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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Sep 06. 2016

생각공장의 시선 - 대중문화는 지배이념이다!

대중문화는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자본의 문화다!!




이념의 벽돌로 생각의 감옥을 짓는 대중문화       


2016년 대중문화라면서 거대한 뇌가 없고 사납기만한 짐승인 우리에게 던져주는 드라마, 영화, 스포츠, 게임 등을 우리는 즐기고, 집착하며, 심지어 사랑하기까지 한다. 아니 중독에 가깝다. 왜? 대중문화니까! 근데 이런 것들이 대중문화란 주장은 개구라다. 우리 대중은 이런 문화를 만드는 데 한 푼도 내지 않았고, 심지어는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도 없다. 하등 관계가 없다. 우리는 그저 이 문화의 주체가 아닌 관람객일 뿐이다. 근데 왜 대중문화라고 할까? 자본이 대중을 사기치려고!! 이러한 화려한 오락 속에 은밀한 의도와 목소리가 숨어 있고 이러한 은밀한 의도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이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념이 머냐?'고 세종에게 물으신다면 이렇게 졸라 쉽게 답해 본다: 여러분의 한 생각이나 의견을 떠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생각 즉, 한 생각을 그 밑에서 떠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생각, 그리고 여러 층위의 수많은 생각과 그 생각의 네트워크 구조물 전체를 이념이라고 한다. 그 이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구조물의 표층에 존재하는 생각을 그 생각의 한층 혹은 두 층 밑에 숨어서 그 표층의 생각을 지배하고, 결국 그 표층의 생각이 여러분의 행동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표층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거대한 생각의 구조물이 이념이고 이 거대한 구조물을 연결하는 작은 수많은 단편적인 생각들도 이념이다. 이 수많은 생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생각의 구조물이 이념이다. 쉽게 설명한다고 해 놓고 다시 읽어보니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대중문화가 이 거대하고 복잡한 이념의 구조물을 채울 수많은 작은 생각, 때로는 큰 생각을 생산해서 우리의 정신이 거주하는 이 생각의 구조물을 채운다. 생각의 벽돌로 우리 사고의 자유를 구속할 생각의 집을 만든다. 세종에게 이 집은 깨트려야 할 감옥에 불과하다. 인간은 태어나면 이 생각의 거대 구조물 속에서만 학습하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생각들은 언어로 표현되고 동시에 이러한 언어의 범위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 안에서만 우리는 사고한다. 심지어는 이 거대한 생각의 구조물을 더욱 더 정교하고 조밀하게 생각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전체 구조물의 크기를 인간 스스로 확대한다. 어떻게? 간단하다. 학교 열심히 다니고 미디어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학교와 미디어에서 뿌리는 생각을 착실히 외워서 우리의 자유로운 영혼과 사고가 그 생각의 구조물의 벽을 넘을 수 없도록 그 생각의 벽돌로 담을 높게 쌓으면 된다. 문제는 이 거대한 생각의 구조물인 이념이 우리 인간을 비밀리에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이며 올가미라는 사실이다. 이 생각들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간다. 더 지랄은 생각의 자유까지 빼앗아 간다. 경계해야 할 사실은 철지난 못된 생각을 확산시키는 학교가 일단 이 못된 생각들의 생산공장이다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편 참조). 그리고 학교 외에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이 거대한 생각의 구조물을 더 복잡하고 크게 만들어 버린다. 조만간 세종이 언론에 대해서도 언론학에 근거해서 조져보겠다. 기대해주시길 바란다. 어쨌든 대중은 이 생각의 구조물에 갇혀 사고한다. 하지만 다수는 이 구조물에 자신들의 생각이 조종된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 생각의 구조물 즉, 이념의 감옥의 존재자체를 모른다. 이 거대한 이념과 생각의 구조물이 인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해도, 그래서 우리의 행동과 생각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이 구조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헐떡이다 숨을 거둔다. 이 구조물을 유지시키고 확산시키는 주범 중에 하나가 대중문화다. 세종의 날카로운 비평과 통찰로 대중문화의 은밀하고 비열한 모습을 폭로하고 이 거대하고 복잡한 생각의 미로에서 인간이 자유로와 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려고 한다. 일단 대중문화부터 조져본다!




모든 돈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세종은 일단 대중 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극혐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대중문화라고 이름 붙여진 가짜 대중문화를 극혐한다. 대중 문화를 정의하는데에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세종 본인의 판단으론, 어떤 예술과 문화의 형태에 '대중'이란 단어를 붙일려면 대중인 우리 스스로가 제작에 참여한 문화나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대중들이 어떤 예술이나 문화를 즐긴다는 사실만으로 거기에다 대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행동을 세종은 극혐한다. 왜? 대중이 만들지도 않았고, 그리고 대중의 목소리도 담기지 않은 문화가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타락시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대중의 목소리를 담는 것은 고사하고 이 대중문화 (영화, 드라마, 게임, 스포츠 등등)를 후원한 기업의 목소리가 이 소위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것들에 소리 없이 담겨 있다고 세종 뿐 만 아니라 많은 문학 이론가들이 심하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돈 내는 사람의 의도와 목소리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이런 대중문화를 만드는 주체인 후원 기업들이 우리 대중에게 원하는 것이 멀까? 매우 보수적인 생각들을 우리가 갖기를 원할 것이다. 사실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아도 된다. 상식적인 생각들이어도 상관없다. 돈이다. 화려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돈이다. 소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선이다. 소비를 통한 화려한 삶이다. 드라마 캐릭터들이 무심하게 누리고 있는 그 화려한 삶의 스타일을 대중은 갈망하게 된다. 이런 드라마는 시청자를 소비를 욕망하는 주체로 제조한다. 드라마는 대중을 다루기 쉬운 한 종류의 인간형으로 획일화시킨다. 소비자다! 드라마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인생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욕망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하지만 은밀하게 감성을 자극해 학습시킨다. 그래서 이러한 화려한 삶을 누리기 위해선 입닥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하고 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야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이쁜 여자를 자기 여자로 만들 수 있고, 여자들은 착하고 이뻐야만 멋진 돈 많은 남자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이건 개구라 판타지다. 그리고 이런 판타지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뒤에서는 기업가들과 그 뒤를 봐주는 정치인들이 정말 중요하고 돈이 되는 일들을 우리 모르게 다 결정해 버린다. 마치 필자가 세살 짜리 아들이 떼를 쓰거나 말을 안 들을 때 뽀로로를 틀어서 우리 아들을 컨트롤 하는 것처럼, 기업가들은 우리에게 지들이 만들어 놓은 드라마, 영화, 스포츠, 게임 등을 던져주며 이게 대중문화 니네들이 즐겨야 할 것들이야! 이거나 보고 우리가 니네들에게 갑질해서 생긴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를 함 달래보렴! 우린 내일도 니네들에게 갑질할 거니까 이거로 오늘은 일단 달래! 마취제나 진통제로 사용해! 약발 쩔어! 우리는 몰래 니네들이 낸 세금을 홀라당 뺏어 먹고 니네가 낸 세금으로 만든 기업을 헐값에 사서 천문학적인 이익을 남길테니까 니네들은 우리가 만든 저질 판타지 대중문화나 즐기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대중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며 걍 웃고, 울고, 화내고 그러다 잠든다. 남자들은 게임이나 스포츠에 열내고 흥분하다가 지쳐 잠든다. 그리고 헬조선의 하루는 또 시작된다. 내일도 그리고 낼 모레도! 정작 중요하고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주요 이슈에 관심가질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중요한 문제에 생각할 여유가 없게 이 시끼들이 우리 손에 우리한테 스마트 (?)하라고 스마트한 폰을 쥐어 줬다. 그래서 우린 우리 스스로 젠장 정말 스마트하다고 착각하며 산다. 이 시끼들은 우리들에게 필자가 36개월도 안된 아들을 뽀로로로 조종하듯 우리를 컨트롤한다. 이래서 세종은 대중문화를 극혐한다. 그걸 가지고 사기치는 놈들은 더 극혐이다.




상식, 도덕, 그리고 법은 건강한 사회를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이다!


왜? 대중문화는 지배이념의 새로운 이름이며 (생각공장의 시선 - 푸코와 투명감옥 참조) 절대 대중적이지 않은 저질 쓰레기 문화다. 대중의 정신에 편견 덩어리인 상식을 주입시키는 더러운 설사 혹은 토사물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상식을 열 여덟살 짜리 아이들이 수집한 편견의 모음에 불과하다고 했다. 세종도 아인슈타인형의 말에 100% 동의한다. 근데 이런 편견의 모음을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가 앞장 서서 확산시킨다. 그것도 매우 감성적으로! 그래서 세종은 대중문화를 통해 확산되는 상식을 이 단락에서 조져보려고 한다!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의 뇌에 주입되는 상식은 현재 우리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질서와 규범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규칙 모음)은 소위 가진자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동한다는 점이다. 왜? 이 질서와 규범들은 가진자들의 지위를 더욱 안정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 자크 루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법과 그 사회의 여러 관습이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그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심지어 보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오해하지 마라! 세종은 법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법은 본질적으로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수적이다. 법은 동시대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즉, 정치인과 시민의 불평등한 정치적인 권력관계,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제적 권력의 관계 즉,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유지시키고 보호한다. 그래서 세종은 법을 필요악이라 생각한다. 각 시대의 법은 각 시대의 불평등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왜? 법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 목적이 질서 유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는 항상 불평등한 시대였다. 법은 그 불평등한 구조를 합법적으로 유지시키고 그 불평등한 구조가 공격당하거나 위협을 받을 때 그 구조를 강제적인 힘 즉, 감옥제도와 경찰력을 동원해 보호한다. 세종의 주장이 아니다. 루이 알튀세르의 억압적인 국가 기구 (The Repressive State Apparatuses)에 관한 주장이다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편 2+를 참조). 돌이켜 보면 인류 역사에 그리 평등했던 사회가 거의 존재한 적이 없었음을 고려하면 법이 주로 권력자들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제도였다는 사실은 쉽게 추론된다. 그렇다면 법을 없애야만 하는가? 이쯤해서 로베르트 웅거라고 하버드 로스쿨의 비판적 법 연구 (critical legal studies)의 대가의 말을 소개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긴다: 법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항상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수정해야 할 대상이다. 그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법은 끊임없이 개정되어야 한다. 비판적 법 연구의 소개는 필자가 조만간 포스팅하겠다고 약속드린다. 분명 조만간인데 이 조만간이란 의미는 개인마다 느끼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조만간이 상당히 긴 기간이 될 수 도 있다. 루소와 루이 알튀세르의 주장처럼 법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권을 지키는 수단이다. 문제는 이 사유재산권이 모든 불평등의 근원이라는 점이다. 물론 피에르 조셉 프루동처럼 약자의 사유재산은 강자인 기업가들의 갑질로부터 약자들을 지켜주는 자유의 수단이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로부터 노동자를 지켜주는 필수적인 수단이 약자의 사유재산권이다. 하지만 강자인 수퍼리치들 (1조원 대 이상의 부자들)의 사유재산은 전쟁을 통해서 약탈했거나, 노동력을 착취해서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이며, 약자들이 낸 세금을 정치인들 꼬드겨서 몰래 뺏어낸 부의 결과물들이다. 이런 강자의 부는 분명 공적인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수퍼리치들의 사유재산권을 공적으로 규제하는 법률이 만들어져야 불평등의 정도가 완화될 수 있다고 세종은 확신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언급한 사유재산권 보호에 대한 세종의 견해가 매우 위험해보이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왜 사유재산권의 규제에 대한 세종의 생각이 위험해보일까?'가 세종의 대중문화 조지기의 포인트다. 세종의 의견이나 분석을 선뜻 못 받아들이는 분들 대부분 너무 드라마를 많이 봤거나 학교교육을 아무 생각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뉴스에 나오는 수많은 전문개 (?)들에게 세뇌을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고 말하면 실례일까요?;;




대중문화와 법이 정의로운 생각을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정의는 항상 자본에겐 위험하다!


법과 상식 그리고 사유재산권에 대한 세종의 생각이 위험하게 보이시는 분들은 본인들의 어떤 생각이 세종의 이런 생각들을 위험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드는지 잠깐 시간 가지고 스스로 물어보길 세종은 강추한다. 여러분이 현재 머릿 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생각이 세종의 지식과 그 해석을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만들고, 동시에 바로 그 생각은 어디서, 아니 누구 입에서 나온 생각일까?란 질문 꼭 해보시길 강추한다. 여러분의 그 생각을 제조한 생각공장은 어디일까?................어쨌든 이렇게 느끼시는 분들에게 세종은 이런 질문 하나 던져보고 싶다: 지구가 누구꺼일까? 미국의 알래스카 주는 석유채굴로 얻어진 돈으로 펀드를 만들어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모든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배당금을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똑같은 금액을 매년 제공해오고 있다고 한다. 배당금의 양은 2008년 기준으로 일인당 미국달러로 2060여 달러라고 한다. 4인 가족기준이면 1년에 천만원 정도 일년에 주정부에 의해서 배당금이 주어지는 셈이다. 이걸 갑자기 왜 세종이 소개할까? 지구와 그 땅 그리고 그 땅에 묻힌 자원이 누구 소유여야할까?란 근원적인 질문을 혹시 이 졸라 긴 잡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던지고 싶었다. 지구는 공공재이다! 지구의 자원 뿐 만 아니라 그 자원을 품고 있는 땅과 그 산물 또한 지구 생명체들의 공동 소유여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과격해 보이나? 안타깝다. 이 과격해 보이는 세종의 그리고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이런 생각은 현대인의 상식과는 멀어보이지만 정의롭고 아름다운 생각이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기본소득제나 국가의 최저 생계보장을 위한 국가 배당금 혹은 역소득세 같은 주장을 폈던 사상가들의 논리다. 버틀란드 러셀, 존 스튜어트 밀, 심지어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밀톤 프리드만의 논리였다. 물론 이상적인 사회주의자라고 여겨졌던 샤를 푸리에의 생각이며 동시에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의 500년 된 생각이기도 하다. 근데 이런 아름답고 정의로운 생각들은 상식적이지가 않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위험하게 보인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아름답고 정의로운 생각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이 생각을 위험하다고 혹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그 생각을 우리는 어디에서 얻었을까? 더러운 생각공장인 학교교육 아니면 미디어에 나와서 자유 민주주의나 자유시장의 가치를 개거품 물고 찬양하는 전문개들의 입에서 나왔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확산시키는 학교나 교육제도는 누가 만들었고, 과연 어떤 종자들이 미디어를 만들고 그 미디어에 돈을 대는지, 그리고 그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개들의 연구소는 누구 돈으로 운영될까?란 질문을 해 보길 세종은 여러분에게 강추한다. 목소리나 의도가 담기지 않은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 미디어의 개들, 그리고 드라마가 확산시킨 그 상식이 세종과 인류의 위대한 지성들의 생각을 위험하고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세종이 개거품 물고 떠들었는데 그래도 사유재산권 그 자체에 대해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없어 보이나? 없으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세종은 계속 떠든다. 다시 자연스럽게 본 주제로 돌아왔다.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드라마가 확산시키는 상식이 현재의 불평등을 유지시킨다! 왜?? 상식은 불평등의 해법인 정의로운 진보적인 생각을 드라마를 보는 다수로 하여금 늘 위험하다고 판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거부하게 만든다!!


이런 와중에 시민 모두의 공동 소유인 지구와 그 자원을 그리고 엄청난 잉여가치 즉, 영업이익을 독식한 기업가들은 재벌 2세라는 캐릭터로 대중에게 드라마속에서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때로는 졸라 잘생기고 옷 잘입는 로맨티스트로, 때로는 성격 파탄자이지만 진정한 로맨티스트로, 때로는 졸라 개자식으로 하지만 한 번 사랑에 빠지면 목숨거는 로맨티스트로 드라마에서 묘사된다. 어떻게 묘사되든 일단 부자는 대중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욕먹어야 할 대상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놀라운 역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드라마를 대중이 시청하면서 몰입하는 중에 돈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 돈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거라는 확신을 우리 모르게 받아들인다. 돈이 최고다란 상식적인 가치를 더 뿌리 깊게 대중의 의식 속에 드라마가 심는다. 돈이 성공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획일적인 가치를 대중의 의식 속에 더욱 강화시키고 확산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돈이 있어야 남자 주인공이 화날 때마다 몰아 재끼는 외제차를 몰 수 있고 그런 외제차 모는 놈을 만나야 명품 백을 들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좀 유식하게 세종이 표현하면 드라마는 'status quo; 현재의 상태'를 대중의 의식 속에 강화시키고 고착시킨다. 드라마는 매우 보수적이다. 그래서 극혐이다. 편견 덩어리인 상식을 대중의 의식 속에 뿌리 박히게 만든다. 이러한 상식이 우리를 올가미처럼 꼼짝 달싹 못하게 우리의 의식을 구속해서 사회를 더 건강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생각들을 위험하거나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판단하게 만든다. 정말 몇 안되는 진보적인 정치인이나 양심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제 그리고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구는 공공재다'란 주장들은 너무 급진적이고 위험하며 상식적이지 않다고 대중은 생각한다. 대중이 드라마를 통해서 얻은 그 상식의 집합이 대중으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 상식이 바로 2016년의 한국을 헬조선으로 만든 장본인임에도 그 상식을 붙들고 자위한다. '난 그래도 상식적인 사람이야! 난 온건 보수, 혹은 중도 개혁성향이야!'라는 개소리를 자본과 정치 엘리트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읊조린다. 1%의 특권층과 99%가 대립하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중도, 온건, 개혁 보수라는 말은 1%가 자기 편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개 사기인 정치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속지마라! 알고보니 이렇게 대중에게 가르친 보이지 않는 개 선생은 대중문화였다. 그 중에 드라마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진보적인 생각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는 것을 막는 매우 거대한 장벽으로서의 역할을 상식이 감당한다. 무섭고 거대한 상식의 벽이다. 이 무섭고 거대한 상식의 벽을 대중문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지배이념이 만들어 놓고 우리 사회가 걸어가야 할 정의로 향하는 길을 가로 막아 버린다. 그래서 그 길이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또 그래서 세종은 상식도 극혐하고 이 상식을 더욱 딱딱하게 만들고 이 상식의 벽을 사회 겹겹이 그리고 대중의 의식 깊숙히 뿌리 받는 역할을 하는 대중문화 중에 특히 드라마를 극혐한다. 땅에다 지 맘대로 선긋고 자기땅이라고 우기는 생각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렇게 우기는 재벌들을 멋지게 보이게 만드는 게 드라마의 숨은 제작의도다. 드라마 감독과 작가도 모르는 드라마의 숨은 본래 의도다.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정말?? 드라마를 구성하는 언어는 이념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즉, 모든 말 속에는 한 개인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을 유도시키거나 막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근데 말로 구성된 드라마의 스토리에 아무 의도가 없다고??




드라마가 아니라 세종의 이런 잡글이 대중문화다!!!


세종의 대중문화 극혐은 대중문화가 대중의 의식, 태도, 그리고 행동을 조종하는 지배이념이라는 인식때문이다. 근데 문제는 이 대중문화를 대중들이 자기들 문화로 착각한다는 데에 있다. 대중문화는 필자의 기준으로는 대중이 그 문화의 창조에 스스로 기여할 때 그 문화를 대중문화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이름 없는 세종의 글이 바로 대중문화의 한 부분이다. 왜? 세종은 이름 없는 동네 인문학 강사이자 잡글을 브런치에나 올리는 자칭 세계적인 종합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세종의 가치는 관두고 이름조차 모른다. 그래서 세종은 대중이고 이 글은 대중의 한 구성원인 세종의 잡글이기에 대중문화라고 자신있게 떠든다. 드라마, 영화, 게임, 스포츠 볼 시간에  진정한 대중문화의 한 아이템인 세종의 잡스러운 글을 읽어야 한다고 졸라 크게 외친다. 근데 목소리가 어디까지 퍼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세종처럼 외치는 다른 목소리들과 합쳐져서 언제가는 크게 퍼지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본편 (아방가르드한 대중문화인 모던 아트)의 주제로 가기 전에 이렇게 세종이 글을 위에서처럼 길게 던진 이유가 있다. 대중문화라고 하는 것들이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법이라는 제도로 기업가들의 이익과 지위를 유지시키기 위해 작동한다고 세종은 크게 외치고 싶었다. 어떻게? 대중문화를 통해 만들어진 생각들을 우리 뇌에 주입하고 이 주입된 생각이 새롭고 정의로운 생각들을 우리로 하여금 거부하게 만든다. 여기까지 세종은 상당한 설득력을 뽐냈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신 분들께 감사한다.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다면 세계적인 종합지식인이 진정한 세종이 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사실을 세종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논리로 신념을 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여러분께서 인정해주시길 기대한다. 어쨌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세종이 되야겠다. 좌절하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야바위꾼 (정치인 & 기업가)들의 충직한 바람잡이다!!


대중 문화를 세종이 극혐하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대중문화 예를 들면, 스포츠 특히 월드컵이나 프로야구 그리고 올림픽, 또 한편으로는 영화나 게임 등은 우리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부터 소외시켜버린다. 소외 어려운 말이다. 한마디로 중요한 이슈가 심지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슈가 정말 중요한 이슈인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대중문화들은 중독성이 마약만큼 졸라 강렬하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하나의 습관이 되어버렸다. 스마트 폰이 스마트하게 대중의 눈과 귀에 스마트한 방식으로 대중문화의 유혹의 속삭임을 전달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왜 대중문화에서 대중이 빠져 나와야 하냐고? 앞서 세종이 언급한 뽀로로의 역할을 대중문화가 대중에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9/11이 미국에서 일어났을 때 대서양 건너편의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토니 블레어의 스핀 닥터 (pr 전문가; public relation) 중에 한 명이 블레어 총리에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지금이 재정 지출 관련한 문제를 공개할 적기입이다. 총리님! 이 이멜이 공개되면서 이 스핀 닥터가 사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매우 전형적인 방식이다. 대중의 여론을 교묘히 조종하는 전문가들을 스핀 닥터 혹은 pr 전문가 혹은 홍보전문가라고 한다. 이 시끼들에 대해선 필자가 언론학에 대한 세종의 통찰을 공개할 때 소개하겠다. 어쨌든 중요한 정치, 경제적인 이슈를 대중에게 공개하기를 꺼리고 싶을 때, 연예인 스캔들, 대형사고, 테러, 자연재해와 같은 것들에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려 한다. 하지만 매일 연예인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고 대형사고나 테러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시청률 졸라 높은 드라마나 천만이 보는 영화로, 스포츠나 게임으로 대중의 관심을 정치, 사회, 문화의 중요한 문제로부터 분리시킨다. 야바위꾼의 바람잡이처럼 대중문화는 우리의 얼을 쏙 빼논다. 이런 대중문화는 세종의 아들을 울다가도 울음을 뚝 그치게 만드는 뽀로로와 같은 역할을 대중에게 한다. 감쪽같이 세종의 아들은 세종의 노림수에 속는다. 내가 너무 머리가 좋은 건지? 아니면 세살 짜리 아이의 지적 수준이 낮은 건지 좀 헷갈리긴 하다. 근데 좀 짜증나고 불편한 진실은 기업가와 정치인들 즉, 그 시끼들이 우리 대중을 세종이 뽀로로로 아들 다루듯 그렇게 다룬다. 전체 인구의 최대 51% 아니 2016년에는 30% 만 속아도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지맘대로 해댄다. 거의 막가파 수준이다.




생각공장의 시선 - 대중문화와 모던아트 1 결론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자본의 문화가 대중문화다!!


세종이 대중문화를 극혐하는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수적인 지배이념의 가치를 대중문화를 통해 대중의 의식 깊숙히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래서 상식과 좀 거리가 있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생각들을 위험하거나, 종북적이거나, 아니면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주범이 대중문화라고 세종은 강력하게 떠든다. 제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나 더! 대중의 관심을 대중문화가 정말 삶과 밀접히 관련된 주요 정치, 경제적인 이슈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삶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들이 우리의 관심 밖에서 소수의 권력자들과 기업인들에 의해 결정되고 이 결정이 점점 우리가 사는 사회를 그들에겐 천국으로, 우리에겐 헬조선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금쪽 같은 돈을 들여 대중문화를 만들고 확산시킨다. 더 큰 문제는 이 대중문화라고 하는 것들이 졸라 재밌고 그래서 중독성이 쩐다. 그럼에도 끊어야 한다. 왜?? 대중문화는 우리가 아닌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지켜주는 지배이념으로 매우 훌륭하게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대중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기를 대중 스스로 열망한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이상한 심사위원의 모욕적인 평을 들어가며 기를 쓰고 출연하고 그 경쟁과정에 대중은 감정이입하며 경쟁의 가치를 자신들의 의식속에 심는다 (생각공장의 시선 - 푸코의 투명 감옥 참조).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본다는 진보지식인이 있을 정도다. 이념에 대한 공부가 좀 부족해 보인다. 안타깝다. 지배이념을 진보지식인이 확산시키고 있는거다. 세종의 바로 이 글 앞쪽에서 언급한 거대하고 복잡한 생각의 구조물에 이 진보 지식인도 나쁜 생각들을 채우고 확산시키고 있는 거다. 거대하고 복잡한 수많은 생각의 구조물에 나쁜 생각을 주도적으로 대중문화가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부터 세종의 분석으로 조졌다. 교육제도도 이미 세종이 조졌다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편 3부작 참조). 결론은 대중문화는 기업가들에 의한, 기업가들을 위한, 기업가들의 문화다. 목적은 우리를 사기치기 위해서다. 이쯤 되면 독자분들은 이 글이 언제 끝나려나 생각하고 계실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시작이다. 사실 생각공장의 시선 - 대중문화와 모던아트 1부 (대중문화는 지배이념이다!)가 끝나려한다. 세종의 지식의 폭과 깊이에 감동하고 계신 독자들은 이쯤되면 질문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를꺼라고 세종은 생각한다. 과연 근데 여기 까지 읽어 준 인내심 쩌는 독자가 있을까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독자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공감능력이 쩌는 세종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다. 그 하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대중문화는 그럼 도대체 머야? 어떤 문화가 대중문화여야해?




참고로 세종의 파도 파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식에 감동하셨다면 좋아요와 공유, 그리고 댓글을 무자비하게 눌러주시기를, 그리고 구독도 잊지마시기를 세종이 강추함!!




생각공장의 시선 - 대중문화와 모던아트 2 (지배이념을 깨는 모던아트)부 예고


정답은 모던 아트다! 아방가르드한 모던 아트의 세계로 세종이 여러분을 초대한다. 기대하셔라! 아방가르드한 모던아트가 여러분이 진정 즐길 수 있는, 그리고 심지어 창조할 수 있는 대중문화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세종은 강력하게 목청 터져라 외친다. 생각공장의 시선 - 대중문화와 모던아트 2편에서 왜 모던 아트의 정신과 그 지향점이 우리 대중의 문화여야 하는지에 관해 역사적인 기술과 함께 큰 목소리로 떠들어보려 한다. 2편에서는 보너스로 독자들에게 대중문화를 평론가처럼 평할 수 있는 한 기준을 세종이 제시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즉, 아방가르드한 모던 아트의 관점에서 현재의 대중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평을 다시 한 번 던지겠다. 또 던져?! 2016년 현재의 대중문화는 다시 한 번 세종의 날카롭고 예리한 펀치와 같은 비평에 두 눈 시퍼렇게 멍들고 코피 흘리게 될 것이다. 2부에서 세종한테 다시 한 방 맞은 대중 문화는 머리카락이 헝크러진 채 다음과 같이 여러분에게 자백할 것이다: 전 사실 짝퉁 대중문화에요! 그동안 여러분을 속여 왔어요.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ㅠㅠ  










Bibliography  


Culler, J. (2000), ‘Literary the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Freeden, M. (2003), ‘Ideolog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Hargreaves, I. (2005), ‘Journ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Ward, C. (2004), ‘Anarch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Yannick Vanderborght and Philippe Van Parijs (2005), The History of Basic Income (Harvard University Press). The web version has been edited and abridged by Simon Birnbaum and Karl Widerquist, Basic Income Earth Network [website], (updated 25 Aug. 2016) <http://basicincome.org/basic-income/history/>, accessed 25 Augus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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