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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Dec 07. 2017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실존주의

톨스토이가 말하는 진정한 삶이란?






롱 패딩과 참 실존적이지 않은 우리


얼마 전쯤인가 롱 패딩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이 롱 패딩은 평창 올림픽을 기념해 제작한 한정판이었다고 한다. 요 며칠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롱 패딩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톨스토이의 소설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실존주의 관점에서 해석해보려 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롱 패딩인가? 2011년 말에 필자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특정 브랜드의 일명 '바람막이'가 대유행이었다. 올해는 롱 패딩이 대세다. 새로운 '등골 브레이커'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말한다. 도대체 롱 패딩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 그리고 실존주의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먼저 실존주의부터 살짝 살펴보자.






실존주의의 물음은? 


실존주의 철학은 19세기 프리드리히 니체와 쇠렌 키르케고르에서 시작되었다. 실존적인 개인은 니체의 '떼'(herd)의 윤리와 규범 체계,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윤리적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도덕과 가치관대로 산다. 20세기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실존적 개인의 기준에 대해 언급했다. 하이데거는 '비 진정한'(inauthentic) 선택이란 표현으로, 사르트르는 '나쁜 신앙'(bad faith)으로 실존적이지 않은 개인을 묘사했다. '동물 떼의 윤리든, 비 진정한 선택, 혹은 나쁜 신앙'이든, 이 모든 표현은 한 유형의 선택과 지향을 가리킨다. '그들'(they; 동물의 떼, 대중, 남들 혹은 좀비?)이 선택하는 대로 선택하며 살 거냐, 아니면 그들과는 독립적인 선택을 하며, 다른 길을 갈 거냐?'다.


실존주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개인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남들이 믿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대로(비 진정한 선택을 하거나 나쁜 신앙에 사로잡혀 살 것이냐? 아니면, 그 집단(그들)의 신념과 가치, 그리고 이것들에 바탕을 둔 선택을 의심하며 다르게 살 것이냐?'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맞추면서 한 개인인 나를 잃어버리며 살 것인가?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나와 타인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선택을 하며 살 것인가? 사회의 여러 제도, 규범 체계, 그리고 그 속(facticity; 한 개인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포함한 모든 조건)에서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며 살 것이냐? 아니면 이런 사회 속에 '던져진' 운명이지만, 이런 제도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든 극복하며(transcendence; 삶의 여러 조건을 대하는 한 개인의 태도) 살 것이냐? 다. 실존주의는 거대한 군중에게 혹은 나쁜 신앙에 사로잡힌 거대한 좀비 무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지금 네가 걷고 있는 그 길에 대해 의심해 본 적 있어? 아니면 다수가 걷는 그 큰길에서 나와 좁은 길을 걸을 용기, 혹은 없는 길을 만들면서 헤쳐나갈 용기가 없는 거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중단편 소설 중에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소설은 제목처럼 주인공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죽음은 일리치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질문하게 한다. 죽음은 일리치에게 자신의 인생, 진정한 삶,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본성에 대해 묻게 한다. 일리치는 판사다. 그것도 매우 능력 있고, 그 능력 때문에 법원 내에서도 인정받고 하급자에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사교계에서도 인정받고, 적당한 취미(카드놀이, 파티 등)로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법도 잘 안다. 일리치의 부인은 아름다울 뿐 만 아니라 상당히 괜찮은 집안에서 자란 여자다. 일리치의 집안 배경과 사회적 지위를 고려했을 때 부인과의 결혼은 무난한 선택이었다. 일리치는 인생에서 약간의 고비도 있었지만 잘 헤쳐나간다. 멋진 집을 장만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가구와 장식품으로 새집을 꾸민다. '있어 보이'는 물건들로 집을 꾸미면서 만족하지만, 정작 이런 물건들은 귀족들에겐 별 특별할 게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취향은 상류층에 대한 일리치의 동경과 허영심을 드러낼 뿐이다.


새집을 장식하는 과정에서 옆구리 쪽을 부딪치면서 알 수 없는 통증이 일리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 통증이 멀게만 보였던, 아니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죽음으로 일리치를 끌어당긴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 과정에서 일리치는 죽음을 잊어보려 게임도 하고, 여러 의사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죽음은 더욱 가까이 일리치에게 다가온다. 죽음의 존재를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되면서,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에 가득했던 위선과 거짓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일리치는 사회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 그들의 가치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부인과 딸도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산다. 그래서 부인과 딸의 삶은 일리치에게 극한 혐오의 대상이다. 다시 그 혐오는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인생으로 향한다. 일리치는 죽음을 직면하면서, 죽음의 존재를 무시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먼저 생각하는 '그들'의 삶을 혐오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 또한 그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죽음 앞에 선 일리치는 충직한 하인 게라심의 한결같은 배려와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자신을 보며 흐느끼는 아들의 눈물에서 ‘진정한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때, 일리치의 생명이 아닌, 죽음이 끝난다.            

 





다시 롱 패딩으로


'유행, 대세, 다수가 선택한 삶의 방식, 큰길'과 같은 표현은 결국 '롱 패딩' 유행에서 볼 수 있는 한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롱 패딩은 그저 한 예일뿐이다. 더 큰 주제는 '소비'다. 롱 패팅에서 구두, 가방, 시계, 스마트한 가전제품과 (스마트) 폰, 비싼 자사고 쇼핑, 자동차, 그리고 아파트까지 소비의 대상들이다. 현대인은 일리치처럼, 아니 판사인 일리치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자신과 자신의 삶을 소비로 꾸민다. 그 꾸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자신의 본성보다 돈으로 산 소유물을 더 중시한다. 이게 소위 소비주의 문화다. 이 문화가 은밀히 강요한 대로, 남들, 다수, 혹은 좀비처럼 '비 진정한 선택을 하며, 혹은 나쁜 신앙'에 사로잡혀 산다. 이런 획일적인 방식의 삶을 살다 보니, 고통받고 있는 타인에 대한 동정(sympathy)과 그들의 자유를 확대해주려는 우리의 의지는 점점 작아졌다. 심지어 이젠 이런 의지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 같기도 하다. 거기다, 소비주의 문화에 사는 현대인은 소비와 그 소비 때문에 빚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는 소비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외면한 채 소비가 일으킨 빚을 갚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한다. 결국, '비 진정한 선택을 하는, 혹은 나쁜 신앙에 사로잡힌 그들'의 일원이 된다. 우린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실연당한 친구의 상실에, 가족을 잃은 부모와 형제의 아픔에, 재난과 전쟁 때문에 고난 겪는 이들의 아픔과 충격에, 공동체의 구조적인 악에 희생당하는 동료 시민의 울부짖음에, 그리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어 하는 내면의 소망과 절규에 눈 하나 깜작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차가움이 문화를 가득 채워 우리를 더 춥게 만든다. 급기야 그 차가운 문화를 살다, 이 차가운 문화에 비교할 수 없이 더 차가운 죽음을 맞는다. 누구도 예외 없이.........!






세 가지가 '없어' 행복한 성 소수자?


올해 8월에 영국 가디언이 매우 실존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본인 주장) 개인을 소개했다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7/aug/28/im-turning-40-without-a-partner-children-or-parents-and-im-free. 올해 40인 독신의 성 소수자다. 이 남자에겐 세 가지가 없다. 배우자, 자녀, 그리고 부모다. 물론,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건 그에겐 슬픔이었다. 이성애자든, 성 소수자든 40대의 남성에게 이 세 가지가 없는 건 어찌 보면 불행의 조건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결핍'의 남성은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가디언에 자신의 삶을 소개했다. 자신은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독자들과 자신에게 영감을 준 저자들과 즐겁게 소통하며 살고 있단다. 이 남자에겐 또래 남성들에겐 있는 것 중에 없는 것들이 더 있다. 자기 소유(사실상 대부분은 은행 소유)의 집, 자동차, 그리고 양육비 부담이 없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결핍이 같은 또래의 남성들이 하기 어려운 여러 일을 자신만은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대출이나 여타 빚의 부담 없이 여러 활동을 하며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월가를 점령하라! 란 시위를 비롯해, 카트리나 샌디의 피해자를 돕기 위한 활동, 퍼거슨이나 볼티모어의 흑인 저항 운동, 반 트럼프 시위' 등에 참여할 수 있었다. 로키산맥, 히말라야 산맥, 인도의 타지마할과 같은 세계의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37살에는 다시 20대처럼 대학 캠퍼스가 주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박사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없지만 외롭지도 않다. 친한 친구가 많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만난 수많은 연인도 있었다. 헤어졌지만 가까운 친구로 남은 옛 애인들도 여럿이다. 무엇보다, 여러 친구가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친 여동생이 죽음을 맞이하는 몇 주간의 과정에, 전쟁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요청에 직접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해줄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에 있는 기독교의 한 수도원에서 영적인 경험을 하기도 한다. 이 '결핍'의 남자가 해 온 '의미 있는' 여러 일은 '너무나 가진 것이 많은(?)' 같은 또래의 남성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일 수 있다. 결핍이 수많은 기회와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 냈다. 실존적인 선택이 만든 가능성과 자유다.


그렇다면 실존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현재 가진 것을 이 남성처럼 버려야 할까?  테드(TED) 강의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nzRvMsrnoF8 매트 커츠(Matt Cutts)가 현실적인 대안을 소개한다. '30일에 한 가지씩 새로운 것을 시도해라!' 예를 들면, 소중한 사람에게 손편지를 쓰는 것에서부터, 하루에 만 걸음 걷기, 자전거 타고 출근하기, 하루에 사진 한 장씩 찍기, 나만의 소설을 써 보기(퀄리티는 신경 쓰지 말고), 한 달 동안 커피, 설탕, 텔레비전 시청 끊기, 아프리카의 산을 등반하기, 30일 동안 하루에 최소 여덟 시간 이상의 숙면하기 등 어떤 것이든 새롭게 시도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시도는 작든, 크든 관계없다. 이런 시도가 여러분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크고 작은, 하지만 크기에 관계없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커츠는 그 비싼 테드 회의(TED Conference; 4박 5일 참가비가 만 달러 - 우리 돈으로 최소 천만 원 이상)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새로운 시도로 예상치 않은 일들을 우리 삶에 일어나게 할 수 있다고!   






누가 진정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인가? 판사 이반 일리치인가, 아니면 이 결핍의 40대 남성인가?


실존주의에서 한 개인을 가능성의 존재라고 했던가? 이 남자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 남들처럼 소비하지 않은 선택을 한 것, 그리고 자신만의 선택으로 자신을 정말 '개성 있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사는 사회의 제도와 그 제도의 구조적인 불의,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지 않고, 이에 저항하며 극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결핍의 남성은 게라심과 일리치의 아들처럼 소중한 사람의 아픔과 죽음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함께 해줬기 때문이다. 전쟁과 재난 같은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해줬기 때문이다. 수많은 무리 속에서 개성 있고 자유로운 자신을 만들자는 내면의 소리에 오롯이 응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본인의 자유보다 타인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그동안의 여러 선택이 그를 진정 '실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반 일리치와 이 결핍의 남자 둘 중에 누가 더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 누가 더 당당하게 죽음 앞에서 내 생명이 끝난 것이 아니고, '죽음아! 네가 끝난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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