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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Jun 12. 2018

이재명과 김부선

우리는 누구나 야만과 문명,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인간은 이중적이 아니라 다중적이다!

인간의 이중성 혹은 다면성은 위선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은 원래 그렇다! 사람은 태어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종류의 관계를 다양한 이유로 맺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은 그 관계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과 태도를 타인에게 보이고, 그리고 이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을 한다. 이런 사정으로 한 사람은 각기 다른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여러 다른, 심지어는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한 사람에 대한 각기 다른 평판이 만들어진다. 그런데도, 한 인물의 평판이 한쪽으로 몰리는 이유는 그 사람이 하는 주된 활동과 그 활동에 대한 평가가 지배적인 평판을 만들어 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지배적인 평가 때문에 사람이 가진 본성 즉, 사람의 성격과 행동의 다중적 측면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언론도 한 유명인에 대한 특정 측면만을 집중 조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그 인물에 대한 한 가지 지배적인 평판을 만드는 데 한몫한다. 그래서 정치인이자 한 인간인 이재명도 촛불의 행진에서 언론이 조명하고, 그 관심에 호응하던 그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연히, 이재명도 다중적이다. 그는 분명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사적인 혹은 공적인 관계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 관계들에서 비롯한 수많은 평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졌던 지배적인 평판은 적폐에 대한 투쟁가였다. 그의 개인사에 대한 평판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만든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이번 사건은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던 그의 연애사가 드러난 것일 수 있다. 사건의 배후에 협박이 있었는지는 한쪽의 주장이기에 여기서 그 논쟁은 다루지 않겠다. 누구든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져야 한다. 한 인간에게는 선하고 악한, 아름답고 추한, 정의롭고 불공평한, 자상함과 잔인함이, 그리고 문명인다운 모습과 야만적인 것처럼 상충하는 것들이 가득 차 있다. 그 사람이 가진 신념도 일관되게 모든 측면에서 진보적이거나 모든 면에서 보수적이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이면서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도 여성 문제, 민족주의 문제, 다양한 소수자 이슈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순을 쉽게 드러내기도 한다. 한 인간은 이런 모순과 불완전함, 그리고 상충하는 여러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면 정치인을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할까?


수많은 관계를 갖는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대할 수 있는 정치인은 없을 거다. 한 유력 정치인은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거기서 수많은 종류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한 정치인이 수많은 이해관계와 정치적인 신념을 가진 유권자의 기대와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없다. 정치인의 정치철학이 수많은 지지자의 신념과 모든 면에서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별적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신념과 본인의 신념이 특정 이슈에 대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막강한 권력을 시민과 나누지 않고 독점해 행사하게 하는 대의 민주제에서 이것은 정치인에게는 어쩌면 숙명이다. 이런 수많은 관계에서 비롯하는 여러 문제의 대응 과정에서 정치인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고, 적대적 관계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 정치인을 특히, 자신과 같은 진영에 있는 정치인을 비난할 때는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그 정치인의 신념이 불일치하거나, 혹은 자신의 정치적 요구가 관철되지 않아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내 비판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냉정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유권자가 가진 도덕적 기준을 맞출 정치인이 과연 있을까?

스캔들이 없는 정치인이 있지 않냐? 고 되물을 수 있다. 스캔들이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런저런 이유로 밝혀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권력을 가진 자는 그 권력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고, 그 과정에서 그 힘을 과시하려 한다. 과시욕과 더불어 성욕의 충족 과정도 일반 유권자의 그것과 비교할 때 그만 못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추문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정치인은 있겠지만, 한평생 살아오면서 성적인 문제에서 한 치의 오점도 없는 정치인이 과연 있을까? 이번 스캔들에서, 그리고 그것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협박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이해하자는 것은 아니다. 불법적인 것이 있었다면 그건 분명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이 문제도 현재로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렇게 길게 내 생각을 적는 이유는 분명 이번 사건이 생각해 볼거리를 나와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사생활이 먼저인가? 아니면 그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행동의 일관성이 먼저인가?
모순과 불완전한 사회에 사는 모든 인간 또한 모순적인 신념과 행동을 보인다. 그래서 정치인도 우리처럼 불완전하다!


난 불완전한 시민 모두 현재 그 모습 그대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불완전함과 모순을 보이는 여러 사람이 모여, 타인의 욕심과 편견을 발견한다. 이들과 토론하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본인 또한 자신의 이중성과 모순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괜찮은 정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 구조는 시민의 정치참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흠이 많은 정치인 중에 누군가를 뽑아야만 한다. 도덕적인 흠이 있는 정치인이 우리 진영에 있을 때, 유권자는 그를 뽑아야 하는가? 현재의 대의 민주제 하에서 나는 도덕적 흠결에도 그 정치인의 신념에 상당 부분 동의하고, 그가 그 신념에 맞는 일관된 행동을 보여주었다면 그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정치적 행동이 일관성을 보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정치인의 도덕성에 대한 유권자의 기준을 맞출 정치인을 찾기는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정치인을 포함한 한 인간의 본성이나 정체성은 통념과 같이 한결같은 모습이라기보다는 다중적이다. 이중성을 넘어서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 청렴과 화려한 삶에 대한 욕망과 같이 상충하는 측면이 한 사람 안에 다 들어 있다. 언론이 이런 다중적 측면을 간과하고, 한 정치인이나 정치 세력이 오로지 선하거나, 반대편은 오로지 부패하거나 하는 식으로 보도한다. 이런 이유로 한 정치인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진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스캔들이 터지거나 그 정치인에게서 우리와 똑같이 모순하는, 혹은 다중적인 모습을 보게 되면 언론이 만든 그 신화는 환멸과 함께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환멸을 느낄 사치는 잠시 접고,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 사회를 최소한이나마 고칠 방법이 뭘까? 를 고민하는 게 차선책이 아닐까?






정치인에게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실망하며 버려야 할까?

정치인에 대한 실망과 환멸은 그 정치인에게서 너무나 평범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은 아닐까? 난 그 평범함 즉, 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순적인 신념과 행동, 그리고 편견이 있는 한 인간이 가진 전체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화적인 정치인이, 그것도 내가 신뢰했던 정치인이 그런 불완전한 모습을 가진 것을 발견했을 때, 그 감정 상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인간이 모여, 가진 자는 지키려 하고, 못 가진 자는 가진 자의 것을 나누려 하는 것이 정치다. 놓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악하고, 나눔을 통해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선한가? 정의를 위해 우릴 대표해 싸우는 정치인은 모든 면에서 흠이 없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대변할 그런 선한, 흠이 없는 정치인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한다. 교수, 정치인, 작가, 종교인 같은 몇몇 직업군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우린 이들에게 우리보다 높은 도덕성을 기대하는 것 같다. 이 기대부터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기적이고, 권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려 하고, 속물근성으로 가득 차 있고, 어느 부분에서 탁월하고 어느 부분에서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불균형적으로 성장한 인간일 뿐이다. 이들에게 각자의 신념에 바탕을 둔 전문성보다 도덕성을 더 먼저 요구한다면, 이들 모두 그 직업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도덕성에 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도덕성을 수치로 계량할 수 있는가? 기준을 세우면 되지 않을까? 하고 되물을 수 있다. 진보정권 십 년과 보수 정권 십 년의 인사청문회를 되돌아보자. 진보적인 인사들은 청문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준의 청렴함이 필요했다. 반면에, 보수 진영 인사들은 논문 표절, 위장 전입, 병역기피, 부동산 투기 등의 기본 스펙을 갖고도 당당히 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도덕성의 기준이 고무줄이고, 그 기준 또한 진보 정치인에게만 유난히 엄격했다.






미완의 맺음말

이런 모든 측면을 고려할 때, 다중적이고 불균형적으로 성장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정치인을 뽑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무엇보다도, 그 정치인의 신념에 내가 동의할 수 있는지와 그 신념에 걸맞은 정치적인 행동의 일관성을 보였는지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의 도덕성과 사적인 삶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인의 정치적인 삶의 측면이 가장 우선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매우 개인적인 생각 놀이였다. 그러니 이 글은 읽은 각 사람의 생각은 내 의견과 다를 수 있다. 굳이 내 의견에 동의하실 필요는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사색과 그 생각의 과정에서 얻은 의견을 가질 수 있고, 그 견해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 자신의 의견이 나와 다르다고 말하는 선까지는 표현해도 괜찮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토론을 명분 삼아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을 강요하지는 말자. 상대가 싫다는 데도 자꾸 토론하자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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