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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두 죽음을 대비하려면

by 노신화
지구본 그림.jpg


저녁 식사를 막 시작하려는데 택배가 왔다. 출고를 목전에 둔 나의 책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였다. 책을 살며시 소파에 앉힌 뒤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큰 우산을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년 남자의 뒷모습에서 우리네 아버지들의 향기가 풍겼다. 나의 아빠가 보였다.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뭔가 오묘한 낌새를 느낀 다섯 살, 세 살 형제가 냉큼 다가왔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내 눈을 요리조리 살피며 “엄마, 왜? 엄마, 왜?”라고 물어대는 두 꼬마. 늘 밝던 엄마의 우는 모습에 신기해하면서도 걱정을 곁들인 작은 얼굴이 맑디맑았다.
“응,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서.”
“할아버지 어디에 있는데?”
“하늘나라에.”
“그럼 할아버지 오라고 하면 되잖아.”
돌아가셨기에 볼 수가 없다는 말을 꼬마 형제는 이해하지 못했다. 눈에 보여야 믿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심에게 ‘죽음’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나는 지구본을 어루만지며 설명해주었다.
“얘들아, 우리는 지금 이 지구에 살고 있잖아. 그런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만 사셔야 해.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만날 수는 없어.”
두 꼬마의 눈이 엄청난 소식에 휘둥그레지더니 반짝였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가 알고 보니 ‘하늘나라’라는 다른 세상에 사시는 분이라니! 녀석들은 어서 더 많은 정보를 달라는 눈빛으로 내 입을 응시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았다. 내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마냥 다르고, 신비한 존재로만 여기길 원치 않았다. 친근함을 느끼고, 늘 함께 하는 분이라 믿길 바랐다.
“할아버지는 비록 하늘나라에서 사시지만, 지구의 가족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셔서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셔. 지금도 이렇게 할아버지 얘기하는 거 다 듣고 계시지.”
“그럼 할아버지가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신 거야?”
“물론이지! 그러니까 인사드리자.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엄마 책이 나왔어요.’라고 하자.”
아이들이 명랑하게 인사했다. 녀석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늘나라의 할아버지에게.

그날 이후 둘은 할아버지가 옆에 계신지 종종 물었고, 확신에 찬 나의 답을 들으면 서로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지금의 생각이 아이들에게 예방주사가 되면 좋겠다. 그러면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약효로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그런 예방주사가 있었더라면…….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아빠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의 아픔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된다. 가는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기 일쑤였다. 숨을 들이마시면 코, 목, 가슴 어디 하나 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의 과정 과정은 자꾸만 나를 일깨우려 했다. 더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숨소리를 듣는 것도 할 수 없음을. 하지만 소용없었다. 현실이 아닌 꿈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악몽 같은 현실에서 슬픔의 늪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갔다. 허덕이기는커녕 헤어 나올 생각조차 못 했다.
만약 당시에 ‘아빠가 보이지는 않지만 늘 함께 계실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슬픔이 차오를 때마다 눈을 감고 아빠를 느끼려 하고, 기억 속에 남은 아빠의 온기 꺼내어 한 가닥 줄로 삼아 슬픔의 늪을 빠져나오려 애썼을 것 같다. 그리곤 여리지만 힘겹지 않게 숨을 쉬었으리라.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와 하늘나라 얘기를 들려준 이후, ‘죽음’을 대화 주제로 다루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때마다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언제나 함께’라는 점을 강조했다. 덕분에 꼬마 형제는 소중한 이의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을 시나브로 심어갔다. 아울러 죽음을 마냥 어두운 것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됐다.


어느덧 일곱 살이 된 라온이가 잠자리에 누워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 난 죽는 게 무서워.”

“왜?”

“죽으면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없잖아.”

“걱정하지 마.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라온이는 지구에서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아주 나중에 하늘나라에 오면 돼. 그럼 엄마랑 같이 있을 수 있어.”

“엄마 못 만나면 어떡해?”

“엄마가 지켜보고 있다가 라온이가 올 때 ‘어서 오렴!’하고 맞아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래도 죽는 게 싫어. 하늘나라에는 장난감도 없잖아.”

“하늘나라에도 장난감이 물론 있지. 지구에 있는 건 물론이고, 하늘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장난감도 있을 거야. 아마 구름을 타고 다닐 수도 있을 걸.”

내가 안심시키고 나면 라온이는 다른 걱정거리를 계속 끄집어냈다. 그처럼 걱정에 사로잡힌 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음…… 우리 라온이가 걱정이 많구나. 혹시 그거 알아? 걱정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학자가 연구를 했어. 사람이 하는 걱정이 과연 실제로 일어나는지 확인해본 거지. 알고 보니 걱정 100개 중에 실제로 일어나는 건 단 3개도 안 된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라온이는 지구에서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다가 하늘나라에 갈 때가 되면 그때 가면 돼. 거기서도 잘 지내면 되고.”

“유치원 친구가 그러는데…… 하나님 믿어야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대.”

라온이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를 알아냈다. 바로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사람 많은 거리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칠 때나 접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유치원에서도 나올 줄이야!
이 말은 종교가 없는 일곱 살 어린이의 머릿속과 마음을 얼마든지 휘저을 수 있다. 워낙 간결하고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끄떡없다.(참고로,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는 두 손 모아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까지 했었다). 이 말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음을 알아서다. 그걸 알면 라온이도 더 이상은 웅크린 채 떨지 않을 것이다.
“라온아, 만약 하나님만 믿고 나쁜 짓을 막 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갈까?”

“아니.”

“그래. 그러니까 지구에 사는 동안 아주 올바르게 살아야겠지?”

“응.”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알아야 하는 게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지구에서 어느 정도 지내다가 때가 되면 하늘나라로 가거든. 그때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로 가는 순간에 두렵지 않아야 하는 거지. 사는 동안 지혜롭고, 올바르게 산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단다. 그 사람들은 하늘나라로 갈 때가 되면 아마 이런 생각이 들 거야. ‘그동안 지구에서 참 잘 지냈네. 이제 하늘나라로 가는 시간이구나. 거기에서도 잘 지내야지!’라고. 만약, 사는 동안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죽는 순간에 엄청 무서울 거야.”

“도둑은 아마 안 무서워할지도 몰라. 자기가 잘못한 것도 모를 수 있으니까.”

언젠가 아이들에게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해준 이야기가 있다. ‘아주 나쁜 도둑’은 성찰 능력이 아예 없어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체를 모른다고. 라온이가 그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정말 나쁜 사람은 성찰을 못 하니까. 분명한 건 정말 나쁜 사람은 죽고 나면 행복할 수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죽는 게 무섭다고 걱정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구에서 바르게 살지를 더 생각하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실천하는 것도 중요해. 그래서 하늘나라에 갈 때 기분 좋게 가는 게 좋겠지?”

“응.”
그날 밤 라온이는 평온한 숨을 내쉬며 꿈나라 여행을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하는 두 종류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소중한 이의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죽음이다.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슬픔, 두려움, 공포 같은 어두운 감정을 극한의 수준으로 느끼며 몹시도 힘들어한다.
나는 내 아이들이 그 힘듦에 허덕이지 않길 바라며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따른다면 ‘소중한 이의 죽음’에는 슬픔에 빠지는 대신 든든함을 느낄 것이다. 떠나간 사람이 늘 자신의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떠올릴 테니까. ‘자신의 죽음’에는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지혜롭고, 올바르게 지냈기에 죽음의 순간에도 당당할 테니까.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며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과연 내가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할 수가 없다. 친정 아빠의 죽음에 하염없이 힘들어했던 나 아니던가! 변명을 하자면, 당시의 나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에 그랬다. 이제는 나름의 방법을 정리해둔 상태다. 그러니 앞으로는 죽음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을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나의 모습을 아이들이 볼 테니까. 아마도 나는 사는 동안 소중한 이의 죽음을 몇 차례 더 맞이할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나의 대처를 지켜보며 가르침으로 삼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한 나의 가르침은 내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부디 바람직한 마무리가 되길 바란다.
만약 나의 죽음 앞에 차분함과 당당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가능할 것 같다. 이를 위해 오늘도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바른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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