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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쏟기 Jul 31. 2024

붉은 혁명의 땅, 징강산에 다녀오다

중국 진강산 공산당혁명지를 다녀왔습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울림은 주변국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까지 치열한 투쟁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장정'이 그 정점이 되었죠. 장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무장투쟁이 중국 내에서 일어나게 되고 이런 격동의 시대에 민중들은 힘든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공산당 역사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을까요?

전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입니다. 국민학교시절에 '이승복 반공 어린이상'이란 것도 받았었습니다. 산에서 삐라를 주우면 얼른 학교나 파출소로 갖다 주어야 했습니다. 내용을 보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 

저 어렸을 땐, 똘이장군이란 만화가 유행이었습니다. 김일성 괴뢰를 때려잡는 전형적인 반공교육 만화영화인데, 어렸을 때 뭘 아나요... 돼지로 치환된 김일성을 때려잡는 똘이장군이 위대해 보였고, 영웅이었습니다.

1970년 후반 방영한 똘이장군 시리즈

지금 와서 보니 북한의 어린이들이 이런 만화를 보고 자라더군요. 

진영이 달랐을 뿐이지 저 어렸을 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공산당은 나쁜, 때려잡아야 하는 '빨갱이들'이었습니다.


중국에 처음 발 디딜 때 조금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공산당 나라에 간다는 금기의 공간에 접어드는 그런 느낌이 살짝 들었었죠. 중국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안기부에 잡혀가는 게 아닌가...

정말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이나 어렸을 때 세뇌되었던 '반공교육'은 스스로 행동의 제약을 만들었죠. 중국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원하지 않더라도 이념적 논쟁, 민족적 논쟁, 역사적 논쟁 등을 종종 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대상이 같은 한국인을 수도 있고 중국인일 때도 조선족일 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활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가능성이 높은 저로서는 '중립적', 좋게 말해 '외교적'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합니다. 논쟁을 해봤자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스스로인 저 자신에게는 수많은 질문을 던져보기도 합니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미래에 도움이 되는가?


중국 공산당 역사를 아는 게 중국인들과 교류하는데 좋습니다.  

중국인들이라고 마오쩌둥을 무조건 신봉하고 따르진 않습니다. 현 정치에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외국인과 의견을 교류하고픈 이들도 꽤 많습니다. 자신들의 한정된 교육의 인지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수의 중국인들은 자국이 공격받는 걸 싫어합니다. 아직도 시골에 가면 집안에 마오쩌둥 초상화를 걸어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건 이런 이들이든 저런 이들이든 외국인이 자국을 공격하면 방어기제가 작동합니다. 

공격하려면 무장해제를 시킨 후에 공격해야 대화가 됩니다.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앞서 전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공산당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고 자유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적'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와보니 제가 알고 있던 공산당과 중국의 공산당은 좀 다른 모습입니다. 왜 수많은 중국 인민들은 마오쩌둥 사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맹목적인 정신분열의 문제로 이들을 바라봐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이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의 깊이 있는 이해를 한 후, 우리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중국인들은 대한민국을 비판합니다. 그 비판이 무지에서 편협에서 온다고 마냥 단정 지어서는 이들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에 난무하는 수많은 국뽕 영상들을 보고 있자면, 기분은 좋아지지만 그리 얻을게 많지 않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때만이 상대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건 중국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비판적 사고'가 중요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낼 수 있는 지식과 혜안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죠. 한쪽의 시선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만이 덩치 큰 코끼리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거죠. 


징강산 가는 길
징강산을 대표하는 각종 선전물들


징강산(井冈山, 정강산)은 중국 강서성 징강산시 행정구에 속해 있습니다. 

주로 길안(吉安) 시에서 출발하는데요, 어쩌다 길안에 며칠 묵게 되어서, 딱히 가볼 만한 곳도 없고 유명하다는 이곳에 다녀왔습니다. 길안시내에서 약 100여 킬로미터를 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하더군요. 전날 태풍이 지나가서 여행객들 발길이 줄어들었나 생각했습니다. 


길안에 있는 공항은 '길안징강산공항(吉安井冈山机场)'이란 명칭으로 불립니다. 그만큼이나 이곳에서 징강산은 중요한 곳이죠. 얼마나 중요한 곳이냐 하면.... 비행기가 착륙하기 30분 전부터 차광판을 내리게 합니다. 밖을 보고나 사진 찍는 행위를 금합니다. 비행기가 내려서도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하죠. 너무나 중요한 곳이라서 자꾸 봐서 닳을까 봐 못 보게 하나 봅니다. 

요새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 식으로 보안을 유지하려고 하는지... 한심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살다 보니 별 경험을 다 해봅니다. 얼마 전 중국의 고위 국방관련자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미국에 핵미사일 자료를 넘겼다는 거죠. 물론 중국 내에서의 체포경위와 이유는 금기사항이지만요. 미국은 손바닥 보듯 다 꿰뚫고 있는데 괜히 바깥도 못 보게 막아버립니다. 

근데 못 보게 하니 더 보고 싶어 집니다. 군사기지에서 장풍을 수련할지도 모르니깐요. 


길안징강산공항(吉安井冈山机场)


징강산(井冈山)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2021년 4월에 방영되었던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의 내용을 잠깐 정리해 봤습니다. 공산당 창립 100년을 맞아, 중국에서 '홍색여행'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영상으로 여러 의의들을 분석한 내용입니다. 


징강산은 1928년 중국공산당이 처음 군사기지를 수립해 혁명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공산당 사적지 여행을 지칭하는 '홍색여행'은 주로 1920년대에서 30년대의 공산당이 국민당에 쫓기면서 세력을 다져나간 흔적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홍색여행은 단순히 중국공산당 역사와 정신을 학습한다는 의미 외에도 농촌이나 산골마을의 낙후지역에 지역관광을 촉진해서 소득을 높이려는 정치 사회적인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최근 중국정부에서 권장하는 홍색여행은 시진핑시대 중국을 파악하는 유용한 키워드로 볼 수 있습니다. 


초창기의 마오쩌둥은 공산당에서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 못했습니다.

소련의 코민테른지도하에 1920년 중국에서 공산당 조직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소련의 유학파나 소련의 영향권에서 공산당운동이 시작되던 초기였는데,  앞서 말했듯이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려 중국공산당 설립이 선언되었습니다. 이 때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마링(네델란드 태생)이 참석한 가운데 둥비우(董必武), 마오쩌둥(毛澤東), 장궈타오(張國燾), 저우포하이(周佛海), 천궁보(陳公博)를 포함한 13명이 모여 중국공산당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소련유학파와 지식인들이 주동하여 공산당 운동을 펼치던 시기, 보잘것없던 배경의 마오쩌둥은 한계가 있었겠죠. 그러던 중 큰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예전 역사책에서 배웠던 국민당의 공산당 테러사건입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대낮 공산당원을 색출하여 300여 명 살해, 500여 명 체포, 5천여 명 실종이라는 테러를 저지릅니다. 1차 국공합작이라고 불리는 공산당과 국민당이 사이가 좋던 시기(공동의 타도대상 일본). 국민당과 공산당의 양쪽에서 중화민국의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는 쑨원이 사망하자 장제스는 공산당을 위험한 존재로 파악해서 처리하고 난징에 국민당 정부를 수립하게 되죠. 애매하게 공존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 사건 이후에 노선이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상하이테러'사건 이후, 공산당 내부에서는 논란이 가열됩니다. 

공산당도 이젠 무력투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죠.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던 중국공산당은 러시아혁명에서 그러했듯이 노동자들을 통한 혁명이 기본 노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노동자들이 아닌 '농민'을 선택합니다. 농민에게 무기를 쥐어줘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그런 과정 속에서 국공합작이 깨져 국민당에서 축출된 공산당은 1927년 8월 1일 강서성 난창(南昌)에서 처음으로 무장봉기를 일으킵니다. 중국 본토에선 '난창기의(南昌起義), 난창봉기'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은 난창 봉기일을 건군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으로 무장하여 군대화했다는 이유겠죠. 

하지만, 이 봉기는 실패합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봉기가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하고 국민당에게 쫓겨 바로 이 진강산에 숨어 들어가게 됩니다. 


징강산을 설명하려니 이렇게 배경설명이 길어졌네요.

진강산을 가보면 산세가 매우 험합니다. 아마도 이런 곳이었기에 공산당이 국민당으로부터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는 국민당에 쫓겨 도망 다닌 이 시기가 오히려 세를 모을 수 있는 시기였죠. 비록 형태상의 도망이었지만, 결국 본격적으로 농민을 계몽하고 무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앞서 마오쩌둥이 주장한 농민을 계화 하는 노선은 이 과정 속에서 성공하면서 세를 확장하게 되죠. 우리가 많이 들은 적 있는 '대장정'도 결국 이런 과정이었기에 그리도 의미를 확장해서 해석하는 겁니다. 


진강산에 가면 표를 끊고 들어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루트가 있습니다. 저흰 시간도 별로 없고, 크게 관심도 없고 온 김에 공산당 역사나 좀 알고 가자는 그런 생각에 징강산 혁명박물관 井冈山革命博物馆 (중국 장시성 징강산)을 먼저 둘러봤습니다. 무료입니다. 

혁명박물관의 모습
관람객을 맞이하는 星星之火可以燎原(작디작은 불티가 들판을 태울 수 있다) 마오의 문구_ 혁명박물관 입구


온갖 붉은색들로 도배를 해놨습니다.

공산당의 색인 붉은색. 붉은색은 정렬적이고도 선동적인 색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붉은색을 선택했나 봅니다. 중국의 빨간색. '중국홍'을 이야기할 때. 공산당이기에 붉은색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부터 붉은색을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죠.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곳에 오니 뭔가 느낌이 옵니다. 징강산공항에 내려 호텔까지 이동하면서 주변의 땅의 색이 온통 붉은색이더군요. 붉은 홍토. 이게 이 땅의 색이었습니다. 붉은 벽돌이 이렇게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또 다른 색이 있습니다. 그건 노란색이죠. 진한 금빛나는 노란색인데. 이 색은 저~쪽 한족의 기원지인 중원의 땅색이 아닐까 추측을 해봅니다. 황토색이죠. 


우리는 좌익분자를 빨갱이라고 불렀습니다. 북한 공산당도 빨간색을 좋아하죠. 같은 공산당이니깐요. 같은 공산당이라고 하면 중국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우리 눈엔 다 같아 보일 수 있으니 억울해도 할 수 없죠. 어쨌든 20년 넘게 중국에 살고 있지만, 공산당은 아직까지도 제겐 어색합니다. 

이렇게 징강산에 와서 공산당 역사를 살펴보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요? 

갑자기 생각납니다. 

이러다가 혹시라도 청문회에 불려 나가 빨갱이 아니냐고 질문받을까 걱정도 됩니다. 다행히도 청문회 불려 나갈 정도의 주목받는 인물이 못되어서 좀 편하게 살겠지만요. 그래도 보험을 들어놔야겠기에 한 혁명기념 음료를 파는 곳에서 빨간 별모양의 초콜릿을 씹어먹는 사진을 남겼습니다. 

너무 소심한가요? ^^


전시장엔 온갖 공산당 선전물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그중에는 나팔도 있던데, 공산당 초창기부터 전투 중에 나팔을 불었나 봅니다. 한국전쟁 때도 불었겠죠.

약간 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쩌겠나요. 역사인데요.

수많은 공산당 인물들 초상화들이 걸려있습니다. 나이를 계산해 보니 젊은 청년들이 많더군요. 대단한 혁명전사들이라고 선전을 하지만,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과연 이들이 공산혁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목숨을 던졌을까? 여기에 걸려있는 인물들 외의 수많은 무명의 전사들. 이들은 다 어디에 있고 역사는 어떻게 기억할까? 이들은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던졌을까...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은 이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이들이 바라던 세상은 과연 왔을까? 

이번엔 너무 감상적인가요? 

전시관 내부 모습

중국사람들은 혁명정신을 배우러, 혁명학습을 위해 이곳에 방문합니다.

앞서 설명한 2021년의 한국 프로그램에서는 중국공산당 100년의 홍색여행과 애국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2021년 이때 코로나로 일부 도시를 봉쇄하면서 코로나를 끝장내겠다고 이겨내겠다고 공산당을 따르라고 선동했죠. 결과는? 다들 잘 아십니다. 

미국과 맞짱을 떠보겠다고 몇 년을 싸우더니 이젠 힘이 많이 빠진 듯싶습니다. 지방정부들은 돈이 없어 기업들에게 3년 치 세금을 먼저 줄 수 없냐고 구걸을 합니다. 판로가 막혀 중국 기업들은 해외에 나가서 어떻게든 물건을 파는 꼼수를 찾아보려고 노력하지만 미국이 가만 두질 않습니다. 


중국인들은 혁명의 요람지. 이곳 징강산에 와서 선지인들의 혁명정신을 배워, 정신무장을 한 후 다시 미국과 싸우러 나가야 할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홍색여행으로 지역인들의 수익창출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젊은 세대들도 점차 홍색여해에 많은 참여를 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죄다 타 지역에서 버스 타고 온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향수에 젖기도 하겠죠. 말끔하게 차려입은 하얀색 와이셔츠에 빨간 천들을 두른 20~3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공무원들입니다. 공무원이 되면 혁명지 답사를 하고 보고서를 올려야겠지요. 각 회사마다 공회가 있습니다. 일종의 공산당 노조협회 같은 거죠. 일정규모 이상이면 의무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공산당원인 직원들에게서 당비를 걷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 답사를 와야죠. 

아이들이 단체로 선생님 지도하에 움직입니다. 학교에서 공산당 역사를 배워야 하기에 답사를 옵니다. 이래저래 사람들이 참 많이 옵니다. 

단체로 혁명박물관을 관람 오는 사람들

그런데 말입니다. 

커피 한잔 마실 공간이 마땅치 않고, 단체로 움직이는 관광객들은 여지없이 중간에 물건 파는 곳으로 인도됩니다. 낮에 4:30이면 모든 유적지에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관리자들 퇴근해야 하기에 그리 정해 놨겠죠. 아직도 그렇게 돌아갑니다. 

홍색여행 뭘 볼 게 있고, 뭘 배울 게 있을까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들 보다 혁명지 답사 인구가 많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전시 마지막 부분에 시진핑의 업적에 대해 전시해 놨습니다. 

코로나 대책에 대한 짧은 포스터들이 보더니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뭘 잘한 게 있다고 저걸 붙여놨는지. 모르겠네요.

우측에 '항역정신'이라고 코로나 정신을 강조하는 사진들 

전시실을 이동하는 복도에 혁명영웅들의 흉상을 전시해 놨습니다.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은 누가 누구인지 지나가면서 알아보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십니다.

전 그중에 마오쩌둥 흉상 근처에서 펑더화이(彭德怀)의 흉상을 발견하고 다가갔습니다. 네 번째인가에 있었는데 서열순서라고 봤을 때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 의외로 놀랐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펑더화이는 대단한 장군이었죠. 우리에게는 적장이었지만, 중국공산당 역사에서는 공적이 큰 장성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이 너무나 처참했기에 더 많은 연민이 가게 됩니다. 적장이지만 그는 군인이었고, 자국의 나라를 위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을 쟁취한자, 이를 지키려는 자의 눈 밖에 나면서 비운의 삶을 마감하게 되죠. 

혁명인사들 중에 발견한 펑더화이 흉상 (마오쩌둥 근처에서 발견)

펑더화이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쓴 아래글에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 혁명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그들의 역사이지만,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의 이들이기에 그들이 어떤 역사와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왜 그러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하는 측면에서는 학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들과 대화를 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필요하겠죠. 


혁명의 요람지였던 이곳. 징강산

그렇게 시작된 '대의'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이 한 사람의 권력을 위해, 한 사람의 무모한 실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우리는 뒷부분의 역사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혁명정신을 배우기 위해서는 불의에 항의할 줄 알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은 그렇게 노력해서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하며 중국에 살고 있는 전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습니다. 아직도 완성된 성숙한 민주주의 그리고 지도자들이 아니기에 잡음과 혼란이 계속되지만 논란의 범주와 중요성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이 또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탄탄해지겠죠.


다시 방문할 일이 없을 듯싶어.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었네요. 


중국도 한국도 더 나은 발전이 있길 기원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지역 특색을 반영한 음료



참고로 중국 젊은세대들의 애국주의가 주변국들에서 우려로 비춰지는거 같은데요.

이전에 제 생각을 정리했던 글이 있어 같이 첨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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