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이와 로운이는 장난감이나 먹을 게 생기면 환호하며 방방 뛰었지만, 돈이 생기면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버리면 안 되는 종이 정도로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직 어려서, 돈을 잘 모르는 나이라서는 아니었다. 또래 중에는 돈이 생겼을 때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여럿 있었다. 그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엔 공통점이 있었다. 장난감이나 간식을 받았을 때와는 분명히 달랐고 어딘지 오묘했다. 우리집 아이들이 돈에 무덤덤한 것은 아무래도 나의 영향인 듯싶었다. 돈이 생겼다고 좋아하지도, 없다고 크게 한숨을 쉬지도 않는 엄마를 보니 돈이 특별하게 보이지 않았을 게다. 물론 나도 돈의 중요성을 잘 안다. 하지만 나의 희로애락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걸 원치 않는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현명하게 유지하기. 내가 돈과의 관계에서 추구하는 바다. 어쩌면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면을 은근히 바랐던 것 같다. 돈 앞에서 눈빛과 표정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 내 눈에는 예쁘게 보였으니 말이다. 언젠가는 녀석들도 달라질 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 변화가 마침내 시작됐다. 여섯 살 로운이가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았다. 전에는 아무 말 없이 내게 건넸는데 이번엔 눈을 반짝이더니 지시 사항까지 말했다. “엄마, 이거 내가 유치원에서 만들었던 복주머니에 잘 넣어줘.” “어, 그래.” 곧이어 깜찍한 제안까지 나왔다. “엄마, 우리 이 돈으로 요구르트 사 먹자.”
“우와, 로운이가 사주게? 좋아. 맛있게 먹을게.”
“엄마, 요구르트 사장님한테 내 돈이라고 꼭 얘기해!”
“그래. 알겠어. 꼭 얘기할게.” 돈에 대한 아이의 달라진 반응이 낯설긴 했지만,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로운이가 달라진 것은 얼마 전부터 시작한 보드게임의 여파였다.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통행료 등을 받는 게임 말이다. 그걸 통해 돈이라는 것이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한 게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신발을 신던 로운이가 흥분하며 외쳤다.
“엄마, 내 복주머니에 있는 돈 OO이한테 선물로 줄래!” 평소 나눠주는 것보다는 얻는 걸 즐기는 편인 아이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자신만의 돈이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쓸 수 있음을 만끽하려는 것 같았다. 돈이 이렇게 사람을 바꿨다. 나는 자식이 친구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박수로 호응해주는 엄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돈이라니! 색종이나 그림 편지가 아니라.
“로운아, 돈은 선물로 주는 게 아니야.”
“왜 돈은 선물로 주는 게 아니야?”
눈을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에게 선뜻 답을 해주지 못했다. 어른에게는 당연하기만 한 것이 아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때, 동심을 납득시키는 과정은 적잖은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튼, 아니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켜 내려보냈다. 타당한 이유 없이 내 주장만 따르게 하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 나의 육아 방침이다. 그간 몇 번의 위기는 있었지만 잘 넘기며 탑을 쌓아왔었는데, 이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더욱 세심한 답변이필요한 상황이었다. ‘돈’이라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소비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여섯 살에게는 말이다.
나는 일단 시간을 끌고자 녀석의 겉옷에 양팔을 끼운 뒤 “음…… 돈을 선물로 주는 것이 왜 아니냐면…….”라면서 앞지퍼를 천천히 올렸다. 다행히 적당한 해줄 말이 곧 떠올랐다. “그걸 받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그래. 사람은 돈에 대해서 바람직한 생각을 가져야 하거든. 그런데, 돈을 쉽게 선물로 받으면 생각할 기회를 못 얻을 수 있어. 그러면 돈이 소중하다는 걸 모르고 막 써버릴 수 있지. 또 돈에 대해 심하게 욕심을 부릴 수도 있어. 돈만 좋아하고 욕심만 부리다가 불행해진 사람 이야기를 책에서 봤었지? 그 사람은 돈에 대해 제대로 된 생각을 갖지 못해서 그런 거야.” “그런데 할머니는 어제 나한테 돈 줬잖아.”
아이의 이러한 예리함이 참 좋다.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을 주며 나를 움찔하게 만든다.
“음…… 아주 좋은 지적이야. 할머니께서 돈을 주신 것은 그 돈을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좋은 일에 쓰거나, 꼭 필요할 때 쓰라는 의미였어. 로운이가 돈에 대해서 바람직한 기준을 갖고 제대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 쓰라고 주신 거지.” “엄마, 돈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거지가 돼?”
“정말 좋은 질문이다.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상황 따라 달라. 하지만, 돈에 대해 바람직한 기준이 없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크지. 그러니까 우리 로운이는 우선은 돈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런 후에 돈을 쓰자. OO이도 지금은 돈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잡아가는 단계에 있으니까 선물로 주지 않는 게 좋아. 알겠니?”
“응.” 내 아이와 돈을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은 건 처음이었다. 조만간 경제 교육을 해줘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하고 말았다. 이왕이면 잘 준비된 상태에서 이뤄진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 차지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돈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느냐는 인생 전반에 영향을 준다. 특히, 어린 시절에 돈에 대해 부모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의미가 상당하다. 그중에서도 처음으로 접한 이야기는 아이의 머릿속에 기본적인 생각으로 뿌리내릴 수 있다. 그 뿌리에서부터돈에 대한 태도가 점차 뻗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부모로서 돈에 대해 아이에게 전한 첫 번째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돈과 관련해서는 바람직한 생각 즉, 지혜를 지니는 게 중요하다.’
갑작스레 나온 얘기임에도 제법 괜찮게 포문을 연 것 같다. 돈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견해가 있겠지만, 내가 로운이에게 해준 이야기는 누구나 기본적으로 새겨야 할 것이리라. 돈과 관련된 모든 상황 즉, 돈을 벌고, 모으고, 쓰는 등등에 있어 참된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수시로 생긴다. 그 순간들에 바른 선택을 한 사람에게 있어 돈은 참된 행복을 누리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반면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돈은 비극으로의 길로 이끌 수 있다.
그날 이후로 아이들에게 돈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주었다. 단, 어떤 내용이건 ‘돈에 대한 참된 지혜’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방향으로 연결했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단 돈을 버는 방법들을 소개해 준 뒤, 주의 사항을 덧붙였다.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야 하고, 돈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미끼에 현혹되지 말아야 함을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다. 아울러 돈을 얼마나 버는지보다 얼마나 모으는지가 중요하므로 현명한 지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 돈을 모으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돈의 노예가 되는 건 경계할 것, 돈을 아름답게 써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까지 대화에 넣었다. 이런 대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시간이 흘러 열한 살, 아홉 살이 된 형제에게 했던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얘들아, 너희는 어떤 선택을 할 거야? 1번 방은 문을 열면 엄청나게 쌓인 돈을 가질 수 있고, 2번 방 문을 열면 돈에 대한 엄청난 지혜를 얻을 수 있어. 어느 방의 문을 열고 싶어?” 로운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냉큼 답했다. “난 2번 방.” “왜?” “왜냐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지혜가 없으면 펑펑 써버릴 수 있잖아.” “아, 그렇구나. 라온이는 몇 번 방을 선택할 거야?” “나도 2번.” “왜?” “이유는 로운이랑 같아. 흐흐.”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 아이들이 돈 자체보다 ‘돈에 대한 지혜’에 더 욕심내는 사람이 되는 길로 가는 중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