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비함과 따뜻함
그들의 자유? 해고할 자유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자유
다양한 사회적인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보수 단체들과 어버이 연합 그리고 요즘엔 어머니 연합이 시위 현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언론은 참 잘도 이런 시위 장면을 찍어 보여준다. 정말 찍을 거는 안 찍고 이런 장면만 찍어 보여준다. 왜? 논쟁이 될 수 없는 어이없는 이슈도 이렇게 시위하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로 둔갑되기 때문이다. 실로 2 만원의 힘은 놀랍다!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나이가 지긋한 중년 이상의 아저씨들이 한결같이 ‘자유’라는 단어를 외친다. 과연 이 분들이 외치는 자유가 누구를 위한 자유인지에 대해 우리도, 그리고 이 단어를 그저 신봉하듯이 외쳐대는 어버이 어머니들은 생각해봤을까? 이 질문 꼭 세종은 던져보고 싶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외치는 자유가 자신의 아들과 딸의 밥줄을 끊을 수 있는 자유이며, 더 나아가 자신들이 금쪽같이 여기는 손자, 손녀들을 영원한 비정규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을까? 아마도 이런 생각하면서 이런 자유를 외칠 어버이, 어머니들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분들은 1950년의 한국 전쟁이 만들어낸 학습효과로 인해 그저 북한의 공산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그리고 그 북한을 추종하는 불순 세력 즉, 종북주의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하나의 이념적 기준으로 이 자유란 단어를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차라리 이 자유가 그냥 그런 자유였으면 하는 바람을 세종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자유는 두 가지 자유의 종류 중에 하나인 '강자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럼 나머지 한 종류의 자유는 '약자의 자유'이다. 약자의 자유는 강자의 자유를 다룬 후에 살펴보겠다. 어버이 어머니들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알고 있는 자유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서 자주 보인다: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자유민주주의 등이다. 이런 자유로 시작되는 다양한 표현들이 우리의 정치, 경제적인 토론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모델이 전 지구촌을 최근 40여 년을 지배해 오면서 자유라는 단어는 우리의 정치, 경제적인 현실에서 필수적인 이데올로기 혹은 가치로 간주되어 왔다.
가장 악랄하고 교묘한 지배 이념이 자유다!!
자유라는 가치는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만약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마치 숨 쉴 공기가 부족한 환경에서 사는 듯 한 느낌과 같다고 느끼실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자유는 시민 다수가 자유를 외치면 외칠 수록 역설적으로 시민 다수의 목을 심하게 조르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시민 다수가 떠올리는 자유는 학교에서 아무런 숙고나 토론 없이 외운 헌법적 자유다. 대한민국 헌법이 12조에서 22조까지 보장하고 있는 자유이다. 신체의 자유를 시작으로, 양심, 종교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대한민국이 자유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자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헌법이 여러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만큼 시민들도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자유가 시민의 삶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충분한 숙고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한국 사회가 갑질 사회가 돼감에 따라 점점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자유의 파괴력에 대해 모르는 건지, 아니면 종북으로 찍힐까 두려워 자유를 제한하자는 얘기를 못하고 있는 건지 세종은 궁금해진다. 저소득층 자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청년, 동네의 자영업자, 구멍가게 규모의 보습학원장, 동네 미용실 주인, 재래시장 상인, 아파트 경비원이 심지어 을도 아닌 병으로 여겨지는 우리 현실에서 자유가 얼마나 위험하게 남용될 수 있는지를 목도하면서도 자유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아 세종은 졸라 답답하다.
강자의 자유가 만들어 낸 헬조선의 모습 -
동물의 우리가 허물어진
에버랜드의 서바이벌 게임
강자와 약자의 관계를 가리키는 갑, 을의 관계에서 자유란 대단히 조심스러운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와 같은 제삼자의 개입과 규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강자와 약자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은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에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강자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규제하지 않으면, 약자의 자유는 심각한 정도로 침해받을 수 있고, 심지어는 약자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자의 자유를 약자와 똑같이 보장하거나 그 이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은 문명사회를 절대적 자유가 존재하는 야생상태, 즉 동물의 왕국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절대 강자인 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의 자유가 공정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규제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져 왔는지를 우리는 지켜봐 왔다. 강자의 자유를 통제하지 않았을 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군인들에게 군사반란을 할 수 있게 하는 자유,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해서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자유, 시민이 가지는 통신의 자유를 검찰 권력을 이용해 사찰할 자유, 정치인들이 22조가 넘는 우리 돈을 건설 대기업들에게 퍼 줄 수 있는 자유, 34조라는 돈을 자원 개발에 투자하고 거의 대부분을 잃어도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관련 부서 장관과 공기업 사장의 자유, 초대형 슈퍼마켓이 유통업에 진출해서 재래시장 상권을 침해할 자유, 대기업 제과점, 심지어 미용실, 밥집, 대리운전 프랜차이즈가 골목 구석구석까지 들어와 동네의 수많은 상점을 무형 문화재와 같이 보호해야 할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자유, 선진국의 값싼 농산물이 관세 없이 자유롭게 대한민국 땅에 들어와 가격 경쟁력이 없는 우리 농산물과 경쟁할 자유, 중국이나 인도, 그리고 제3세계 국가의 노동력이 세계화에 힘입어 국경을 넘지 않고도 우리의 또 가격 경쟁력이 없는 노동력과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우리의 일자리 즉, 국내 대기업의 투자를 자신들의 나라로 빼앗아 갈 자유, 대학 입시에서 공공연하게 고교 등급제를 적용하는 현실에서, 더 나아가서 특목고나 자사고 학생들을 위한 전형이 존재하는 입시 현실에서 부자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등록금이 비싼 자립형 사립고에 입학시킬 수 있는 자유의 결과로 매년 서울대가 신입생 절반이 넘는 학생을 자사고나 특목고 출신으로 입학시킬 수 있는 서울대의 자유 등이다. 이런 강자의 무제한적인 자유의 사용이 조선을 헬조선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강자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보장한 한국사회는 동물의 우리를 허물어버린 (규제완화) 에버랜드에서 야생동물과 인간이 서바이벌 게임 (자유시장, 자유무역)을 하면서 심판은 최소한의 역할 만을 하는 (작은 정부) 광경과 절묘하게 비유된다. 급기야는 미아보호소나 푸드코트의 문마저 열어주면서 (민영화) 이미 배부른 맹수와 남아 있는 겁에 질린 인간들 사이에서 서바이벌 게임 2차전을 시작하라고 하는 것과 헬조선의 현재 풍경은 절묘하게 겹친다. 이렇게 강자와 약자가 아무 규제나 심판 그리고 보호 장비도 없이 경쟁하도록 허락해주는 경제 정책이 신자유주의다. 이런 자유가 우리 사회가 가치 있게 여기면서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 그 자유다. 이러한 형태의 자유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동시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원했던 자유였을까? 보수 단체의 어르신들도 자신들이 목청 터져라 외쳤던 자유가 이런 강자의 자유였단 사실을 안다면 계속해서 이전과 똑같은 심리 상태로 자유란 단어를 외칠 수 있을지 세종은 궁금해진다.
약자인 을과 병의 자유는?
경제적 자유다!!
정치, 경제 권력이 쌓아 높은 거대한 벽 앞에 항상 왜소함을 느끼면서 좌절하는 약자인 시민에게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란 질문은 정말 필요해 보인다. ‘자유’란 개념은 다양한 측면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이 때문에 바뀔 수 있는 의미를 가진 다차원적인 하나의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자유란 개인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자신의 삶에 관한 문제에 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독립성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시민의 권리인 언론과 사상의 자유, 교육과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그리고 결혼 시에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나라로 이주할 수 있는 개인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정치철학은 일반적으로 이것을 ‘~에 관한 자유’라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자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유의 종류가 있는데, 이것은 ‘~로부터의 자유’이다. 예를 들면, 배고픔으로부터의 자유, 억압적인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건강을 해치는 작업환경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리킨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회, 경제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시민적이고 개인적인 형태의 자유 즉, 사상, 신체의 자유 등이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는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 남게 된다. 약자인 노동자 계층 즉, 다수 시민 계층을 위한 경제적인 자유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운동이 사회 민주주의였다. 갑의 무한한 자유의 활용 (?) 하에서 을과 병인 시민 다수가 가져야 할 자유의 개념과 이 자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위해 사회 민주주의 운동은 하나의 소중한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회 민주주의는 앞 서 언급한 두 가지 종류의 자유를 시민 다수가 가지지 못했을 때 일어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스웨덴이나 독일 즉,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와 러시아와 북한의 사회주의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말기를 세종은 강추한다. 그 동네는 짝퉁 사회주의다. 세종은 러시아와 북한의 사회주의를 극혐 한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는 시민 전체를 위해
비, 바람을 막아주는
큰 지붕과 같다!!
어쨌든 사회 민주주의가 등장했을 때, 노동자들은 투표할 자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모일 자유, 그리고 정치, 경제적인 권위인 정부와 기업을 자유롭게 비판할 자유가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개인적인 자유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법률이 노동자들의 시민적인 자유를 보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빈곤이 노동자들의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신들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자유를 막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시민 다수인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결여되어 있었다. 자유에 관한 사회 민주주의적인 개념은 사회 내에서의 다른 경제적인 지위가 각각의 시민들에게 각기 다른 정도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빈곤으로부터의 자유가 시민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교육받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꾸는 자유까지도 심각하게 제한받게 된다. 실제로 아이들의 부모가 어떤 경제적인 지위를 가졌는지가 아이들의 교육 기회의 범위를 결정하게 된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아이가 가지는 꿈과 비강남지역의 한 아이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가지는 꿈, 이 두 꿈의 격차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유가 진정 우리에게 다른 모든 자유를
누리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유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즉,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경제적인 보호는 우리 아이들의 꿈꿀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다.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꿈꿀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도 질병과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인 도전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보호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자유 민주주의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시민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설계할 자유와 이를 통해 자기 삶과 운명에 대해 결정할 자유를 시민이 누릴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시민들이 누리는 경제적 자유는 시민들이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까지 시민들에게 허락할 수 있다. 실직, 질병, 그리고 노년기의 경제적인 보호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만들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자유를 시민들이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유처럼 오래되고 심지어는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평등에 대한 요구를 자유와 함께 계속해서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약자인 시민이 가지는 자유의 범위는 그 사회의 불평등의 정도와 상관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강자에겐 더 큰 자유가 허용되는 반면에 사회, 경제적인 약자에겐 너무나 작은 정도의 자유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뿐 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정치적인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에까지 불평등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권력의 중심지인 여의도에 위치한 국회에 대해 기업과 시민들이 각각 가지는 접근권을 생각해 보면 경제적 지위에 따라 입법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 또한 차별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학습된 불평등을 넘어
과거에나 지금에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한 개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변 환경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불평등을 학습하게 되고,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불평등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심지어는 현대의 개인은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정치, 경제적인 위계 구조 속에서 상층부에 속한 집단을 선망하기까지 한다. 왜?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는 능력도 있고 외모가 훌륭하며 거기다가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 만났다기보다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계속해서 교묘하게 우리를 드라마를 통해 세뇌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평등이 자신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에 체념하거나 아예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거기다가 일부의 교육받은 시민들 즉, 세종의 표현을 빌리면 전문개 (?)들이 미디어에 나와서 귀족들의 편에 서서 자유를 외치고 시민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공산주의적인 생각으로 낙인찍으면서 다수인 동료 시민들의 눈을 가려버리기까지 한다. 반값 등록금과 의료복지에 관한 공약과 계속되는 이 공약들의 파기가 정권을 거치면서 반복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복지 관련 이슈 밑에 평등에 대한 가치가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해서 이 평등의 가치가 약자인 다수 시민에게 진정한 자유 즉, 표현, 사상, 신체의 자유와 같은 시민적 자유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자유 즉, 억압적인 가난과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자신의 운명을 설계함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자신이 살아갈 정치 공동체를 진보시킬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한다는 사실 또한 대중의 관심 밖에 있는 것 같아 세종은 안타깝다.
강자의 자유를 제한할 때야 비로소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던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지 벌써 2세기가 지났다. 프랑스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는 대부분의 국가의 헌법의 형성에 핵심적인 가치로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정치, 경제 공동체의 형성의 근본이 되어야 할 헌법이 마치 한국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현실을 바라보면 평등과 자유는 너무 흔한 이름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겐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가치들로 느껴진다. 평등은 모든 시민이 같은 꿈과 똑같은 경제적인 지위를 가짐으로써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평등은 시민 각자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와 자신이 살고 있는 정치 공동체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평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자유는 강자에게만 무제한적인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 반면에 시민 다수인 을과 병들은 자유의 상당 부분을 빼앗기게 된다. 시민 다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권력을 가진 강자들이 가지는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평등의 가치를 권력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향유해왔던 자유의 크기가 평등에 대한 다수 시민의 요구에 의해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적인 전문개 (?)들은 평등에 대한 요구가 자유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1980년대 이후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자유시장과 무역, 기업가의 경제활동에 관련한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규제 완화, 민영화와 같은 사적 재산권의 보호와 확대 같은 조치들은 선진국과 기업들, 그리고 지구촌의 수많은 강자인 갑들에게 약자의 자유를 거침없이, 심지어는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인 책임감 없이 합법적으로 유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평등은 위계 제도 즉, 지배의 피라미드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약자인 을과 병의 유일한 무기는 평등이란 가치를 죽을 때까지 외치고, 이 목소리를 중심으로 을과 병들이 연대하는 것이다. 이 싸움은 쉽지 않다. 끊임없는 갑들의 방해와 이러한 방해의 한 형태로 을과 병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시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평등은 각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위계 제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도전받는 엘리트들은 당연히 방해할 것이고, 자신이 갑은 아니지만 갑이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을과 병들로 인해서 이 싸움에서 질 확률이 매우 높다. 한 예로, 교육과 의료복지의 확대와 같은 이슈가 쟁점이 되면 갑인 사람들에게서만 공짜 복지란 표현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을과 병인 사람들의 입에서도 같은 소리가 나오면서 복지정책은 국민 다수를 복지 의존적으로 만들고, 이러한 복지 제도를 교묘히 활용하는 부정 수급자가 발생하는 가능성에 대한 주장들이 갑이 아닌 을과 병의 입에서 나오는 모습이 쉽게 보인다. 전문개들의 세뇌 덕분이다. 시민이 낸 세금을 정부로부터 돌려받는 것이 복지이다. 공짜 혹은 무상 복지란 전문개 (?) 집단과 언론이 만든 프레임에 불과하다. 시민 다수가 기여하는 세금에 기초한 복지는 오히려 사회, 경제적인 구조적 변화로 실직하거나 질병으로 인해 실업 상태에 빠진 시민을 경제적으로 보호해 줌으로써 다시 취업하게 해 주고, 그에 따른 소득에 대한 세금 납부를 통해서 사회와 국가에 시민이 다시 기여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국가 단위의 투자이다. 복지 부정수급자에 관한 문제에 관련해서도 처벌을 강화하는 방법이나 효율적인 관리체계를 찾아야지 경제적인 보호가 필요한 다수의 시민들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보수적인 언론은 갑이 아닌 다수의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갑이라고 착각하도록 만들고, 실상은 을과 병인 시민들을 갑의 논리로 세뇌시킴으로써 계속해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이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싸움에서 계속해서 그들이 이겨왔다. 이에 따른 결과는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의 반의 월급이 2백만 원이 채 안 되는 현실 속에서도 보수당이 총선과 대선에서 계속 승리하는 현실로 나타났다. 비관적이다. 하지만 싸움은 지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언젠가 승리의 맛을 볼 수 있는 확률은 낮게나마 존재하기 때문이다. 강자의 자유와 약자의 자유가 다르게 허용되고 있는 현실, 강자가 언제나 이기도록 만들어주는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우리가 원하는 시장과 무역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평등 없는 자유는 강자에게만 무제한의 자유 즉, 특권을 제공할 뿐이라는 인식, 상류층의 자녀들에게만 비싼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시장주의적인 교육 정책이 을과 병의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인식, 우리 사회 전반에 깊숙이 침투한 다양한 갑과 을의 권력관계가 아파트 경비원을 자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강자의 자유가 적절하게 제한되지 않을 때,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꿈꿀 수 있는 자유마저 빼앗길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이 확산되면 이 기나긴 전투의 승자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하는 이유는??
근대 이후의 민주국가에서 한 개인은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권력을 인정하게 되는 사회 계약의 한 계약자가 된다. 하지만 한 번도 모든 시민은 이 계약에 서명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약의 약속이나 규정들은 신기할 정도로 상당 부분 잘 지켜져 왔다. 왜? 이런 계약이 있는지도 모르는, 어디서 들어 본 적은 있는데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졸라 중요한 계약임에도 바꿀 힘이 없다고 느끼는 체념한 시민들이 졸라 많기 때문이다. 계약의 내용은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대신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절대적인 자연권의 일정 부분을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위해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루소는 이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해 입법의 과정에 시민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사회 계약에서 중요한 점은 개인이 국가 권력의 정통성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와 함께 개인 자신의 권리와 자유에 대해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라는 국가 서비스의 수혜자는 각 사회의 갑들인 엘리트들이었다. 을과 병인 다수 시민들은 보호받을 재산 자체가 없었다. 뭔가 우리가 밑지는 장사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생명의 보호는 갑과 을의 공통된 부분이고 국가의 존재 목적 중에 사유 재산의 보호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핵심 이슈가 되는데 이 보호의 혜택은 주로 가진 자들, 현대 사회의 갑들에게 주로 혜택이 독점되고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유재산권 보호라는 국가 서비스의 수혜를 더 많이 얻는 갑들의 자유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국가에 의해 제한되어야 하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을과 병의 보호해야 할 재산보다는 슈퍼 갑의 재산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보호받는 사유재산권의 크기에 비례해서 제한되어야 할 자유의 범위도 더 커져야 한다고 보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보호받을 재산도 별로 크지 않은 을과 병의 경제적 자유는 더욱더 보장하고 반면에 슈퍼 갑의 경제적 자유는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더욱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 자본의 집중과 독점의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시민들이 사회계약을 읽어야 하는 더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세종은 강력하게 우긴다. 루소도 슈퍼 갑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부는 국가 권력의 통제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시민 다수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써의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호받는 사유재산의 양에 비례해
슈퍼리치 (1조 원 이상의 자산가)의 자유는
더 제한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의 근원은 지구이다. 지구는 공공재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는 어느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공동 소유이고 따라서 모든 자원과 부는 마땅히 세계시민 모두에 의해 공유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명을 설립한 소수의 힘 있는 인간들이 나머지 다수의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개인이 원하는 곳에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고, 사과와 보리를 식량으로 삼을 수 있는 자유를 문명이 박탈했다. 그래서 땅에다 선을 그어 놓고 자기 땅이라고 우기면서 부와 권력을 독차지했던 강자들의 자유는 이제 제한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샤를 푸리에 (Charles Fourier ;1772-1837)처럼 세종은 강력하게 우긴다. 푸리에는 인간이 가지는 권리 예를 들면, 원하는 어디에서든 사냥하고 낚시할 권리, 과일을 따서 먹고 그리고 자신의 소를 들판에서 키울 권리가 어느 날 뜬금없이 선 그어 놓고 자기 땅이라고 우긴 강자들에 의해 침해된 사실은 ‘문명’이 이런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모든 개인들에게 최저 생계보장을 빚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거주할 수 있는 평범한 정도의 거처와 하루 세끼 정도는 문명사회가 모든 개인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명사회란 소수의 개인이 지구 즉, 토지와 그 산물을 독점해서 다수의 시민이 자연이 준 선물을 누릴 기회를 박탈한 사회를 의미한다. 여기서 자연이 우리 모두에게 준 선물은 우리가 원하는 어디에서든지 사냥하고, 낚시하고, 과일 따서 먹고, 자신의 가축을 어디서든지 키울 수 있는 자연적 권리를 의미한다. 물론 이런 이유로 개인의 부단한 노력으로 형성된 다수인 약자의 사유 재산권마저 부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촌에 을과 병인 약자가 가지고 있는 사유 재산권은 강자인 갑들의 자유의 남용에서 비롯된 횡포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자유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피에르 조셉 프루동 (Pierre-Joseph Proudhon ;1809-65)의 주장에 필자도 심하게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퍼 갑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 자본은 마땅히 공권력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 슈퍼 갑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다 가지고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그들도 한 국가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정 부분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사회 계약의 한 계약자로서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슈퍼 갑들의 부의 대부분은 나라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전쟁과 약탈, 노동력 착취, 국민 세금을 통한 전략적인 국가의 보호와 지원, 국민 다수의 희생과 헌신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국민 연금과 같은 공적 기금이 이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슈퍼 갑들인 자본가들의 부는 공적 성격을 분명히 띠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거대 자본가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시민 다수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사회 계약을 새롭게 읽을 수 있을 때 을과 병인 시민 다수는 진정 자유다운 자유인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종류의 인간이 두 가지 자유를 가졌을 때
각각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수 시민에게 필요한 자유는 시민 자신에게 자신들의 삶과 밀접히 관련된 사회, 경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즉, 시민 자신들의 생활과 미래에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것이 시민 자신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한 사회에 태어난 아기가 세상을 살면서 자기의 꿈을 경제적인 제약이나, 이로 인한 걱정 없이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세상,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청년이 등록금 걱정 없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세상, 젊은 청춘들이 주택이나 재정적 문제에 대한 걱정 없이 결혼할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세상, 이로 인해 돈이나 경력 단절 없이 출산할 자유를 가질 수 있는 세상, 경제적이고 산업적인 구조 변화 때문에 실직한 노동자가 당장의 생계 문제 때문에 근무 조건이 열악한 직장을 선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고용보험을 누릴 수 있는 세상, 치료비 걱정 없이 모든 시민이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세상, 노년에 생계비의 문제 때문에 을도 못 되는 병의 신세로 아파트 입주자들이 주는 모욕을 받지 않을 자유를 노인들에게 줄 수 있는 세상과, 동시에 한 국가의 경제에 평생 동안 기여하고 이제는 편안한 삶에 대한 마땅한 권리를 가진 모든 노인들에게 자신의 남은 생을 평화롭고 여유롭게 설계할 자유를 주는 세상에서만 비로소 시민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강남의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이의 꿈꿀 수 있는 자유의 크기와 폭이 강북의 한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이의 꿈의 크기와 폭보다 훨씬 크다면, 또한 강남의 아파트에서 자신의 삶을 여유롭게 설계하며 마무리하는 노인과 혹한의 추위와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된 쪽방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며 강남의 한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살아가는 두 노인의 꿈의 격차가 너무도 크다면, 자유는 그저 신기루와 같은 허상일 뿐이다. 자유란 그 이름 자체가 자유가 박탈된 시민의 정신을 마취시켜서 마치 시민들 자신이 자유를 향유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환각제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명시한 헌법을 쓴 사람들과 이렇게 외치고 있는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자유가 환각제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을과 병인 우리의 자유를 얻기 위한 길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에게 시민의 삶에 근본적인 문제인 복지정책에 관련해서 시민들이 누릴 복지정책의 종류와 그 정책의 폭을 사회적 토론을 통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소수의 정치인인 아닌 시민 자신들에게 주어질 때,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시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임을 시민들이 깨닫고 이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는 구름 사이로 자신의 모습을 시민들에게 살짝 보여주기 시작할 듯하다. 요 자유란 애 좀, 아니 정말 비싼 애이기 때문이다. 때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을 잘 못 만나면 대단히 잔인하고 폭력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이 애를 찾아서 잘 돌봐야 한다.
Bibliography
Carlsson, I. and Lindgren, A. M. (2007), What is Social Democracy? (Sjuhäradsbygdens Tryckeri AB, Borås, Sweden).
Wokler, R. (2001), ‘Rousseau’,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