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 수리시설, 도강언
사천의 중심도시인 청두(成都성도)에서 북서쪽으로 향하면 약 50킬로미터의 거리에 '都江堰도강언'이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이 도시엔 판다서식지와 都江堰이라는 고대 수리시설이 관광지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죠.
하루 전에 이곳 근처에 도착하여 주변을 돌아본 후 다음날 오전에 방문을 했습니다.
두장옌(중국어: 都江堰, 병음: Dūjiāngyàn, 도강언)은 진(秦) 나라의 촉군(蜀郡) 태수 이빙(李冰)과 그의 아들 이이랑(李二郞)이 기원전 256~251년대 건축으로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댐이 아닌 수로 개척의 방식을 도입해 설계한 수리 관개 시스템이다. 쓰촨성 청두 시 서쪽에 있다. 민강 상류에 있으며, 진나라에 의해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건축되었다. 놀랍게도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이 지역의 5,300평방 킬로미터(km2)의 토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참조)
입장료를 받습니다.
한 사람당 80위안이었는데, 재미있는 건 상하이에서 온 사람들은 15위안을 받습니다. 이유는 이전 2008년 사천 대지진 때 상하이시민들이 재해지원금을 보내줘서 감사하는 마음에 이런 가격 책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런 개념에 중국에도 이런 합리적인 시스템이 있구나 하는 새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서 외국인은 저 혼자 80위안의 거금(?)을 내고 또 여권소지인만 다른 곳으로 입장을 하라고 해서 더 좋은 정문을 그대로 통과했습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중국의 관광지 입장료는 매우 비쌉니다.
이 수입이 전체적으로 만만치 않다 보니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거겠죠. 이전엔 도심의 공원도 돈을 받다가 요샌 무료가 대부분이죠. 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전시나 돈을 받고 점차 무료로 개방하는 분위기입니다. 대신 철저하게 신분증으로 예약을 해야 하고, 신분증으로 입장을 하죠. 가끔 유명 관광지에 미리 예약이 안되어서 문 앞에서 입장을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중국 여행 시에는 이점을 잘 기억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명관광지다 보니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깃발을 앞세워 단체관광을 하는 분들도 많이 있네요. 이곳은 따로 가이드 설명을 신청하지 않아서 사전에 이런저런 학습을 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강물을 보러 오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죠. 이번에 여행한 여행지들이 딸아이에겐 그다지 흥미를 주지 못하는 자연환경들이라, 이곳 '도강언'도 이해를 구하고자 방문한 의미를 아이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알아듣는지 어떤 건지 결국은 들어가는 초입에 갖고 싶어 하는 인형을 하나 사주면서 아이를 달랬죠.
민강의 시작지인 높은 산악지역에서 민강을 따라서 이곳까지 이동을 했던지라 강물이 얼마나 거센지 직접 봤습니다. 그리고 그 대협곡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았죠. 물은 그렇게 흘러 이곳까지 이르렀는데 수위가 높아질 땐 여지없이 청두지역 전체가 수해를 입는 일이 일상적이었을 겁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주 오래 전인 기원전 3세기(306년 50여 년에 걸쳐 완성)에 이빙父子에 의해 드디어 물을 정복하게 됩니다. 바로 그 시설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뚜장옌(都江堰,도강언)'이죠. 이빙부자는 이런 공로로 인해 많은 칭송을 받게 되고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존경하는 인물이 됐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길래 이리도 난리일까요?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분이 쓴 글을 옮겨서 적어봅니다. (출처: 중국국제방송 글)
민강은 물살이 심해 도강언 건설 이전 홍수 피해가 자주 발생했다.
이빙 부자는 성도 평원의 주류인 민강(岷江)을 여러 개로 나누어 하천의 흐름을 분산시켰다. 우선 민강을 어취(魚嘴)라는 제방을 통해 주류인 외강(外江)과 지류인 내강(內江)으로 가른 뒤 내강에서는 보병구(寶甁口)라는 수로를 만들어 주변 지역의 농업용수 공급에 사용했고, 외강으로 연결되는 비사언(飛沙堰)이라는 둑을 추가 설치함으로써 홍수가 나서 내강이 범람해도 비사언을 통해 수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도강언은 물고기 입 모양의 어취(魚嘴)라는 제방을 통해 주류인 외강 (外江)과 지류인 내강(內江)으로 갈랐다.
성도 평원은 도강언 건설 이후로 민강의 범람으로 일어나는 홍수 피해를 줄여 도민들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한 나라 이후에도 역대 군주들은 도강언에 대해 지속적으로 보수와 개량을 진행했고, 특히 삼국 시기에 이르러 촉한(蜀汉) 승상 제갈량은 도강언 보수를 위해 1천2백 명의 인력을 동원했다고 한다.
도강언 건설로 이빙 부자는 물의 신으로 숭배받았고 해마다 이이랑과 이빙의 탄신일인 음력 6월 24일과 6월 26일을 계기로 이들 부자의 공을 기려 건립된 이왕묘(二王庙)에서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비록 22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수 차례 보수를 거쳤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지역 농업용수 공급에서 도강언의 독특한 역할은 대체 불가하니 가히 인류 역사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제가 이해하는 내용으로 조금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먼저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강언은 어취(魚嘴),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퇴(離堆)라는 유수시설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아래 이미지 오른쪽 붉은 표시)
물살이 매우 거센 지역이죠. 우선 이 거센 물살을 어떻게 순화시킬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겁니다. 이를 위해 먼저 어취(魚嘴 물고기 주둥이)라는 제방을 만들어 내강과 외강으로 물을 분리합니다. 어취의 각도를 동쪽으로 살짝 틀어서 외강과 내강의 비율을 6:4 정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어취만을 만들어 놓으면 물살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백장제百丈堤 를 만들어 물의 유속을 한 단계 조절해 줍니다. 외강의 물은 그대로 흘러 보내고, 내강의 물은 실제 농업에 활용할 수 있게 다시 유속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이렇게 분리된 물과 함께 아래쪽으로 굴러오는 암석들은 어취에 부딪혀 내강 쪽으로 쌓이면서 경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내강의 물은 다시 비사언(飛沙堰)과 보병구(寶甁口)로 흘러갑니다.
비사언은 내강으로 들어온 수량과 토사를 조절하는 제방입니다. 강수량의 변화로 인해 물이 불거나 모자랄 경우에 이곳을 통해서 물과 토사의 양을 조절합니다. 물은 계속 보병구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죠. 여기서 참 대단한 것이 하나 있는데 보병구의 우측 수로는 원래 한 덩어리의 산이었습니다. 여기에 수로를 뚫기 위해서 산을 잘라낸 건데요. 바위산을 잘라내기 위해 약 8년의 공을 들입니다. 당시엔 기원전이라 화약이 없던 시기였고, 생각해 낸 방법은 바위산을 가열했다가 물을 끼얹어 열 변화로 암석을 깨내는 방법입니다. (사진 왼쪽의 표시 부분)
이렇게 만들어진 보병구(꽃병의 목부분, 병목 부분)에 물이 흘러 들어가게 되죠.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퇴(離堆)라는 유수시설(물을 방류하기 위해 일시 저장하는 시설)을 만들어 물을 저장했다가 방류하는 시스템을 운용합니다. 사진 오른쪽의 사슬모양으로 표시된 부분들이 사람들이 직접 시공한 도강언의 인공 수리시설 부분입니다.
설명이 잘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과거 기원전에 설치한 수리시설이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 시설로 인해서 청두라는 도시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요. 이 하나의 수리 시설이 끼친 영향은 굉장합니다. 약 3만여 개의 크고 작은 수로가 생겼고, 40여 개의 현과 시가 도강언의 영향권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오랜 옛날에 유수의 곡류현상과 침식, 운반. 퇴적작용, 그리고, 암석의 풍화과정 등의 원리가 이미 적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정말 이런 곳은 미리 공부하고 가야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관광지입니다.
그 옛날 사람들이 이 험한 물살에 맞서서 어떻게 작업을 했는가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거라 추측이 되네요. 제방을 쌓는 데는 대나무를 엮어서 돌을 넣고 하나하나 쌓았습니다. 도강언 관광지 동선을 따라 움직이다 보면 군데군데 이런 옛날 형상들을 전시해 놓고 있습니다. 대나무나 통나무로 설치했으니 정기적으로 수리를 하거나 다시 쌓아줘야겠죠. 정말 보통일이 아닙니다.
여기 도강언 관광지는 입구부터 어취까지 갔다가 오른편의 도교사원까지 둘러보는 코스입니다.
수리시설만 둘러보는데 약 한 시간 반이상이 걸렸습니다. 이동거리가 꽤 길거든요. 그러고 출렁다리를 건너 사원 쪽으로 가면 시간은 더 걸리죠. 언제 다시 출구 쪽까지 가냐... 하는 걱정을 하던 찰나, 힘들게 올랐던 건물 뒤쪽으로 또 다른 문이 있었습니다. 동선이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요. 제 눈썰미 덕에 고생을 덜었습니다. 뒤쪽 문을 나서서 택시를 잡아 조금 편하게 이동을 했습니다.
중국의 한 저명한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건물이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닐 듯싶습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완 다르게 현대식으로 정비를 한 부분도 많이 보이지만, 기본적인 시스템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아직까지도 다른 곳들은 물난리로 피해를 보는데 이곳만은 여전히 평화롭습니다.
자연을 극복한 고대인의 지혜가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청두에 가신다면 두장옌에 한번 들러보심이 어떠실지요? 판다구경도 덤이구요.
저흰 오전 일정을 끝냈으니 얼릉 점심을 먹으러 어딘가를 찾아가야겠네요.
그렇게 또 다른 이동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