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여섯: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가을의 나이

by 포레스트 하이

영국의 사회학자 피터 래슬릿은 생애 주기를 네 단계로 구분했다. 출생에서 직업을 준비하는 '퍼스트 에이지(First Age)', 직업을 가진 후 가정을 이끌고 과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세컨드 에이지(Second Age)',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서드 에이지(Third Age)' 그리고 노화의 단계인 '포스 에이지(Fourth Age)'다. 서드 에이지는 50세~65세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인생 사계로 비유하자면 수확하는 가을이면서, 겨울을 준비하는 황금 시기다.

중년의 터널을 지나 무던하게 퇴직할 수 있음은 돌이켜보면 오로지 운(運)이었다. 작은 욕심과 무심한 실수로 끝마무리를 제대로 못한 경우를 자주 봐 왔다. 많은 선배들이 앵무새처럼 읊었던 "대과(大過) 없이 떠날 수 있어 영광이었다"라는 퇴임사는 닥쳐봐야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나 또한 원래대로라면 나는 56세에 임금피크에 들어가거나 명예퇴직이라도 했었어야 했지만, 이런저런 행운이 겹쳐 2년 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궁리하면 뚫린다는 '궁즉통(窮卽通)'의 '브루잉 효과'가 하나 더 생각난다. 나이 쉰여섯이었을 때 '쉰여섯의 의미'에 관한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그 문장이 필요한 시점에 '그 어디선가의 기억'을 끄집어 내려 발버둥 쳤지만 무소용이었다. 경험적으로 그런 기억은 노력으로 도달할 수는 없다. 우연이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주 '우연히' 책꽂이를 훑어가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책 한 권이 있었다. 도서관에 관한 현대의 고전 알베르토 망구엘이 쓴 『밤의 도서관』이었다.


나는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천성이 게으른 데다 여행을 지독히 좋아해서 다른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백치(The idiot)』에 따르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는 연령'인 56세에 이르러서 나는 젊은 시절의 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밤의 도서관』 머리말 말미 / 알베르토 망구엘
L_228003.jpg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이어지는 원문 찾기 게임!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가장 사랑했다는 소설 『백치(The idiot)』에서 '쉰여섯의 나이'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했을까? 아무나 도스토옙스키를 말하지만, 그의 작품을 끝까지 완독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나 또한 몇십 쪽 읽다 바로 마지막 결말로 이동하지 않았던가. 도서관 서가에 꽂힌 『백치(The idiot)』를 주마간산으로 읽어 내려갔다.

소설 초입부에서 그 문장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다. 여주인공 아글리아의 아버지 예빤친 장군에 대한 기나긴 묘사 대목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만발한 장미꽃으로 깔려있다고 생각하는 예빤친 장군에게,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가족이었고, 세 딸 모두를 명망 있고 부유한 가문에 시집보내는 일이 그의 마지막 욕망이었다.


사실 나이로 볼 때 예빤친 장군은 물이 한참 오른 시기였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쉰여섯이라는 나이는 어디로 보더라도 최고의 전성기였다.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연령이 아닌가.
- 도스토옙스키 『백치(The idiot)』중, 도스토옙스키





56세의 나이에 관한 또 다른 텍스트가 나를 노크했다. 이번에는 영화가 꼬리를 물어왔다. B급 영화의 거장(巨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를 OTT에서 본 후, 「재키 브라운(1998)」으로 눈을 돌렸다. 타란티노 감독은 딱 10편의 영화만 만들고 그만두겠다고 장담했는데, 지금까지 총 9편이 제작했다. 초기 작품이라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마지막 남은 작품이 「재키 브라운」이다. 타란티노 감독 전작주의자로서 방점을 찍고 싶었다.

영화를 보던 중 56세를 언급하는 대사가 귀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아! 상호 텍스트란 이런 거구나."라는 전율을 경험했다. 항공사 여승무원으로 일하면서 마약 운반으로 부수입을 올리고 있던 재키 브라운을 둘러싼 범죄 스릴러 영화로, 서로가 속고 속이는 끝까지 적과 동지를 알 수 없는 지극히 타란티노적인 반전(反轉) 영화다. 재키는 보석 보증인 맥스 체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어쩔 수 없이 재키를 사랑하게 된 맥스 체니가 말한다.


나도 쉰여섯 살이니 내가 하는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진 않아요.
(I'm 56 Years Old. I can't blame anybody for anything I Do.)
- 영화 「재키 브라운(1998) 중 맥스 체니의 대사
재키_브라운.jpg 영화 「재키 브라운(1998)」의 대사 중




타란티노는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다 영화를 섭렵하고 내친김에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1992년 「저수지의 개들」이다. 타란티노는 그의 머릿속에 내장된 수많은 영화 파편들은 끄집어 내 영화를 만든다. 스스로 다른 영화 - 중국 무술영화, 홍콩 누아르, 일본 사무라이 영화 -에서 텍스트와 모티브를 따왔다고 자인한다. 혹시 '책임질 수 있는 56살'이라는 대사도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한 것이 아닐까 괜히 추측해 본다.

베이비붐 세대, 중년 혹은 신중년, 서드 에이지, 낀 세대, X-세대와 같은 50대를 지칭하는 용어는 많다. X, Y, Z세대 이후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던 세대 구분은 마침내 알파벳 첫 글자 A로 돌아왔다. 어느 글로벌 광고 회사가 'A 세대'라는 공포 마케팅 용어를 탄생시켰다. 늙을 수도 없고, 경제적 자립을 이룬 생동감 있는 45~64세 사이의 중장년층, 'Ageless'. 'Accomplished', 'Alive'의 특징을 지닌 세대가 바로 'A 세대'다. 한 마디로 돈을 잘 써야 하는 계층이다. 말이 마음을 지배하는가. 알파벳 세대라 불려지니 감투를 쓴 기분이고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중년: 운이 좋아 살아남은 실패한 소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