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남수 Jan 28. 2021

진리였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 말은


옛날 러시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다.

이른 새벽에 밭일을 나간 농부는 아침식사로 빵 한 조각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다. 어느 듯 쟁기질이 끝나고 시장기가 돌자 농부는 나무 밑으로 다가가 빵을 찾았지만 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자 마음 착한 농부는 맹물로 허기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할 수 없구나, 어쨌든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을 테니까. 누구든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군.”

그런데 그 가난한 농부의  아침을 훔친 자는 바로 악마였다. 악마는  농부가 죄를 짓게 만들려고 빵을 훔쳤는데 가난한 농부가 빵 도둑에게 욕을 퍼 붓기는커녕 오히려 축복을 내리며 자신의 허기를 달랠 뿐이었다. 


악마는 당황했다. 이 일로 대악마에게 야단도 맞게 되었다.

악마다운 지혜가 부족했다는 대악마의 꾸지람에 이번에는 다른 술책을 강구했다.

농부의 빵을 훔치는 대신 농부의 빵을 늘려주기로 한 것이다. 


농부의 부지런한 하인으로 들어 간 악마는 홍수가 들 것 같은 해에는 고지대에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 주고 가뭄이 들 것 같은 해에는 습지대에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해서 농부는 해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게 되었다. 풍성한 수확으로 곡식이 남아돌자 악마는 이것으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술이 생기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놀았다. 술친구들은 처음엔 여우처럼 서로를 좋아하며 알랑거렸지만 곧 늑대처럼 변해 서로에게 사납고 거칠어졌다. 마침내 술자리가 끝날 즈음엔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들 돼지로 변해 모두 여기저기 흘리고, 소리치는 짐승이 되어 있었다. 이 모양을 본 대악마는 몹시 흡족해하며 도대체 술에 어떤 악마의 묘약을 넣었기에 그토록 착하던 농부가 저처럼 짐승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악마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한 일이라곤 농부에게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수확을 준 것밖엔 없습니다. 짐승의 피는 인간의 마음속에 항상 있으니까요. 인간에게 꼭 필요한 양밖에 없을 때에는 그 짐승은 잘 묶여 있지요. 한때 저 농부가 마지막 빵을 잃어버리고도 빵 도둑에게 축복을 내렸던 것처럼요. 하지만 필요를 넘어 남아돌기 시작하면 인간은 거기서 쾌락을 찾아낼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제가 ‘술’이라는 쾌락을 알려주었죠. 신이 주신 선한 선물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동안 묶여있던 여우와, 늑대와, 돼지의 피가 다 뛰쳐나온 거지요.”       

오래전, 한겨레신문에 실린 박혜영(인하대 교수)의 글 중 일부를 메모 해 두었던 내용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실려 있다는 이 러시아 민담은 인간의 타락이 잉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며 묵혀두었던 메모가 생각났다. 


기술력과 노동력의 관리를 통해 더욱 증가한 생산으로 인류는 몸살을 앓고 있다. 과잉생산과 소비는 무절제와 한경 파괴로 이어져 악마가 행복해할 아수라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사람은 속이 좀 빌 때가 정신도 맑다. 내 배가 부르고 내 집에 ‘잉여’가 쌓이는 순간 탐욕의 기름이 끼기 시작하고 타인의 삶에 무관심하고 냉담해진다. 사람들은 곧잘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사람이 변했다’는 말을 한다. 본인만 모르는 새에 남들은 느끼는 태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단편 속 농부처럼, 청빈했던 마음이 물질의 더미에 가려 흐려지는 탓이다.


‘영혼이 자유로운’ 한 분을 알고 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산에 가서 약초 캐고 뱀도 만나고 한다는 그는 계급적 토대와 달리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분이다. 친구들이 골프채까지 주고 비용 부담 다 해주며 골프를 치러가자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러면 ‘쪽팔리지 않느냐’고……. 해서 친구가 준 골프채는 ‘팔아먹을 생각’이고, 돈 안 드는 산행을 한다. 고급 술집에 다니는 친구들 모임도 사양이다. 비싼 술 먹으면 뭐가 달라지나? 소주 한 병들고 산 위에 앉으면 만사가 편하다고 말한다.


 그가 택한 것은 죽어라 기 쓰고 일해서 결국은 자본주의적 소비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적절히 일하고 돈 안 쓰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사는 발상의 전환이기도 하다. 사실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노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공허한 헛소리다. 하지만 생존문제를 떠나더라도 더 많은 돈을 버느라 애쓰는 사람들의 이유는 그 돈으로 ‘좋은 것(?)’ 먹고, ‘좋은 차’ 굴리려는 과시적 욕망이 크다. 당연히 나도 그렇다.


 서울에 살 때, 외식 모임이 참 거북한 경우가 있었다. 돈 내는 순간의 ‘쪽 팔림’이 싫기 때문이다. 다음번 내가 계산 가능한 정도거나 부담을 지워도 별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가 편했다. 상대에 대한 신뢰의 크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까짓 좋지도 않은 바깥 음식 먹으며 비굴한 느낌을 가질 이유는 없다. 

 삶의 방식에 대한 재배치, 남과 상관없이 내가 행복한 삶을 위해 관계의 결들도 재배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제주도에서 걷고 있는 시간들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당근 마켓, 무료 나눔은 하지 말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