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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Nov 05. 2017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민족주의의 덫

압도적인 스펙터클 속에 담긴 은밀한 메시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대한 간략한 소개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비롯해 4개 부분 수상했다. 아카데미상과 함께 미국 내의 다양한 영화제에서도 수상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영화 잡지인 엠파이어(Empire)는 이 영화의 초반 27분을 차지하는 오마하 해변의 상륙 장면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전쟁 묘사로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장면에 엑스트라 1500여 명, 이 장면만을 위한 제작비가 당시 우리 돈으로 100억 원이 넘게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아일랜드 예비군까지 출연하면서 전투 장면의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했다. 27분간의 숨 막히는 초반 전투 묘사 덕분인지 이 영화 하나로 전 세계적으로 대략 5억 달러(현재 우리 돈으로 5~6천 억 원 사이)를 벌어들였다. 흥행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그리 총명해 보이지 않는 평론가와 제작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상당수 평론가에게도 호평을 얻어 냈다.


개봉 당시에 영화를 볼거리로만 판단했던 나도 '이렇게 멋진 전쟁영화가 있나? 우리나라는 왜 이런 영화를 못 만들지?' 하며 안타까움과 함께 '역시 스필버그 감독이야.' 라며 호평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가 개봉된 지 거의 20년이 지난 2017년 현재 매우 지적인(?) 현재의 나는 '생각공장'이라는 인문 학원을 운영 중이다. 올해 10월의 인문학 수업 주제가 '근대의 전쟁(Modern War)'이었다. 그래서 이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학생들과 함께 감상했다.






스펙터클은 무엇을 숨길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개봉한 지 거의 20년이 흘렀다. 2017년 올해 10월에 다시 보면서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거대한 규모와 전투 장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내 혼을 빼놓았다. 다시 봐도 ‘이 영화를 어떻게 비평할 수 있을까?'란 질문이 나도 모르게 나올 정도였다. 스필버그의 연출은 매우 치밀했고 그래서 완성도가 높게 보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선물한 흥분이 가라앉은 후에 한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아바타를 본 후에 든 생각과 같은 생각이었다. 압도적인, 혹은 숨을 멎게 할 정도의 스펙터클은 영화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잠재우기 위한 하나의 트릭이 아닐까? 동시에 이러한 화려함은 그 속에 스민 특정한 이념을 숨기는 방식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비평의 의지를 무력화할 정도의 전투 장면'이라고 내가 표현한 것처럼 이 영화의 미학적인 부분은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우선 이 영화가 전달하는 표면적인 메시지부터 살펴보겠다.






인간의 생명과 그 등급


이 영화는 미군의 최고 지도자가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고 명령하면서 시작한다. 이 전쟁에서 아들 셋을 잃은 어머니의 막내아들이 라이언 일병이다. 이 임무를 위해 8명의 정예 요원을 사지에 파견한다는 내용이다.



너무 소중한 아들과 형제


전쟁 영화는 자주 아군의 생명은 소중하고, 적군은 죽어 마땅할 사람으로 묘사한다. 마치 생명에도 등급이 있는 것처럼. 라이언 일병이 낙하된 지역은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 중의 한 곳이었기에 영화 시작부터 8명의 요원 중 과연 몇 명이 생존할 수 있을까? 를 묻게 되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정예 요원 8명을 사지에 내모는 미군 장군의 인도주의적(?)인 배려는 분명 논쟁할 만하다. 그렇게 라이언 일병을 살리고 싶으면 장군 본인이 가면 될 것을 꼭 애꿎은 병사들만 보낸다. 아군 한 명의 생명과 이를 구하러 간 8명의 생명은 같은 가치인가? 장군 한 명 보호하기 위해 비행기에 철판을 대 아군 수십 명을 죽게 한 사건도 나온다. 심지어 매력적인 미군의 스나이퍼(대니얼 잭슨)는 항상 성경 구절을 암송하거나 신의 이름을 부르며 독일군을 저격한다. 독일군의 하느님은 대니얼의 하느님과 같은 기독교의 신이 아닌 것처럼. 라이언 일병의 생명만큼이나 자기가 죽이고 있는 독일군의 목숨도 그 하느님께는 똑같이 소중할 텐데 말이다. 이 영화는 미국의 하느님만이 진정한 신이며, 미군의 생명만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인 양 영화 내내 우긴다.






전쟁과 학교, 그 섬뜩한 조합


가장 중심인물이면서, 어찌 보면 가장 섬뜩한 캐릭터가 주인공인 특수 부대장 존 밀러 대위다. 밀러는 부하들한텐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인조인간으로 불릴 만큼 전투에 능하다. 고향이나 직업과 같은 사적인 내용이 베일에 가려진 신비한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 중간 즈음에 스스로 문학 교사임을 부하들에게 고백한다. 주인공인 밀러는 선생님답게 대중 교육제도(mass education)가 목적하는 인간상이었다. 지랄 같은 명령일수록 따라야 한다는 그의 대사는 대중교육제도가 무뇌의 군인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량 생산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9세기에 등장한 대중 교육제도는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의 발흥과 관련이 있다. 학교는 농노이던 수많은 민중을 공장 노동자로 탈바꿈하기 위해, 그리고 유럽 국가의 제국 확장에 필요한 군인을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해 생겼다(Thomas 2013, 13-4). 밀러 대위는 산업화 시대의 또 다른 공장이었던 학교가 생산하는 인재의 필수적인 자질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국가에 대한, 그리고 그 국가권력을 차지한 권력자들에 대한 복종이 바로 그 자질이다(Belsey 2002, 31-37). 살벌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에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결국 마치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복종한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탱크를 향해 총질하는 대중 교육의 효과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국가를 향한 충성, 그리고 그 조국의 참전 명분에 대한 무뇌아적인 복종과 맹목성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스필버그가 이 장면을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현재 나의 해석과는 달랐을 것이다. 영화 개봉 당시 젊지만 순진했던 나는 밀러가 조국의 승리와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충직히 감당했다고 이해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적에 끝까지 대항하는 위대한 군인으로 이 장면을 해석했다. 지금 돌아보면 씁쓸하다. 영화가 끝날 때, 늙은 라이언 일병도 밀러의 묘 앞에서 그의 유언대로 잘 살았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라이언 일병은 밀러 대위를 훌륭한 군인과 은인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를 보았을 수많은 미국인과 전 세계 관객도 라이언의 판단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스필버그 감독도 관객이 라이언과 같이 밀러 대위에 관해 생각하기를 원했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스필버그는 왜 영화 끝과 시작에 휘날리는 성조기(애국과 조국의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를 보여주었을까(Freeden 2003, 114-5)?  






시작부터 끝까지 성조기 휘날리며


영화 시작과 끝에 펄럭이는 성조기는 밀러 대위와 그 팀의 희생 때문에 라이언 일가처럼 미국 시민 전체가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고 웅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펄럭이는 성조기는 국가 권력자를 대신해 미국 시민에게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너희는 또 아무 생각 없이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해.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그래야 미국 시민 모두 안전하게 살 수 있어.” 그래서 그런지 영화감독이자 참전 용사이기도 했던 올리버 스톤은 이 영화가 5년 후에 있을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년)을 위한 여론 조성에 기여했다고 비판했나 보다. 올리버 스톤은 또한 이 영화가 2차 세계 대전을 ‘좋은’ 전쟁으로 미국민이 생각하도록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인 사건이 1, 2 차 세계 대전이다. 그런데 그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다시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를 주입하고자 한다면, 이런 영화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민족주의는 국가가 스스로 자기를 통치할 수 있어야 하고, 원치 않는 외국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민족 자결권을 가져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민족주의란 이념은 문화, 언어, 인종, 종교, 정치적인 목적과 같은 공통의 특징에 근거해서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된다. 동시에 한 국가에 대한 위대한 업적 예를 들면, 자국의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 것과 관련 있기도 하다. 그래서 민족주의란 이데올로기는 애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볼테르는 이러한 이념을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한 나라의 애국자가 되는 것은 인류 전체의 적이 되는 것이다.’라는 애국주의에 대한 그의 평가에 나도 동의한다.






전쟁의 본성


그렇다면 전쟁의 본성은 무엇일까? 전쟁은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수한 젊은이의 생명을 죽이는 가장 사악한 근대 국가의 정책 중에 하나다. 국가의 이러한 사악한 정책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참여하고, 그 아들을 둔 부모가 자식을 전쟁에 내어주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할까? 단지 국가의 명령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민족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한 숭고한 헌신의 한 형태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쟁은 그저 수많은 젊은이에 대한 학살을 수반하는 국가의 사악한 정책일 뿐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런데 이토록 명백한 전쟁의 본성이 과도하게 조장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라는 이념에 의해 가려졌다. 1, 2차 세계 대전에 대해 전후의 수많은 지식인은 당혹스러워했고 반성했다. 그런데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전쟁영화가 젊은이에 대한 대량 학살에 다름 아닌 전쟁을 숭고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은밀히 활약한다. 그래서 지배의 상징인 미국 의회 도서관이 이 영화를 국립 영화 보관소에 보관하기로 2014년에 결정했나 보다. 국가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의회 의원들이 이 영화는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 같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지배 엘리트의 관점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배자들은 이런 애국주의를 조장하는 영화가 상대국과 자국의 수많은 생명을 무참히 살해하는 전쟁에 대중을 동참하게 하는 대표적인 이념적 수단임을 알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자들은 이런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전쟁의 씨앗을 대중의 정신에 뿌린다. 화려한 볼거리를 주는 이런 영화는 우리의 의식에 사악한 꽃을 즉, 전쟁에 대한 동의를 끌어낼 이념을 심는 거다. 그래서 국가와 본인을 동일시하는 권력자들의 민족주의 선동에 우린 또 누군가의 아들과 아버지일 수 있는 한 인간을 죽이고, 누군가의 딸과 누이일 수 있는 여성을 강간하게 된다. 권력자들만 원하는 전쟁에서.






대안적인 전쟁 영화는 어떤 메시지를 담아야 할까?


전쟁 영화에 세계 시민주의의 관점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 그리고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자는 주제가 담긴다면 어떨까? 세계 시민주의라고 번역되는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한 인식을 확산할 수 있는 전쟁영화는 어떨까? 세계 시민주의(Cosmopolitanism)는 공통의 도덕성에 기초한 하나의 공동체에 모든 인간이 속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이 공동체는 다른 국가의 여러 규범을 포용할 도덕성, 공통의 정치, 경제적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세계 시민 공동체에서 개인은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세계 시민과 상호 존중의 관계를 형성한다(Miller 2003, 123-4). 이러한 공동체에서 시민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칸트가 자신의 논문 '영속하는 평화(Perpetual Peace; 1795)'에서 주장했다.


1, 2차 세계 대전의 원인에 대한 학자들의 분석이 있다. 전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일어난다. 과도하게 조장된 민족주의 때문에, 주권국가를 향한 노력이나 외부의 위협에서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서, 국가 간의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해, 종교적인 갈등이나 제국주의의 확장과 방어를 위해, 그리고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전쟁의 원인은 민족주의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전쟁영화의 메시지는 민족주의의 위험한 이런 측면을 폭로하는 내용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국가, 문화, 종교, 언어, 자원, 우리 국민의 생명 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이러한 것들도 우리 것만큼이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메시지가 전쟁 영화에 담겨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신, 그들의 문화와 생명 또한 우리의 것들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인식,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메시지가 대략 1억 명을 살해한 전쟁 가담 국가나 사회가 장려해야 할 대중예술이 아닐까?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전쟁 영화가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메시지의 인식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이 인식에 바탕을 둔 세계 시민의 반전에 대한 동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필버그는 영화 잘 만들기로 소문난 감독이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도 받았다. 이런 영화에 아카데미상을 주는 것이 적절했을까? 스틸버그는 자신의 영화가관객의 의식에 이런 영향을 줄지 몰랐을까? 알았지만, 대중의 의식 수준과 국가 권력을 쥔 자들의 영화적 취향에 맞추느라고 수준을 끌어내린 걸까? 두 경우 모두 스필버그에겐 참 안쓰럽고 불행한 일이다. 감독의 화려한 연출 속에 담긴 것이 고작 반동적이고 위험한 민족주의와 그와 유사한 애국주의라니.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는 건 마치 화려한 포장지를 보고 기대했다가 그 안에 담긴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는 심정과 같은 거다. 그의 연출력이 아깝기만 할 뿐이다. 스필버그의 영화적 역량에 현저히 못 미치는 그의 철학적 깊이에 대한 안타까움도 너무 크게 느껴졌다. 스필버그는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와 스토익 철학자들, 신양 성서의 대표 저자 사도 바울, 근대 철학자 칸트, 그리고 자크 데리다를 포함한 수많은 사상가의 '세계 시민주의'에 대한 외침을 듣지 못한 걸까? 알면서도 나의 추측처럼 애써 모른 척하며 권력자들의 편에 선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다수 관객의 취향에 맞춘 걸까?






화려함이 가리는 것


주로 볼거리로 번역되는 스펙터클을 나는 '화려함'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생각해보고 싶다. 화려함은 진화의 역사에서 주로 연막의 기술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식으로, 혹은 보는 이의 혼을 빼놓는 기술로 사용되어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영화에서 보이는 전투 장면의 화려한 볼거리들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배우의 화려한 외모, 직업, 삶의 환경 속에 어떤 가치와 생각(전제)이 소리 없이 담겨 있을까? 란 질문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이 영화의 볼거리들은 영화가 은밀히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은폐한다. 이 영화는 위험한 민족주의,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쟁 속에서도 한 어머니를 향한 국가의 인도주의적 배려, 그리고 그 국가에 대한 애국과 충성을 강조하는 국가주의적 가치를 은밀하게 주입한다. 스펙터클로 관객의 혼을 빼놓으면서(Freeden 2003, 117). 이 스펙터클에 흥분하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과도한 민족주의, 애국주의, 그리고 미국의 선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과열된 민족주의 때문에 발생한 참혹했던 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역설적으로 그 민족주의를 미국인에게, 그리고 전 세계인들에게 다시 주입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의 스펙터클에만 흥분했던 나의 현명치 못했던 20대를 씁쓸하게 상기하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Freeden, M. (2003), ‘Ideolog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Miller, D. (2003), ‘Political philosoph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Thomas, G. (2013), ‘Educ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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