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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신화 Aug 25. 2022

요구를 당당하게 할 때의 효과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현관에 막 들어선 형제의 표정에 온도 차가 극명했다. 루빅큐브를 내밀며 OO형이 줬다고 자랑하는 아홉 살 라온이. 몹시 부러워하는 표정으로 큐브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일곱 살 로운이. 
   이틀 뒤, 로운이가 혼자 피아노 학원에 갔고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내가 데리러 갔다. 녀석은 학원 내 휴게 공간에 있었다. 나를 보면 늘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오던 녀석이 그날은 눈길만 한 번 주더니 바로 옆에 있던 OO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온이에게 큐브를 줬다는 그 아이였다. OO이는 인사성이 바른 아이답게 나를 보자마자 숙여 배꼽 인사를 했다. 
  로운이는 선생님의 “로운아, 엄마 오셨네. 이제 가야지.”라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학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녀석이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애절하게 말했다. 
   “엄마, 나 스피너 큐브 갖고 싶어. 그런데, OO형아가 안 줘.”
   “스피너 큐브? 빙글빙글 돌아가는 큐브? 아까 OO형한테 달라고 했던 거야?”
   “응.”
   “그랬더니 뭐래?”
   “아무 말도 안 했어.”
   시무룩한 로운이를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큐브를 얻고자 매달렸을 게 뻔하다. 그동안 장난감을 사달라던 청을 내가 잘 안 들어줘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싶기도 했다. 나는 로운이의 작은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로운아, 그렇게 갖고 싶으면 OO형에게 달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사자. 엄마가 사줄게.”
   “난, OO형아한테 달라고 하고 싶어.”
   “우리가 살 수 있는 건데 굳이 달라고 하지 말자. 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는 사람 마음도 생각해야지. 미안하거나, 불편할 수 있거든.”
   “저번에 라온이 형아한테는 줬잖아.”
   아무래도 형에 대한 질투심이 발동했던 모양이다. 로운이는 내가 라온이를 웃겨주면 쪼르르 달려와서 방금 전 형아한테 해준 거랑 똑같이 해달라는 아이였다. 
   “라온이 형아는 OO형이 썼던 걸 받은 거잖아? 로운이는 엄마가 새 걸로 사줄게.”
   “OO형아 거랑 똑같은 거 살 수 있어?”
   “가능할 거야. 큐브 종류가 많은데, OO형아 게 뭔지 로운이가 알지?”
   “응.”
   “그럼 엄마랑 같이 고르자.”
   “그래도 난 OO형아한테 다시 한번 달라고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살래.”
   새 물건을 살 기회가 있는데도 굳이 달라고 하겠다니…… 혹시 형에 대한 질투 때문이 아니었나? 알다가도 모를 일곱 살의 마음이었다.
 
   라로형제(라온이와 로운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나는 의자에 앉아 둘을 지켜볼 때였다. 먼발치에서 큐브의 주인인 OO이가 나타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김없이 양손을 배꼽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로운이가 하던 놀이를 즉시 멈추고 그 가까이 가더니 조심스럽게 뭔가를 얘기했다. 목소리도 안 들리고, 입 모양도 제대로 안 보였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갔다. 
   OO이가 못 들은 척 외면했고, 로운이가 참다못해 OO이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OO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그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처음에는 미소를 머금고 지켜봤지만 어느샌가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언짢아진 이유를 생각하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내게도 이기적인 부모의 태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로운이가 OO이에게 매달리고 거절을 당했다는 점에 신경이 잔뜩 쓰였었다. 로운이가 OO이를 불편하게 한 부분은 솔직히 뒷전이었다. 다시 말해 내 아이의 감정만 우선시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제법 합리적이고  공정한 부모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아이의 속상함 앞에서 부모로서의 내 민낯을 보고 말았다.  정말이지 바람직한 부모가 되는 길이 녹록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만약 다음에 또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게 될까? 물론, 철저하게 객관적인 태도를 보이면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을 것 같다. 속상해하는 자식을 보면 녀석의 마음을 보듬고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다. 부모로서 철저하게 객관성을 지켜내는 게 무리라면 차라리 최악의 부모가 되지 않는 것을 목표 삼으려 한다. 하여 속으로 '이기적인 부모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라고 되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서둘러 로운이에게 다가갔다. OO이가 떠난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내 아이에게로.

   “로운아, 더 이상 OO 형한테 큐브 달라고 하지 말자. 형도 불편해하잖아. 엄마가 사줄게.”
   내가 등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지만, 녀석은 눈만 껌뻑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절의 상처와 아쉬움에 빠진 표정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라로 형제에게 물었다. 
   “얘들아, 어떤 사람의 물건을 가지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얻을 가능성이 더 클까? 자, 1번 아이와 2번 아이가 있어. 우선 1번 아이는…….”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과 말투로 “나 그거 갖고 싶은데, 나한테 주면 안 돼?”라고 했다. 이어서 2번 아이 때는 말은 같았지만, 최대한 명랑한 표정과 말투로 했다.
   라온이가 냉큼 말했다.
   “1번!”
   “아, 라온이는 1번 아이일 거 같구나?”
   “아니, 2번.”
   “아, 2번 아이일 거 같구나?”
   라온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는 사이 로운이가 나섰다.
   “2번!”
   “아, 로운이는 2번 아이일 거 같구나?”
   “아니, 1번. 아니 2번”
   두 꼬마는 몹시도 어려운 문제를 만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고민하는 것 자체를 즐겼다. 정답(?)에 대한 강한 궁금증과 함께 호기심이 넘치는 반응이었다.

  “어렵지? 사실, 이건 무언가를 얻을 때 더 좋은 방법을 알기 위해 낸 문제가 아니었어. 거절을 당했을 때 어떤 방법이 더 괜찮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야. 자, 봐봐. 1번 아이는 거절을 당하면 힘없이 ‘그래, 알겠어.’하고 돌아설 거고, 기분도 축 처지고 안 좋을 거야. 2번 아이는 명랑하게 ‘그래, 알겠어.’ 하면서 거절을 받아들일 거고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을 거야.” 
   “그런데, 1번 아이처럼 말하면 불쌍해서 줄 수도 있잖아.”
   로운이의 지적이었다. 아마 녀석이라면 1번 아이가 원하는 걸 주었을 것이다. 측은지심이 깊은 아이니까. 언젠가 집에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 ‘키즈’를 함께 봤는데,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자 로운이는 너무 안타깝다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래, 로운아.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음…… 그런데 엄마는 뭘 얻고 싶어서 일부러 그 사람한테 불쌍해 보이고 싶지는 않아. 그걸 하늘나라에서 할아버지가 지켜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실 거야. ‘아휴 내 딸 신화야, 늘 당당하면 좋겠구나.’하면서. 엄마는 라온이랑 로운이에게도 그걸 바라. 언제나 당당하고 명랑했으면 좋겠어.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때도 그렇고, 거절을 당했을 때도 여전히 당당함과 명랑함을 지키는 거지. 어때?”
   “좋아.”
   “좋아.”
   “그래, 얘들아. 그럼 우리 한 번 연습해볼까? 자, 해보자. ‘나 그거 갖고 싶은데, 나한테 주면 안 돼?’”
   라온이가 먼저 했다. 턱을 비스듬히 추켜올리고, 눈은 조금 내리깔고 말했다. 그 태도에선 불쌍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함이 과해서 명랑함보다는 뻔뻔함이 풍겼다. 사실, 녀석은 평소에도 종종 그런 식으로 요구하곤 했다. 
   “흐흐. 라온아, 불쌍해 보이지 않은 건 괜찮았는데 너무 당연하단 듯이 달라고 하는 것 같거든. 조금 더 명랑함을 살려볼까?”
   녀석의 두 번째 시도는 밝음 그 자체였다. 고개를 좌우로 살짝 까딱거리면서 장난기까지 섞어 말하는 것이 매우 명랑하고 매우 당당했다. 통과!
   이어서 로운이도 불쌍함을 쏙 뺀 채 말했다. 하지만 의욕이 너무 과했다.   
   “흐흐. 로운아, 당당한 건 좋았는데 그렇게 화내듯이 하지 말고, 좀 더 밝게 해 볼까?”
   내 말이 듣자마자 녀석이 험상궂은 표정을 풀고 환하게 킥킥 웃었다. 얼마 전에 이빨이 빠져서 구멍 난 자리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활짝. 곧이어 다시 도전했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과장되게 말하며 장난을 쳤다. 이 장난꾸러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몇 번의 장난 끝에 결국 당당함과 명랑함이 적절히 어우러지게 해냈다. 
   “둘 다 정말 잘했어. 너희가 그렇게 요구했는데 상대방이 거절하면 어떻게 한다? 역시 당당하고 명랑하게 ‘그래, 알겠어.’라고 하면 되는 거야. 자, 한 번 해볼까?”
   둘은 한 번에 성공했다. 
 
   그날 아이들과의 대화가 참으로 고마웠다. 사실, 로운이가 거절당하는 과정을 봤을 때,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전까지의 나는 남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면 당당하기는커녕 주로 미안해하며, 때로는 불쌍하게 했던 편이다. 그런데, 내 아이가 거절의 쓰라림을 겪게 되자 고민을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거절로 인한 부정적 경험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요구의 방법을 바꾸는 게 필요해 보였다. 그리하여 '당당하고 명랑하게 요구하기'를 생각해낸 것이다.

  이 방법은 ‘거절한 자’를 배려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요구를 거절할 때는 마음이 편치 않다. 특히나 불쌍한 태도로 요구하는 이에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면 죄를 지은 듯한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상대가 당당하고 명랑하게 거절을 받아들여 준다면 마음이 한결 가뿐해질 것이다.
   앞으로는 요구를 할 때도, 거절을 당했을 때도 당당함과 명랑함을 유지하고자 한다. 나와 상대방 모두의 마음에 보호막을 쳐 주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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