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개가 있는 집,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정신 심리학 용어에 자유연상 기법이 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가감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심리치유 방법으로 프로이트가 창안했다. 초현실주의의 자유기술법도 이런 방식이다.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홍차를 적신 마들렌의 맛과 향기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이끌어가는 이른바 ' 의식의 흐름' 기법을 활용했다. 글쓰기를 배울 때 자유연상 혹은 의식이 흐르는 대로 무조건 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노인'이라는 말이 불현듯 떠올라 떠오르는 대로 적어 본다.
유진목의 시집『작가의 탄생』은 제목에 혹해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며 읽었던 책이다. 그로테스크한 시어와 해질녘과 같은 낮과 밤이 혼재된 듯한 은밀하고도 감각적인 문체에 매료되었다. 이것은 가정사가 반영된 것인가라는 어느 인터뷰에서의 물음에 대해, 시인은 아버지가 보낸 편지글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라는 말만은 사실이라고 현답했다. 그리고 시집 제목이기도 한 「작가의 탄생」을 읽으며, 보르헤스가 쏘았던 은빛 총알 「케네디를 추모하며」를 연상하기도 했다. 시인이,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을 개와 총알로 은유했다.
나의 총은 1980년에 마지막으로 발사되었다. 총알은 배 한가운데 정확히 왼편의 삼 분의 일 지점을 뚫고 나갔다. (…) 늙은 개는 냄새를 맡고도 금방 일어서지 못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글을 배우고 어느 날 문을 닫고 들어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오래도록 쓰고 있다. 나도 늙은 개도 죽지 않고 맞이하는 어느 아름다운 날의 일이었다.
- 「작가의 탄생」 일부, 『작가의 탄생』, 유진목
유진목 시인의 문체가 흥미롭고 오묘해 그녀의 첫 시집 『연애의 책』을 연달아 펼쳤다. 연애를 할 나이도 아니었고, 그런 체험에 대한 글이 필요한 시기도 아니었지만, 시인의 시 세계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산문시 「밝은 미래」라는 시가 강열하게 눈에 들어왔다.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의 시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노인의 입을 빌려 "다만 내가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젊은 시절에 나는 다니카와 슌타로를 즐겨 읽었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그는 노인들은 이제 인생을 묻지 않는다고 했어요 다만 거기 있는 것으로 인생에 답하고 있다고요 나는 그런 태도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다만 내가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밝은 미래」 일부, 『연애의 책』, 유진목
다니키와 슌타로의 시와 산문을 모은 『사과에 대한 고집』을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다. 시인이 인용했던 시는 볼 수 없었다. 서울도서관을 가서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빌렸다. 「하얀 개가 있는 집 - 노인 홈 요리아이에서」에 실린 구절이었다. 1990년 대 작품이라 추측해 보면 슌타로 시인의 나이 지천명을 넘어서 쓰지 않았을까 싶다. 유진목은 '늙은 개'와 세월을 같이 했지만, 슌타로는 '하얀 개'가 노인을 호위토록 했다. 그리고 이 또한 상호 텍스트 일지 모른다는 섣부른 상상을 했다. (다니키와 슌타로가 한 때 나의 아바타였던 만화영화 주인공 '우주소년 아톰'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제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 여든네 살이 있다
투덜투덜 계속 떠드는 여든여덟 살이 있다
노인들은 이제 인생을 묻지 않는다
다만, 거기 있는 것으로 인생에 답하고 있다
그 답이 되돌아온다
당신에게 우리들은 중요합니까 라고
-「하얀 개가 있는 집」 2연, 『이십억 광년의 고독』, 다니카와 슌타로
"당신에게 우리들은 중요합니까"라고 노인들은 원망하듯 묻는다. 그들이 일군 터전은 다음 세대들이 차지해 버렸고, 그들은 하얀 개가 있는 요양 병원에서 '신의 사자(使者)'만 기다리고 있다. 코웬 형제의 영화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자동 연상되는 건 당연했다. 표정 없는 살인자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이뎀 扮)의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가득하지만, 주연은 은퇴를 앞둔 늙은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 扮)이다. 노인과 연관 지을 수 있는 부문은 신문을 읽던 벨이 독백 조로 읊조리는 "세 든 노인을 살해하고 연금을 가로채는 사회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뿐이다.
영화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제목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 '그곳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먼 과거 노인들의 지혜가 빛나던 시절은 사라졌고, 세상은 너무 험하고 포악해져 "더 이상 노인이 살아갈 만한 나라가 아닌 것"으로 되어 버렸다.
직장 후배들과 노량진역 부근에서 저녁을 먹었다. 노량진 고시촌의 구준생(9급 공무원 준비생)을 탄식했고, 그나마 그 인기도 시들해져 컵밥 집조차 불황이라는 공허한 말이 오갔다. 회사에서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젊은 직원들이 임원, 부장, 팀장 임금을 삭감해 나눠 달라는 허망한 대나무 숲 이야기에 분노했다. 미래를 미리 댕겨 먹겠다는 말인데 ' 영끌(영혼까지 긁어모음)"의 극단(極端)을 보는 것 같아 또한 슬펐다. 노인이 젊은 세대에 양보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이렇게까지 가자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 노인은 더 이상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