줄 거라고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 그다지 절실한 책은 아니었다.

퇴직 후 어느 밤 무심코 꺼냈다가 책이 주는 공감에 밤늦게까지 읽어갔다. 역시 책은 언젠가는 나를 찾아오기 마련이고, 책과 교감할 때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나이 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이란 부제를 떠올리면 그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젊었을 때는 나와 세상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있었다. 이 경계선은 내 자의식의 성벽이었고, 그 안쪽이 나의 자아였다. 나는 이 성벽 안쪽에 들어앉아서, 이 세상을 타자화해가면서 잘난 척했다. -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추천사 일부


김훈은 하덕규의 노래 <숲>의 가사를 인용했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는 가장자리의 노래라고 한다.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의 제목을 하덕규의 노래에서 따왔다고 한 말은 기억해 냈다. 그러면서 늙음을 예찬의 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숲해설가인 나는 몇 편의 글에서 하덕규의 <숲>의 가사를 인용했다. 무의식 표절이다. 그러면서 "늙으니까 이 경계선이 뭉개져서 나는 흐리멍덩해졌고……"라고 웃는다. 이런 내용은 《연필로 쓰기》에서 다시 반복된다.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 《연필로 쓰기》중 <늙기와 죽기> 중 일부





파커 J. 파머는 늦깎이 작가이다. 젊은 시절 그렇게 책을 내려고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다가 어느 순간 출판이란 행운을 얻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여든의 나이가 되고 나니 "표현(express)하기보다 감명(impress)을 주기 위해 글을 썼고, 독자를 납득시키기 바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자기의 글은 늘 가면을 쓰고 있었고,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 '고쳐 쓰는 사람(rewritter)'이라고 부른다. 글을 써보겠다는 사람으로 경구로 다가온다.

첫 번째 퇴직을 경험한 나는 "퇴직하면 뭐가 제일 좋습니까?"라는 물음을 자주 받는다. 바로 대답한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 안 만나도 되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이라고. 이를테면 혼자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거다. 가끔 눈치도 보고 성급해지기도 한다. 퇴직 후 1년이라는 남으로부터 용서가 허용되는 기간이 지나고 나니 다시금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이 불쑥불쑥 솟는다.



파머는 첫 번째 프리즘 '전주곡'에서 나이가 드니 멀티태스킹 같은 기능은 쇠퇴하지만 깊게 생각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매우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가 도달했던 여든 살의 나이가 되기까지 내게는 아직 꽤 긴 시간이 남았다. 밑줄 친 문장이다.

놀라운 것은 내가 나이 듦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쇠퇴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혜택도 주어진다. 경험이 생각을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나이 듦이 좋은 것은 무엇보다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놀랍기 때문이다. 내 생애가 완전한 파노라마로 들어오는 것이다. -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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