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문화의 소리 없는 지배
21세기에 이념은 무슨 얼어 죽을??!!
20세기 중엽의 유럽의 전체주의적인 정권의 붕괴와, 같은 세기말에 일어난 공산주의의 붕괴는 이념의 종말을 선언한 것처럼 보였지만,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는 거시적인 이념 중의 일부를 가리킬 뿐이다. 이념은 거시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전체주의 정도를 가리키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념은 다양한 신념이나, 견해 등으로 정의된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다양한 측면과 분야에 대한 문제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소개되면, 시민들은 다양한 우리 사회의 이슈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이나 입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입장이나 견해를 떠받치고 있거나 이러한 생각을 갖게 만든 생각 그게 바로 이념이다. 좀 쉽게 설명해 보면 이념은 다양한 생각, 가치, 그리고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인 신념체계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개인의 태도와, 견해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거나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념은 매우 정치적이기 때문에, 이념은 특정한 계층, 예를 들면 소수의 지배 계층의 현재의 지위와 이익을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념은 각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법적인 제도들이 잘 작동해서 지배계층의 지위와 이익이 지켜지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니까 지배 계층에게 이념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이념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 돼지들의 행동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놀라운 수단이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이념의 구조물 속에서만 다수 시민은 생각하고 그 생각에 따라 특정한 견해를 갖고 그 견해와 생각에 따라 행동을 한다. 행동은 태도에서, 태도는 구체적인 특정한 생각에서 나온다. 그니까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이념에 의해 조종된다. 근데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어떤 유력한 정치인들이 보이면 이 정치인을 둘 중에 한 부류로 판단해도 안전할 듯하다. 정치에 정자도 모르는 아무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매우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려는 정치인으로 보면 된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를 누구처럼 뇌가 없는 사나운 거대한 짐승으로 보는 부류의 정치인이라고 보면 된다. 이 거대한 뇌가 없는 짐승을 예측 가능하게 길들이고 동시에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무기가 이념이다. 그래서 이 시끼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숨기기 위해 이제 그런 이념은 사라졌다고 뇌가 없다고 생각되는 우리에게 구라 치는 거다. 인간의 어떤 말과 행동도 이념의 조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이념을 먹고 때로는 이념에 이용되고, 이념을 만들어 내고, 동시에 이념을 확산시키며 산다. 이념이 없는 인간의 삶이 순수한 그 자체의 자유일 텐데 현실에서는 이념의 미로에서 인간이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멋있어 보이는 말로 탈이념이라고 하지만 한 이념에서 벗어나는 순간 또 다른 이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세종이 글이 이념의 강력한 힘과 불멸성을 강조하면서 좀 글이 어려워진 거 같다. 좀 쉽게 가면 거시적인 이념에 따라 모든 정치, 경제, 문화적인 모든 법률과 정책들이 결정된다. 경제 정책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현재 대한민국 경제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거시 이념 중에 하나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 경제 이념은 규제완화 (deregulation), 자유화 (liberalization; 자유시장, 자유무역), 그리고 민영화 (privatization)로 특징지어진다. 물론 소위 작은 정부도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특징 중에 하나다. 생각공장의 시선의 '자유의 두 얼굴' 편을 참조하시면 이 경제이념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다수 시민에게 지랄하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파악하실 수 있을 듯하다. 대기업의 골목 상권 약탈, 교육의 시장주의 정책으로 인한 자사고와 특목고의 서울대 독식 장려정책, 노동시장의 유연화 (경제적 살인의 또 다른 표현), 국민 세금으로 만든 기업을 민간인 재벌에게 넘기는 상납 프로젝트, 그리고 계층의 피라미드 각 층위에서 일어나는 갑질의 난동 등이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들어낸 대표 지랄들에 속한다. 세종이 틈나는 대로 신자유주의라는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한 경제 이념에 대한 글을 곧 올리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약속은 잘 못 지킬 수도 있다. 먹고살기 바빠서 영문법 가르치느냐고 등골이 휜다. 어쨌든 최대한 신속하게 올리겠다고 약속은 해 본다. 기대하셔도 좋다.
칼 마르크스에게 이념이란??
칼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념은 역사적으로 소유 형태와 관련해서 계속 존재해왔으며, 이러한 이념은 각 시대의 지배계급의 이익과 지위를 유지시키기 위해 작동해왔다고 주장한다. 봉건주의에서는 충성과 명예라는 이념이, 뒤이어 자본주의에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작동해 왔다고 마르크스는 분석한다. 국가나 귀족이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부터의 개인인 자본가들의 자유 그리고 다수 시민이 가지는 참정권의 획득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자본가들의 이익을 확대해 주었다. 왜냐하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란 이념에 대한 강조는 오래된, 그리고 점점 기울고 있는 과거의 권력인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지위나 이익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기 위해서, 다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제도인 자본주의는 필연적이며,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시켜야 했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루이 알튀세르의 이념
이러한 자본가들의 설득의 노력과 함께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핵심적인 제도가 사유재산권의 보장인데 이러한 사유재산권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지를 후기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는 분석한다. 알튀세르는 사법제도가 사유재산권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시키는 핵심 권리)을 보장해주는 핵심적인 제도이고, 이 사법제도는 경찰과 감옥이라는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는 사법제도와 사법제도의 결정을 집행하는 경찰과 감옥 제도를 억압적인 국가 기구 (Repressive State Apparatus)라고 부른다. 잠깐 사유재산권은 세종이 곧 인공지능과 기본소득이란 집필 예정인 글에서 다루겠다고 약속 또 해본다. 이번 약속은 3-4주 안에 반드시 지켜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왜? 생각공장 강의 스케줄에 속하는 글이다. 어쨌든 이러한 억압적인 국가 기구들이 자본주의 시대의 생산의 관계 즉, 자본가들과 노동자 간의 현재의 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관계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월급을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노동자인 시민이 착취되면서, 이에 대항해서 불복종과 혁명을 꾀하면, 억압적인 국가 기구라고 불리는 사법제도와 경찰력이 동원되면서 현재의 생산의 관계, 이로 인해 발생하는 현재의 권력관계를 유지시킨다고 알튀세르는 분석한다. 2016년 대한민국의 산업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업, 이에 뒤따르는 경찰력의 파업 현장 투입, 그리고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보다 사용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한 인정을 더 우선시하는 최근의 대법원의 판결을 보면, 알튀세르의 이러한 분석은 예리하다. 참 뇌가 섹시한 루이 형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경제 공동체의 권력의 핵심부 중에 하나인 사법부의 권위에 대한 시민 상당수의 신뢰와 존중, 시민 (주로 자본가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경찰과 감옥 제도에 대한 시민 구성원 상당수의 인정은 우리 사회에서 현재의 권력관계 (status quo)를 유지시키기 위해, 즉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의 지위와 권력 (사유재산권 보호)을 유지시키기 위해 지배 이념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완벽하게 소리 없이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빨갱이가 종북이란 이름으로 바뀐 것처럼 이념은 문화로 성형을??!!
문화란 용어 자체가 매우 정의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타일러 (Edward Tylor)의 문화의 정의가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 타일러에 따르면, 문화란 한 사회의 지식, 신념, 예술, 법, 도덕, 관습, 그리고 한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획득된 여러 습관이나 능력과 같은 것이라고 정의된다. 스탠퍼드 (Stanford University) 대학의 철학 백과사전에서, 폭넓게 인정받는 문화에 대한 정의는 한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외형적인, 그리고 내면적인 것들이라고 한다.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와 의미들을 담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인 실천과 행동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위에서 타일러에 의해서 정의된 지식, 신념, 예술, 관습, 그리고 법과 같은 것들이 우리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와 의미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러한 우리 사회의 가치와 의미들이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들을 하게 만들 수도, 또는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니엘 벨 (Daniel Bell)의 이념에 대한 정의는 이 단락의 제목으로 언급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해 보인다. 벨에 따르면, 이념은 ‘행동 지향적인’ 신념의 체계라고 정의되는데, 이러한 정의에서, 이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기보다는,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특정한 여러 행동들을 하게 만들거나,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정의된다. 결국 이념과 문화는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이념과 문화 둘 다 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혹은 하지 않도록 영향을 준다는 면에서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쟁이라는 이념과 한국의 오디션 문화는 어떻게 기업가들에게 개이득인가??
이 단락에서는 ‘경쟁’이라는 이념이 어떻게 지배 계급의 지위와 이익을 유지시켜주고, 심지어는 더 확대시켜주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식을 줄 모르고 최근 몇 해 동안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문화적 현상과 경쟁이라는 지배 이념과의 관계에 대한 세종의 분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우선, 21세기 대한민국의 노동 시장의 상황을 살짝 만 들여다봐도, 경쟁이 어떻게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의 이익을 유지시키고 확대시키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취업준비생들의 기본 스펙을 보면, 토익, 학점, 여러 자격증, 해외 언어 연수 및 각종 봉사 경력, 관련 분야의 인턴쉽 경력, 그리고 창의적인 자기소개서 등 셀 수 없이 많은 스펙이 구직자 한 명에게 요구된다. 위에 열거된 여러 스펙 즉, 다양한 노동력을 기업이 과거에 구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직원을 비싼 인건비를 지불하고 뽑아야 했다. 경쟁은 사장들에게는 여러 가지 종류의 노동력 (다양한 스펙)을 아주 저렴한 값에 구입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자리 창출이라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청년과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어떻게든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한 치열한 경쟁만이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청년들이 경쟁이라는 사고의 프레임 (이념)에 갇히면서, 연대해서 정부와 기업에게 당당하게 자신들을 위한 일자리 수의 확대를 요구해야 할 청년들이 입 닥치고 경쟁에만 몰두하는 현상이 2016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자본의 영향에서 구조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방송사에서 제작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 등이 시청자들의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을 받고 있다. 문제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경쟁을 일상화시키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참가자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청자 모두 결국은 경쟁의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한 형태의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경쟁의 강도는 일반 시민이나 학생이 일상에서 느끼는 경쟁의 강도보다 더 강력하고 단기적이다. 이 격렬한 경쟁의 과정에서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감정 이입하게 되면서 공감한다. 이 감정이입의 과정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경쟁의 불가피성, 경쟁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더 강화된 믿음, 그리고 자기 계발에 대한 동기 등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내면화된다. 경쟁이라는 가치, 이념, 혹은 문화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여러 제도와 이 제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에 완벽히 스며들어 가게 된다. 기분 나쁘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여자에게 눈물과 웃음 그리고 분노로 공감하는 순간 우린 속은 거다. 시민 다수의 경쟁 대상은 영업이익을 독차지하는 기업가들이다. 같은 시민들 사이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하다. 경쟁의 장점도 있다. 효율성이다. 산업이나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경쟁이란 이념은 효율성으로 우리에게 보답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가 아니다. 우리에겐 효율성은 우리 심장을 향하는 화살로 되돌아올 수 있다. 왜냐하면 효율성이라는 경쟁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시민들 다수에게 정리해고와 같은 매우 잔인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효율성은 제한된 자원을 사용해서 최대의 이윤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 있기 때문에, 경제활동에서 효율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경쟁이라는 문화 (이념)는 문화 구성원 모두를 지치게 만들고, 수많은 동료 시민을 낙오된 채로 내버려 두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상당히 많다는 데에 있다. 결과적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비인간적으로, 동시에 이미 지쳐 있는 노동력을 더욱더 지치게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세종은 열나 짜증이다. 왜? 필자인 세종도 그 경쟁의 문화에서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점은 이 인간성 말살 프로젝트에 시청자들은 저항은커녕, 저항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는 사실이다. 오디션 프로그램과 경쟁이라는 지배 이념과의 관계에 대한 세종의 분석에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을 것으로 예상된다: 티비쇼 하나를 너무 심하게 해석하네! 문제는 시민들이 경쟁이라는 이념에 저항하지 않는 무기력감 혹은 무감각은 경쟁이라는 그 이념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에 있다. 경쟁의 문화 (이념)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절대다수의 시민들의 신념과 가치, 견해를 지배한다. 경쟁은 피할 수 없다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 지배 이념은 시민들의 행동을 조종한다. 그래서 늘 피곤하고 불안하다. 경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명 감옥에서 현대인들이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지쳐 널브러져 있다.
미셸 푸코의 두 개의 감옥
이 단락에서는 앞 서 살펴본 이념 (문화)과 미셸 푸코의 두 개의 감옥과의 관계에 대해서 분석해보려고 한다. 푸코의 자신의 책 감시와 처벌 (1975)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이야기는 1757년 1월 5일에, 42세이며 전직 프랑스 군대 병사였던 로버트 다미엔이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에게 칼을 들고 다가가서, 가벼운 상처를 입혔던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다미엔은 국왕 살해 죄로 유죄 선고를 받는다. 사형이 선고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다미엔의 팔다리가 잔인하게 찢기는 잔인한 형벌의 모습을 묘사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다미엔의 잔인한 처벌이 일어 난지 80여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이야기는 파리의 젊은 죄수들이 수감된 감옥의 규칙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죄수들의 하루는 겨울에는 아침 6시에 시작하고, 여름에는 아침 5시에 시작해서, 하루에 9시간 동안 일 년 내내 노동한다. 하루에 2 시간이 교육을 위해 할애된다. 죄수들의 일과는 겨울에는 9시에 끝나고 여름에는 8시에 죄수의 모든 일과가 끝이 난다는 설명이다. 푸코가 이 두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는 처벌의 방식이 개선되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푸코에게 있어서, 위와 같은 잔인한 처벌 방식에서 순화된 방식의 처벌로의 진보는 단지 처벌을 약하게 한 것이 아니라, 처벌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범죄자의 몸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감옥에서의 감금의 형태로 진화된 부분에 대해 푸코가 부정하지는 않는다. 푸코에게 이런 식으로 개선된 처벌 방식은 신체적인 형벌에서 범죄자의 심리적인 통제를 통해서 범죄자의 행동을 바꾸는 방식으로의 변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푸코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더욱더 눈에 띄는, 혹은 충격적인 푸코의 분석은 감옥의 이러한 순화된 처벌의 방식이 감옥을 넘어 현대 사회의 여러 제도의 설계를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다.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범죄자의 처벌과 징계 방식이 학교, 병원, 그리고 공장과 같은 제도들에 적용되면서 현대 사회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앞서 언급된 죄수들의 감옥의 생활 규칙을 주의 깊게 천천히 살펴보면, 현대인들의 감옥 밖에서의 생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나, 회사, 병원의 일과 계획표를 살펴보면, 죄수들의 생활공간인 감옥의 규칙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감옥 안과 밖에 사는 사람들이 똑같이 시간표대로 즉, 각각의 제도와 기관이 정해준 스케줄대로 생활하고 있는 좀 불편한 모습이 너무나 뚜렷이 보인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루어지는 심리적인 조종을 통한 행동의 교정 방식이 군대의 신병 훈련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현대의 군인 훈련은 단지 총을 쏘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는, 각각의 단계에 따라 교관이 원하는 절차와 자세에 따라 총을 쏘는 법을 신병에게 가르친다. 사람을 죽이는 기술보다는 신병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말 잘 듣는 군인’ 즉, 단지 총을 잘 쏘는 군인이 아니라, 교관이 가르쳐준 방식과 절차에 따라 총을 발사하는 고분고분한 군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과 목적, 공장에서 제품이 생산되는 공정을 위해서 훈련되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을 생각해보면, 푸코의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 있어 보인다. 물론,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 특히 정신병원에서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와 치료 방식을 고려하면, 감옥의 징계 방식이 감옥의 담을 넘어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제도들에 스며있다고 하는 푸코의 주장은 과도한 주장으로 치부하기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푸코에게 현대사회는 감옥의 징계 방식에 의해 설계된 거대한 감옥이었다.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이 감옥은 수많은 규범과 관습 등의 규칙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거대한 도덕적 감옥’이다. 거대한 도덕적 감옥??
푸코는 자신의 책, 광기의 역사 (A History of Insanity in the Age of Reason; 1964)에서 정신과 치료의 야만적 측면, 예를 들면, 정신 질환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멀쩡한 치아를 모조리 뽑아버리거나, 내장이나 뇌의 일부를 절단해내는 것과 같은 야만적이고 무지한 정신과 치료로부터, 영국의 퀘이커 교도인 새뮤얼 튜케가 시작한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정신질환 치료로의 전환 혹은 진보를 소개한다. 새뮤얼 튜케의 인도주의적인 정신과 치료를 푸코는 다르게 해석한다. 새뮤얼 튜케의 도덕적 치료 방식은 정신병자들을 쇠사슬과 같은 신체적인 학대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정신병원을 도덕적 규칙이 지배하는 즉, 숨 막힐 정도의 책임감으로 엮어진 또 다른 쇠사슬로 광기 (madness)를 결박시켰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푸코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튜케의 정신병원에서의 열렸던 한 파티 (a tea party) 장면을 묘사해 준다. 이 파티의 주인은 정신병원의 의사, 간호사와 보호사들이다. 그리고 정신질환자들이 이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이다. 이 손님들인 정신질환자들은 파티 동안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 경쟁은 누가 더 예의 바르고 이성적으로 행동을 많이 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푸코는 이 파티를 설명하면서, 안쓰러울 정도로 아무 일 없이 이 파티는 마무리되었다고 묘사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의 원칙이 이제 정신병원까지 지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푸코도 인격 장애의 한 종류인 사이코 패스와 같은 공격적이고 범죄성향을 보이는 환자들에 대한 치료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푸코는 이 파티에서 광인들은 인도주의적인 치료의 대상으로서 적절한 치료를 받기보다는, 도덕적인 규범에 의해 비난받고, 동시에 판단되며, 이러한 판단에 따라 처벌받는 또 다른 형태의 사법체계 안에 갇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정신병자는 자신들을 묶는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대신에 ‘도덕적 세계라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고 푸코는 결론 내린다. 푸코가 묘사한 튜케의 티 파티에서의 광인에 대한 도덕적 치료의 방식이 병원 담장 밖의 우리 세계에서도 수많은 규범과 도덕, 그리고 법치의 형태로 작동되고 있다는 세종의 추론은 오버인가? 티 파티에 참석하면서, 정신과 의사가 지시해 준 프레임 즉, 도덕적인 그리고 이성적인 행동 방식이라는 틀에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애처롭게 애쓰고 있는 여러 광인의 모습에서 필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안쓰럽다.
인간은 어떻게 이념 (경쟁과 도덕적 감옥) 담장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 그리고 이에 따른 자유로운 행동은 앞서 설명한 문화 (이념)와 푸코가 말한 거대한 도덕적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멀어 손에 잡히지 않는 꿈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는 도덕과 관습, 문화, 경쟁이라는 지배적인 이념의 벽돌로 지어진 거대한 투명 감옥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담장 밖은 어떤 곳일까를 꿈꾸는 일도 필요하지만 우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동시에 견고하게 서 있으면서, 현대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종하는 벽들을 인식하고 주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규범, 가치, 이념, 문화에 대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판단이나 행동부터 교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로처럼 얽혀 있으면서 인간을 끊임없이 구속하고 지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투명 벽을 허물어 트려야 한다. 한 구체적인 예로, 경쟁이라는 이념을 너무 당연하거나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 같은 편끼리 경쟁하기보다는 연대라는 대안적 이념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거대한 감옥의 벽에 균열을 내는 괜찮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념과 문화의 감옥 속에 갇혀 있는 필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에게 캐서린 벨지의 말은 의미 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평소에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신념들은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지적인 통찰과는 너무나 정반대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인 제안과 같은 학문적인 연구 결과들을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거부하고, 결국에는 대중의 게으름이 학자들의 철저하고 객관적인 연구와 동등하게 중시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Burns, T. (2006), ‘Psychiat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Gutting, G. (2005), ‘Foucault’,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