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로운이가 유치원 원복을 벗고 내복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섰다. 시선을 거울에 고정한 채 양 손바닥으로 자기 배를 번갈아 쓸어내리며 다소 못마땅한 듯 말했다. “엄마, 내 배는 너무 나왔어.” “아직 어려서 그래. 지금은 몸이 작고, 배 속 공간도 작아서 배만 볼록한 거야. 위랑 폐랑 이런 장기들이 이 작은 배에 다 들어가야 하니까. 아기 때는 이거보다 너 볼록했었어. 앞으로 클수록 들어갈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릴 때는 배가 이런 게 사랑스러워.” 나는 공을 넣어 놓은 것처럼 동그스름하게 나온 그 작은 배를 위아래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해주면 늘 기분 좋아했던 로운이가 이번에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흐음. 나는 너무 뚱뚱해.” “뚱뚱하다고? 오히려 마른 편이야. 봐봐. 팔, 다리는 날씬하잖아. 조금 더 살찔 필요가 있지.” 녀석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거울 속 자신을 이리저리 살폈다.
갑자기 몸매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하원 직후에 이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유치원이 진원지 같았다. 다행히 몸매 때문에 언짢은 일을 당한 건 아닌 듯 했다. 속상해하는 기색은 없었으니까. 아마 친구들 사이에 오갔던 대화나 행동들을 관찰한 끝에 몸매에 대한 기준을 세운 모양이다. 그리곤 집에 와서 자기 몸매를 평가한 것이고. 녀석의 평가 기준에 ‘날씬한 게 좋다’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는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예쁘고, 날씬한 것이 진리이자 옳은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 말이다. 나는 그 왜곡된 ‘외모지상주의’가 못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심지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이끄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만큼은 그 분위기에 물들지 않기를 바랐기에 지금껏 내 언행을 조심해 왔었건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곱 살 로운이는 ‘외모지상주의’의 침범을 받고 말았다. 결국, 자기 몸매를 평가절하하며 한숨을 내쉬기에 이르렀다. 일단 녀석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더 뻗어 나가는 걸 중단시키는 게 나의 급선무였다. “로운아, 이제 간식 먹을까?”
녀석은 금세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을 뻗자 단풍잎처럼 조그만 손으로 내 손을 잡고 거실로 향했다. 아이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이 이처럼 간단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로운이는 간식을 먹으며 그림책을 읽었다. 작은 입속에 음식을 넣고 오물거리며 그림과 글자를 진지한 눈빛으로 훑는 그 모습은 너무나 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동심이 만들어내는 귀한 장면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한동안 로운이를 바라보다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로운아, 그거 알아? 엄마는 한때 엄마가 창피했었어.”
“잉? 왜?”
“엄마 어렸을 때 사진 봤지? 호빵같이 둥근 얼굴에 분홍색 옷 입고 서 있는 사진. 엄마는 어렸을 때 모습이 너무 못생겨서 그 사진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어. 어른이 돼서도 그랬지.” 내가 태어난 지 정확히 1년 되던 날, 동네에서 찍은 사진이다. 친정엄마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돌 전에 걸었다며 자랑스레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사진 속 얼굴 윤곽은 아주 동그란 것이 커다란 호빵 같다. 볼살은 살짝 건드려도 터질 듯 아주 빵빵하다. 머리 스타일은 일명 ‘바가지 머리’라고 불리는 그것인데, 숱이 어찌나 많은지 얼핏 보면 검은색 헬멧을 쓰고 있다고 오해하기에 충분하다. 터질 듯한 볼살과 풍성한 머리숱 탓에 눈, 코, 입은 유난히도 작아 보인다. 사진 속 나는 요즘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말하는 ‘예쁜 구석’이라곤 없다. ‘못난이’라고 부르는 게 딱이다. 그 사진이 창피했다고 말하는 나를 향해 로운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거 엄청 귀여운데?”
“그래. 엄청 귀엽지? 엄마는 한때는 그 사진을 창피해했지만, 이젠 아니야. 이젠 그 사진이 너무 좋아. 엄마 자신을 가장 예쁘다고 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엄마니까. 우리 로운이도 로운이 자신을 가장 멋지게 봐주고, 자기 스스로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 너 자신을 창피해하지 말자.”
“응.” 내가 문제의 그 사진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것은 서른이 훌쩍 넘어서였다. 정확히는 친정 아빠의 죽음 이후였다. 철부지나 다름없던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야 참된 생각의 키를 키우기 시작했다. 사는 데 있어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생각하며 가치관도 재정립했다. 그러다 보니, 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던 여러 가지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우려하고 안타깝게 생각한 것도 그 효과 중 하나다. 그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자리를 틀고 있었던 ‘외모지상주의’를 지우고 나니 호빵 같은 모습의 내 사진이 달리 보였다. 더이상 창피한 것이 아닌, 내 소중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 사진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넘어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사진 속 내 모습이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 얘기를 로운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사진을 아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어. 바로 우리 로운이랑 라온이 덕분이지.” 로운이가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우리 로운이는 눈, 코, 입 중에 어디를 엄마 닮았게?”
“눈! 아니, 코!”
“코도 닮았고, 입도 닮았어. 로운이 입을 보면서 ‘어쩜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엄마 입이 그랬던 거더라고. 또 라온이 형아 눈은 엄마 눈이랑 똑같아. 형아 눈을 보면서도 엄청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엄마 눈이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엄마 어렸을 때 그 사진 속 눈, 코, 입을 보면 우리 천사들 모습이 보여. 그래서 엄마는 아기 때의 내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좋지.” 로운이가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입을 활짝 움직여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뒤로 녀석은 달라졌다. 자기 배가 너무 나왔다거나, 몸매가 뚱뚱하다면서 한숨짓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대신 “난 너무 멋져.”라는 말을 종종 하는 아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