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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Aug 18. 2016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 편 최종회

갑질 대응 매뉴얼을 16년 동안 필수 과목으로??!!!








오늘의 학교는 우리 애들을 이딴 식으로!?







필립 잭슨 (Philip Jackson)의 1968년의 책 ‘교실에서의 삶 (Life in Classrooms)’이란 책에 따르면 현재의 학교가 우리 아이들을 민주주의 국가로 위장된 독재국가을 위한 최적화된 국민 (개, 돼지)으로 만들고 있다고 폭로한다. 현재의 학교교육의 교과과정에 숨겨진 설계는 역사책에 숨겨진 의도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 편 2 참조) 보다 훨씬 더 깊이 학교현장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잭슨은 주장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숨겨진 교육과정은 교실에 존재하는 ‘군중 속에서 칭찬이 이루어지는 방식, 그리고 교실에서 권력이 나누어지고 행사되는 방식'을 통해서 은밀하게 우리 아이들을 독재국가에 딱 맞게 길러낸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나쁜 그리고 멍청한 생각들 예를 들면, 대의민주주의의 우수성 (생각공장의 시선 - 정치철학 편 1,2 참고 필요), 여러 위계 제도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 편 부록 참조), 그리고 위계 제도의 또 다른 얼굴인 불평등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 불평등한 위계구조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 거기다가 개인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는 생각들은 정말 독재 국가를 위한 국민에게나 필요한 나쁘면서 동시에 멍청한 노예들이 가져야 할 생각들이다. 근데 학교에서 애들에게 이런 생각과 신념을 가르친다는 거 참 큰 문제다. 어떤 무식한 놈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국가가 국민을 위해 뭘 해 줘야 할지를 생각하기 전에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고 했던가? 전형적인 국가주의적인 사고다. 이 인간과 같은 권력을 장악했던 족속들은 국가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못된 버릇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즉, 지네들한테 우리가 충성해야 한다고 지껄이고 있는 거다.







학교가 저항정신이 거세된
독재국가의 국민을 만든다!?







이 권력에 환장한 놈과 년들은 진짜 멍청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회계약론도 읽어 본 적이 없거나, 혹은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하고 권력에만 눈먼 놈들일 가능성이 높다. 세종이 성차별적 언어를 사용했다. 급 수정하겠다. '권력에만 눈먼 년, 놈들이다.' 시민이 자연 상태에서 누릴 엄청난 양의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국가가 규정한 즉, 시민 대표에 의해 정해진 법률과 규칙에 따르는 것은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겠다는 약속 때문이라는 사실이 사회계약론의 핵심이다 (이 사회계 약도 시민 다수에 밑지는 장사이기 때문에 2016년 이후를 위한 시민 다수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다시 계약해야 한다. 이에 관한 세종의 주장은 추후 시간 나는 데로 글을 올리겠다고 약속드린다. 사실 그렇게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 아니,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는 시민의 여러 권리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시민의 하인들 (civil servants)인데 이 권력에 눈먼 얘네들은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양 실제 주인인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는 무식하고 용감한 생각을 여태까지 가져왔다. 무식해서 용감한 건가? 아니면 그냥 힘이 있어서 지랄하는 건가? 어쨌든 국가를 위해서 시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인데 어떤 얼빠진 인간들은 시대착오적인 미국 대통령의 말을 그 좋은 기억력으로 뿌듯해하며 떠들어대고 있는 걸 보면 세종은 환장한다. 근데 이런 걸 학교 선생님이 아직까지 우리 아이들한테 혹시 떠들며 강조하고 있을까 봐 걱정된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더 무섭고 끔찍한 것?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위에서 언급된 못된 것들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이 있다. 잭슨은 ‘학창 시절 교실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 군중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미리 학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실에서 군중인 학생을 조종하기 위해 교사는 상벌제도를 사용한다. 잭슨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상벌 제도는 숨겨진 교육과정의 하나로 학생들에게 학교 규칙이나 교사의 의견에 복종하는 학생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용된다고 한다. 이러한 말 잘 듣는 학생은 십 년이 넘게 지속되는 대중교육을 통해 결국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하는 시민 집단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독창성이란 가치보다는 교사의 의견과 권위에 순응할 때 학생에게 상이 주어진다. 아이가 가진 독창성이 샘의 권위를 금 가게 할 때, 혹은 아이가 가진 지식이 샘의 지식보다 더 깊이 있을 때 이런 아이는 한 마디로 찍힐 수 있다. 이런 일은 생각 공장에 다니는 학생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사건들이다. 그리고 특히, 고등학교에서의 샘들은 학생부라는 놀라운 권력을 가지고 있다. 샘에게 학생이 한 번 잘 못 보이면 학생부에 좋은 평가가 적히기는 글러버 릴 수 있다. 근데 문제는 이런 가르치는 사람의 갑질 비슷한 것들이 고등학교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성과 그 지성에 따른 합리성이 지배해야 할 대학에서 합리성으로 무장한 교수들이 실제로는 갑질의 종결자가 되어 제자들을 괴롭힌다. 교수의 여러 형태의 갑질은 뉴스의 단골손님이다. 너무 많은 뉴스가 나와서 여기에 열거하기에는 세종의 가녀린 손가락에 몹쓸 짓을 하는 것과 같다. 차이는 있겠지만 특히, 입시와 취업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가르치는 사람들의 권력의 무게는 상당하다. 이 때문에 이들이 가르치는 분들인지, 아님 권력을 휘두르는 분들인지 잘 분간은 안되지만 학생들이 이분들에게 감히 개기면 안 된다는 설이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파다하다.








연대와 저항이란 단어가 낯선 학교문화?






 이러한 한국 교육계의 관행은 부도덕한 지배 욕망을 가진 모든 권위에 맞서야 할 아이들에게서 저항정신을 말살시켜 버린다. 왜? 개기면 자기만 손해라는 믿음이 팽배해있기 때문이다. 학교 내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교장, 교사, 그리고 일진이나 부유한 학부모에 의해 자행되는 크고 작게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부당함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싹이 피어 날 공간은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에서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학교가 대량 생산하는 미래의 인간형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힘센 놈한테 저항해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일 뿐이라는 패배의식으로 가득 찬, 그래서 입 닥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장땡이야!'란 생각을 경험으로 체득한 인재 (?)들이다. 이게 세종이 가장 극혐 하는 학교 교육의 은밀한 교육 의도다. 오토만 제국은 고위직 관리를 임용할 때 권위에 대한 복종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그 관리들의 거기를 잘랐다고 한다. 권력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복종을 만들어 내는 훨씬 효과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식이 개발되었다고 잭슨은 주장한다. 거세를 하지 않는 매우 인도주의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의 복종 교육은 그냥 애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거세할 필요도 없다. 그냥 애들을 학교에 보내면 독재국가를 위해 입 닥치고 복종하는 참된 국민으로, 그리고 여러 갑질에 연대와 저항을 포기한 영혼이 된다. 그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떤 학교가 필요하고? 이 학교는 어떤 교육철학과 목표를 가져야 하는가? 란 질문으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의심하는 법과 갑질 대응 매뉴얼을 가르쳐라!


- 세종 -






20세기는 놀라운 변화의 시기였다. 정치와 지식세계의 지형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다. 혁명과 전쟁, 경제공황과 호황 등이 20세기를 묘사하는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시작하면서 과학의 영역은 매년 새로운 과학적인 이론과 지식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과학의 연이은 발견으로 인해 당시 서양 세계의 대표적인 권력 집단인 기독교의 권위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기존의 여러 생각과 가치에 대한 도전이 허용되고 장려되는 지적인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된 문화 속에서 전통적인 생각과 여러 제도에 대한 비평이 하나의 지적 트렌드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학교를 향한다. '학교는 원래 왜 생겨났나? '와 같은 공격적인 물음을 시민들은 가지게 된다. 교육에 대한 유럽의 여러 선구자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프리드리히 프뢰벨과 같은 학자들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교육에 관한 전통적인 신념에 대한 도전은 소수의 활동으로만 이루어졌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위에 언급된 20세기의 다양한 변화들이 만들어낸 문화적인 환경이 한 대학자가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했다. 존 듀이가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미시간 대학의 철학교수를 시작으로 말년에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듀이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했으며 동시에 교육과 민주주의의 관계에도 집중했다. 듀이도 세종처럼 교육과 민주주의의 밀접한 연관을 파악했다. 교육이 지랄이면 민주주의는 물 건너간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 즉, 필자의 호는 어쩌면 ㅋㅋ 사실 존 듀이가 원조다. 근데 듀이 말고도 옛날 학자들은 종합 지식인들이 많았다. 어쨌든 듀이 형의 지식과 철학이 필자인 세종도 모르는 사이에 세종의 유전자에 각인되었다. 듀이 형이 조성해 놓은 지적인 문화에서 세종도 숨 쉬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헬조선의 교육철학과 그 현장을 보면 세종은 극혐 하게 될 수밖에 없다. 듀위는 세종처럼 학문적인 활동에 있어 한 전공에만 자신의 관심을 고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학문의 경계를 초월해서 활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듀이 형은 어쩌면 세종처럼 학문의 경계는 당시 지식인들의 나아발이를 지키기 위한 영역 표시일 뿐이라는 사실을 눈치 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 형은 철학, 심리학, 정치학, 그리고 교육학의 이론을 섭렵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종처럼 듀이 형은 능숙하게 각 분야의 주요 개념들을 융합시키면서 교육학자로서의 자신의 탁월함을 인정받게 된다. 세종은 아직 인정받지 않았다. 슬프다. 언젠가는?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기약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잠깐 듀이 형에게 21세기 제대로 된 교육철학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이 형 얘기를 함 들어보자. 듀이는 아이들을 직관의 능력을 가진 작은 과학자로 생각한다. 듀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아이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날 때부터 순수한 유년기의 특징은 열정적인 호기심,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실험적인 연구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년기의 특성은 과학자의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듀이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특정한 종류의 수단과 방식으로 길러지기보다는, 오히려 시행착오를 통해 습득된 사고의 정교함을 통해서 길러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20세기 과학 철학자 칼 포퍼 (1902-1994)도 문제 해결력을 기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일단 여러 이론들을 세우고 최선을 다해서 그 이론을 반박하려고 노력해라. 일단 제일 처음에 생각했던 이론이나 설명을 단순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제시된 최초의 생각도 그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생각들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해라: 이런 지적인 의심의 공격에도 한 이론이나 아이디어가 살아남는다면, 이 이론이나 생각은 과학적인 설명이나 이론으로서 잠정적인 인정의 가치가 있다. 이러한 지적인 훈련이 우리 아이들의 판단력을 길러줄 수 있다. 판단력을 학생들에게 길러주는 일은 아이들에게 교사가 말하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가르치는 일 보다 훨씬 더 어렵다. 비록 단순한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단순한 지식의 주입은 교육을 파괴하는 행동이다. 이쯤 되면 한국의 교육 인적 자원부와 학교는 듀이와 포퍼 형이 던진 돌을 맞아 눈퉁이가 퍼렇게 멍들어버린다.









듀이와 포퍼 브라더스가 던진 돌에 코피 흘리는 교육인적자원부와 학교?






완전한 모방, 각 단계에 적합한 구체적인 지시와 기계적인 연습은 학습 성취도를 높이는 데에는 효율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교육 방식은 학습자의 ‘비판적인 사유, 혹은 깊이 사고하는 능력’에는 치명적이다. 이제 듀이와 포퍼 브라더스가 던진 돌에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와 학교는 코피까지 흘린다. 실제로, 교육은 호기심에 기반해서 스스로 탐험과 검증의 습관 등을 아이들에게 길러주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듀이는 신념과 비판적인 사고의 차이를 자신의 책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신념은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토대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의 과정이 거의 없이 사람들에 의해 그저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비판적인 사고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토대와 기초의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비판적인 사색이다. 이러한 비판적인 사고의 육성이 진정한 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이다.









비판적 사고란?






필자인 세종이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일 수 있는 이유는 필자의 지식의 폭과 깊이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자연, 응용, 사회 그리고 인문과학을 가리지 않고 밥만 먹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하는 세종의 지식은 상당한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을 세종으로 만드는 것은 앞에 듀이 형이 말한 비판적인 사고력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만 생각한다. 필자는 기독교를 엄마 뱃속부터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무슨 위쪽 동네에서 세뇌받듯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급기야는 신학교에 가는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시험에 들었다. 왜? 신학을 하면서 20여 년 넘게 신으로 믿었던 예수가 신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예수가 신이라는 나의 신념을 떠 받치고 있는 바닥을 파보기로 결심했다. 이 신념을 떠받치는 토대를 파헤치는 과정은 졸라 아팠다. 아프고 또 아팠다. 왜? 아마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세종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려는 시도는 아픈 정도가 아니라 매우 두려운 시도이며, 어찌 보면 이런 의심은 절대 해서는 안 될 금기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수란 인물은 세종에게 태어나서 20대 초반까지, 그리고 나를 떠 받치고 있는 그 기둥을 허물기 시작한 지 한 참 이후에도 내 인생의 모든 가치관을 만드는 기준 그 자체였다. 이 과정에서 결국 예수는 세종의 신 (God)에서 유대교의 한 종파의 개혁 운동가로, 그리고 결국 현재 (2016) 세종에게 예수는 1 세기 전후의 로마 제국의 법이 아닌 모세가 출애굽 당시의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전해준 하느님의 법의 지배를 다시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 회복시키려 했던 시민 운동가로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예수가 신이라는 나의 신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는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 전통의 정점에 서 있는 하느님의 사람일 뿐이다. 여전히 필자는 예수를 인류 역사에 등장한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세종이 예수에 관해 설명하면 비기독교인들은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보인다. 근데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정 반대다. 슬프다. 어쨌든 예수를 신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강등시키는 데에는 10년이 넘는 상상하기 힘든 고민과 아픔 그리고 예수 운동에 관한 세종의 연구가 있었다. 자기 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이 세종의 고민과 연구의 과정에 듀이 형이 말한 비판적인 사고가 요구되었다.









너의 가장 소중한 신념부터 의심해라! 그러면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 세종 -







10여 년 동안의 세종이 씨름한 생각의 과정은 내 신념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에 대한 철저한 의심을 요구했다. 바로 이러한 철저한 의심으로 자신의 신념과 이 신념을 생산하고 확산시키는 문화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연습 그리고 이러한 연습을 통한 날카로운 비판적인 사고력 즉, 판단력이 참 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세종은 졸라 큰 목소리로 외친다. 그러나 이 지칠 줄 모르는 드립 의지와 브런치라는 글의 포맷에 걸맞지 않은 이렇게 긴 세종의 글은 이런 졸라 큰 외침을 너무 작게 만들어버리는 느낌이다. 어쨌든 듀이 형에게 있어, 비판적인 사색은 교육의 핵심적인 가치였다. 왜냐하면 교육은 여러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사고 즉, 판단력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듀이의 교육철학에 있어 핵심적이다. 17세기의 존 로크처럼, 듀이는 비판적인 사고력 즉, 판단력을 아이들에게 길러 주어야 할 필요를 강조했다. 왜냐하면, 듀위는 판단력이 공정하면서 동시에 유연한 생각을 가져야 하는 민주적 시민에게 필수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공정하지 못한 의견이나 지도자를 의심하고, 독립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시민들에게 판단력은 필수적이라고 듀이는 세종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예수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판적인 사고력을 설명한 방법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깊이 있는 배려를 한 세종은 판단력을 다르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교육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려 한다. 예수운동에 대한 세종의 석사 논문은 시간 나는 대로 브런치에 올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일단 비판적인 사고력에 대한 이해에 집중해보자. 닐 포스트만 (Neil Postman)이나 찰스 바인가르트너 (Charles Weingartner)와 같은 저명한 교육학자들도 듀위의 교육철학을 계승한다. 포스트만과 바인가르트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헛소리 탐지기’라는 개념을 비판적인 인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채택했다. 날카로운 인식과 판단능력은 교육의 목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바인가르트너와 포스트만은 비판적인 인식과 판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식은 편견의 모음에 불과하다. 그것도
열여덟 살 먹은 십 대가 모은!

 -  아인슈타인 -






'인간의 역사를 평가하는 한 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역사는 ‘헛소리, 사기와 거짓 (crap)'을 존중하고 숭배하는 문화에 대한 지식인의 계속된 싸움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지성사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념의 일부가 오해, 잘못된 가정, 미신, 심지어는 완벽한 거짓말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했던 지식인들이 느꼈던 고통과 분노에 대한 기술이었다. 인간 지성사의 진화의 과정에 서있는 여러 이정표들은 몇몇 지식인이 새로운 관점, 새로운 의미, 새로운 비유를 창조했던 몇몇 시대를 표시해 준다. 우리 인간은 오해, 잘못된 가정, 미신, 그리고 완전한 사기와 같은 가치관이나 이념을 발견해서 동료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지식인들을 길러내는 것을 추구하는 새로운 교육을 지향한다.'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우리 사회의 제도와 법을 긍정적으로 봐??


- 루이 알튀세르 -





21세기 한국의 교육은 우리 아이들을 바인가르트너와 포스트만의 철학에 근거해 교육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여러 신념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여러 제도들에 대한 비판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다양한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지구 상에 어떤 나라와 어떤 사회도 완벽한 평등을 실현해 보지 못했다. 우린 한 번도 평등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런 불평등을 그 사회의 문화와 여러 제도가 말 그대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의 고통과 차별을 겪고 있는 다수의 시민은 두 눈 부릅뜨고 이러한 불평등의 문화와 제도를 노려보아야 한다.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이 거대한 성은 무너진다. 단, 노려보는 눈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 거대한 불평등의 벽은 더 빨리 무너지게 된다. 자 이제 다 같이 노려볼 시간이다. 세종은 우리 사회가 완벽히 평등한 사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줄 알았나? 아니다. 그런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완벽한 평등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세종은 강력하게 외친다. 지배라는 부도덕한 관행을 만드는 제도를 하나씩 하나씩 토대를 흔들어 무너뜨려야 한다. 세종의 잡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큰 이슈에 부딪힌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갑질 없는 세상 어떻게?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문제의 해결은 의외로 아주 작은 방법으로 시작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종은 제안한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와 같은 지배의 문화와 제도들을 허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한국 교육의 교과과정에 갑질 매뉴얼을 가르치는 '힘센 놈 길들이기'라는 과목을 학교의 정규 교과 과목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을 졸업하는 16년간의 필수 교과과정에 이 '힘센 놈 길들이기'란 갑질 매뉴얼을 교육하면 우리 아이들은 자신들이 사회에 나가서 직면할 모든 종류의 갑질에, 적어도 전형적인 유형의 갑질에 대응할 수 있는 나름의 방식을 체득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려서부터 강자 예를 들면, 담임선생, 학교 교장, 돈 많은 학부모나 힘센 일진에 대응하는 방식을 학습하고, 힘없는 아이들끼리 연대해서 강자에게서 사과를 받아내는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더 나아가 이런 저항과 연대 능력이 탁월한 아이들을 서울대에 보내 주면 우리 사회는 갑질 프리 한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것이다. 물론 세종은 서울대 같은 특권층을 양산하는 대학은 극혐이다. 그냥 대접해주고 보상해주자는 의미다. 때론 담임 선생님이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교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학생들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 이럴 때 담임과 교장에게 정식으로 항의하고 이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결정을 아이들이 힘을 합쳐 되돌리는 경험을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갖게 해 준다면, 대학 이후에 우리 아이들은 우리 사회를 또 한 번 갑질 프리 한 사회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은 우리처럼 무력하게 갑질에 당하지 않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갑질 하는 놈들이 이 땅에 아예 발을 못 붙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은 권력으로 갑질 하던 넘들에게는 헬조선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식과 후손들에게 매 순간 개정되는 갑질 대응 매뉴얼을 교육한다면 타락한 강자들을 위한 이런 헬조선을 앞으로도 쭉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에게도 민방위 훈련하듯이 갑질 대응 매뉴얼을 계속해서 학습시키면 이들은 민주적인 국가에 걸맞은 시민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강력하게 우긴다.









갑질 대응 매뉴얼을 초, 중, 고, 대학
필수과목으로!
민방위 훈련도 갑질 대응 매뉴얼로! ㅋㅋ

- 세종 -







언젠가 누가 이 세종의 청아한 외침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의 작은 목소리가 나비의 날개 짓이 되어 거대한 폭풍과 같은 힘으로 변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정화시킬 거라고 세종이 믿을 거 같나? 믿는다. 그래서 듣던 말던 이렇게 계속 팔자려니 하고 세종은 떠든다. 단 한 명을 놓고도 떠든다. 언젠가 세종이 만들어낸 작은 물결이 다른 작은 파도들과 만나 거대한 변혁의 파도를 이끌어낼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갑질 매뉴얼로 길러진 아이들은 민주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서비스나 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서도 탁월함을 드러낼 거라고 세종은 강력하게 우긴다. 왜냐하면 이런 비판적인 시선을 갖춘 아이들은 다른 다수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문제 제기하지 않는 사회나 문화의 관행과 상식 그리고 제도적인 허점이나 정의롭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허점이나 개선 방식을 찾아내는 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일 거라고 세종은 확신하기 때문이다. 듀이 형이 설계한 교육 철학으로 자라난 세대가 미국의 테크 귀족들을 만들어 냈다. 구글, 페이스북, 오토 데스크, 애플, 링크드 인, 그리고 실리콘 밸리의 수많은 창업회사들은 다 듀이 형의 새끼들이다. 듀이 형이 세운 교육철학의 수혜자들이라고 세종은 믿는다.









구글과 페이스북과 같은 혁신을 만든
비판적 사고력






이렇게 대단히 잡스러운 학문적인 글에서 필자의 개인적인 믿음과 경험을 얘기하는 건 이 글의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거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객관성은 학자들이나 강아지 같은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강아지가 크면 머가 될까? 어쨌든 일반 시민이 한 말은 무식한 주관적인 주장이고 학자들 혹은 지식인들 자신이 한 말은 객관적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에 스스로 힘을 실어주려는 강아지 같은 수작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객관이란 구조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팩트 (fact) 시끄럽다. 해석되지 않은 팩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날것의, 가공되지 않은 팩트도 여러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되는 게 팩트다. 그니까 객관이란 힘센 놈이 자기 관점이 객관적이고 너네 주장은 주관적이라고 윽박지르는 수단에 불과하다.








거짓을 객관적이라고 사기 치는 지식인과 언론






그니까 어떤 언론사가 객관이니 하면서 떠들거든 얼른 그 티브이를 빠개고 세종의 글을 읽기를 강추한다. 세종은 힘센 놈들한테 돈을 안 받는다. 좀 솔직히 말하면 게네들이 세종한테는 돈을 안 준다. 유감이다! 근데 티브이에 나와서 떠드는 시끼들 다 돈 받고 나오거나 그 시끼들이 운영하는 연구소는 다 힘센 놈들의 돈으로 운영된다. 최근에 뉴욕타임스가 세계 최고의 싱크 탱크들 다 기업의 기부금 받아서 운영되고 이 때문에 자신들의 연구보고서로 자신의 연구소 후원 기업들이 개이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연구보고서를 쓴다고 폭로했다. 이 구라로 가득 찬 연구보고서를 읽고 정부 관료들을 은 정책을 수립한다. 심지어는 이 정부 관료와 후원기업 이사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다리를 이 싱크탱크들의 연구원들이 놔준다고 한다. 이 시끼들 연구원이라고 깝죽거리지 말고 직업을 토목공학 쪽으로 바꿔야 할 듯하다. 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만나게 다리 놓는 기술이 정말 쩔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행이 단지 미국에서만 이루어질까? 티브이를 껴서 정치, 경제, 시사 프로그램들을 보면 단박 알아챌 수 있다. 헬조선도 이런 관행에 있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티브이에 출현하는 그놈의 전문가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저 시끼 돈 먹었단 사실을  세종은 바로 눈치 깔 수 있다. 지금까지 세종의 드립이 난무한 사족이었음을 고백한다. 이게 세종의 글이 갖는 매력이라고 강력하게 우긴다. 어쨌든 세종이 강력하게 지지하는 듀이 형의 교육철학은 민주적인 시민과 21세기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갈 혁신적인 기업가들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세종은 확신하면서 졸라 큰 목소리로 외친다. 듣건 말건 언젠가는 세종의 작은 목소리가 만든 물결이 거대한 파도를 타고 내 청아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를 바라 본다.   










질문과 저항이 부재한 사회는 이 글의 서론에서 제기된 주제이다. 모든 학문적인 발견과 결과들은 의심과 질문의 산물이다. 빛, 공간, 그리고 시간의 본성과 성분에 대한 호기심과 이에 따른 질문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자신의 몸의 존재까지 의심한 데카르트의 회의 (doubt)는 근대 철학의 토대 형성으로, 멸종된 화석에 대한 관심과 각기 다른 새의 부리에 대한 호기심이 다윈의 진화론으로, 군용 컴퓨터의 연결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이 인터넷 기반의 네트워크 혁명으로 이어져 왔음을 우리는 목격해 왔다.








의심과 저항이 결핍된 인간은 좀비다!


- 세종 -






또 한편으론, 왕과 귀족이 가진 권력에 대한 도전은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시민권 투쟁의 성취로, 남성의 권위에 대한 여성의 저항은 양성 평등에 대한 인식의 확산으로, 소수의 부의 독점에 대한 시민의 저항과 연대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복지 국가의 형태로, 이성애가 지배적인 사회에 대한 성 소수자의 도전은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와 주에서의 동성결혼 합법화 등으로 이어져 왔음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글의 도입에서 제기된 질문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학교는 학생들의 호기심과 잠재력을 파괴했고, 동시에 권위에 혹은 다양한 갑 질에 학생 다수로 하여금 순응하게 만들었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학교는 모든 종류의 권위와 불의에 저항을 포기한, 거세된 다수의 시민 집단을 형성하는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호기심과 질문의 가능성을 질식시켜버리는 시험과 입시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와 판단, 동시에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갑들의 횡포에 대한 저항과 연대를 장려하는 교육으로의 방향 선회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중국의 추격에 의한 세계 시장에서의 한국 경제의 도태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우리는 대비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의 모든 종류의 횡포와 불의에 반응하는 시민들의 태도가 고작 체념과 순응, 혹은 험담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저항정신이 거세된 내시들로 가득 찬 진정한 헬 조선에서 한탄하는 우리 자신을 목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종의 위에 언급된 지적이고 통쾌한 그리고 잡스럽기까지 한 목소리가 널리 퍼져야 한다. 많이 읽어 주시고 공유해 주시기를 바란다. 근데 너무 길다! 어쨌든 다음 세종의 통찰은 어느 학문 영역에서 드러날까? 다음 주제를 기대해 주시길 바란다.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 편 최종회 끝!














     

Bibliography


ERIC LIPTON, NICHOLAS CONFESSORE and BROOKE WILLIAMS, 'Think Tank Scholar or Corporate Consultant? It Depends on the Day' The New York Times  [website], (updated 18 Aug. 2016) <http://www.nytimes.com/2016/08/08/us/politics/think-tanks-research-and-corporate-lobbying.html?action=click&contentCollection=Politics&module=RelatedCoverage®ion=EndOfArticle&pgtype=article&_r=0>, accesed 18 Aug. 2016.


Thomas, G. (2013), ‘Educ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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