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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Jul 01. 2022

손쉽게 자존감 충전 & 행복 만들기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순수한 열정가들이 산다. 그들은 다채로운 행사를 수시로 열어 주민 화합을 도모함과 동시에 지구 살리기에도 앞장선다. 플로깅(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운동), 초록 지구 만들기 플래시몹(다수의 사람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주어진 행동을 하고 곧바로 흩어지는 것),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 장터, 옥상 텃밭 축제 등 모든 행사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 가능한 것이다. 즐겁고, 유익하기까지 해서 우리 가족은 가급적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편이다.

  이번에는 ‘환경 사생 대회’ 공지가 엘리베이터에 붙었다. 라온이와 로운이는 주저 없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대회에 제출할 그림의 주제는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자연보호, 기후 변화’였다.


  로운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스케치북을 펼쳤다.
   “엄마, 나 보지 마.”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띈 채 나를 보는 녀석을 향해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절대 보지 않겠노라며 안심시켰다. 이 일곱 살 배기는 작품을 비밀리에 완성 후 깜짝 발표로 공개하고픈 게다. 무언가 기특한 일을 할 때면 으레 그랬다.

  조금 뒤, 우렁찬 “짜잔!” 소리가 주방까지 울렸다. 로운이에게 가보니 스케치북 가운데에 파랑과 초록이 어우러진 커다란 동그라미가 생겼다. 지구였다. 그 위에는 슬픈 얼굴로 얼음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북극곰, 검은 매연을 뿜어대는 공장과 자동차, 고약한 표정으로 지구를 맴도는 코로나 바이러스들이 있었다.

   나는 눈꺼풀에 한껏 힘을 주어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흥분하며 말했다.

  “우와! 이걸 우리 로운이가 그렸단 말이야? 세상에! 이거 보니까 정말 지구가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있겠다.”

  “아! 엄마, 잠깐만. 잠깐만 보지 말아 봐.”

  로운이가 검정 사인펜을 들었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녀석이 불러서 눈을 떠보니 그림 속 지구에 눈, 코, 입, 팔, 다리가 생겼다. 입 모양이 뒤집힌 U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지구가 언짢아하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이 특유의 투박한 솜씨가 만들어낸 귀엽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작품이었다.

  꼬마 화가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무엇을 그린 건지 야무지게 설명해주었다. 내가 과장되게 감탄사를 연발하자 녀석의 입이 귀에 걸렸다. 설명을 다 듣고 나서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로운아, 이 그림을 내면 심사위원들이 볼 거잖아? 그 사람들은 정말 복이 많네.”

  “왜?”

  “이렇게나 멋진 작품을 볼 수 있잖아.”

  “맞아!”

  로운이는 만족에 겨운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볼수록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녀석의 눈에서 빛나는 별도장이 뿜어져 나왔다.
  앞으로도 무엇이건 자신의 정성과 노력이 담겼다면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그것을 멋지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길 바란다. 자신의 솜씨로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생각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국, 자신을 멋지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이는 스스로 자존감을 충전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내 아이가 이런 습관을 지길, 그 덕에 언제나 넘칠 듯 찰랑거리는 자존감을 지닌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하여 내가 곁에서 도울 것이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지금처럼 아이의 작품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해주면 된다. 누군가는 내 평가가 너무 뻔뻔하고 억지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내 눈에는 내 아이의 작품이 그 어떤 유명인의 것보다 더 멋지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아홉 살 라온이는 동생이 낮에 그림을 완성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리기를 시작했다. 형제가 짠 것도 아데, 라온이의 그림 한가운데에도 파랑과 초록이 어우러진 커다란 동그라미의 지구가 자리했다. 하지만 세부 요소는 달랐다. 라온이는 분리수거가 잘 되어서 지구가 행복한 모습을 그렸다. 분리수거통이 제법 입체적으로 표현돼 있었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아주 고운 작품이었다.

  나는 로운이에게 보였던 감탄을 재연하며 라온이를 함박웃음 짓게 했다. 감탄의 마무리 또한 로운이에게 해주었던 것으로 했다.  

  “우와! 라온아, 정말 멋지다. 이 그림을 보게 될 사람들은 정말 복이 많네.”
  “왜?”
  “이렇게나 멋진 작품을 볼 수 있잖아.”

  그런데 라온이는 로운이와 달리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대신 멋쩍은 듯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흐흐, 아닌 거 같아.”

  “아닌 거 같다고? 혹시 왜?”

  “그냥 당연한 거 같은데…….”

  “아, 당연한 거 같다는 거구나?”

  덤덤한 척했지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라온이가 많이 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최근 들어 로운이가 나에게 뭔가를 물으면 라온이가 대신 대답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했다. 녀석은 관련 지식이 없는 것이어도 추론해서 답을 해주었다. 결코 엉뚱하지 않은, 제법 합리적인 답이 대부분이었다. 생각이 그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아홉 살 중반에 찾아온 변화다.
   “음…… 엄마 생각은 다른걸. 지금까지는 우리 가족만 라온이의 그림을 보면서 행복해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라온이를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도 보게 되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복이 많은 거지.”

  “흐흐.”

  라온이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동의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녀석은 분명히 달라졌다. 한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말을 믿고 행복해했지만, 이제는 나름의 잣대로 판단 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사고력이 훌쩍 자란 것은 좋은 일이 맞건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내가 지금껏 녀석을 행복하게 했던 방법에 안녕을 고해야 했으니까. 변해버린 아이를 위해 이제 무엇을 해줘야 할까?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라온아. 라온이 말대로 그림 대회에 내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당연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랑 ‘내 그림은 아주 멋지지. 이렇게 멋진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복이 많아.’라고 생각하는 거랑 둘 중에 어떤 게 더 행복할까?”

  “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거.”

  “아무래도 그렇겠지? 어떤 일을 두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더 행복할 수도 있는 거야. 엄마는 이왕이면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주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봐. 라온이는 어때?”

  “나도 그래.”
   라온이의 표정에서 깊은 공감을 볼 수 있었다. 일단 내 의견이 녀석의 눈높이에 맞고, 나름대로 판단해보니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결론적으로, 사생대회를 구실 삼아 라온이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뜻밖의 값진 선물을 주었다. 아이를 위한다면 물고기가 아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게 더 좋은 법. 그날 나는 '행복감' 대신 '스스로 행복을 만드는 지혜'를 알려주었다. 나와의 대화로 라온이는 어떤 상황에서건 행복을 돋우는 생각을 끄집어낸다면 행복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녀석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실천하려 노력하는 아이다. 그러니 생각의 힘을 다루어 언제건 행복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런 행복은 남이 만들어준 것보다 더 진하고 효과가 크다. 시간이 갈수록 생각의 힘이 강해질 테니 라온이는 앞으로 행복이 샘솟는 삶의 주인공이 될 게 뻔하다. 

  생각해보니 녀석의 생각이 훌쩍 자라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덕분에 더 알찬 결과를 낳았으니 말이다. 앞으로 더더욱 자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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