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바꾸는 힘은 당신의 손끝에 있다!
세상은 그렇게 그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쓴 대로 그렇게
매번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존재한다!
내가 쓴 풍경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따뜻한 가을 햇살이 내 살갗에 닿는다. 의미 없이 분주하기만 했던 일상에서 자유로운 오전이다. 마음도 가볍다. 이런 여유를 누려 본 적이 한 참 만이다. 좀 더 이 여유를 누리고 가볍고 상쾌한 브런치를 먹을 생각이다. 지난 5년이 매주 새로운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인문학을 수강하는 우리 아이들의 학교 영어 시험을 대비하게 만드는 일까지 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다음이 론칭한 브런치라는 블로그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 글을 올리는 재미로 의미 없는 세상에서 나만의 작은 의미를 찾았다. 사실은 브런치가 주최한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에 당선돼 이런 오랜만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생일이 점점 반갑지만은 않은 나이다. 빼빼로 데이 다음날인 내 생일이 어김없이 2017년 올해에도 나를 찾아왔다.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에 난 사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여유를 내 브런치에 썼다. 올해 8월부터 11월 12일에 해당하는 나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썼다. 이렇게 쓴 글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쓰다'란 주제의 브런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알게 되고, 그 주제에 관해 글을 써 응모한다. 운 좋게도 그 글이 당선돼 호텔의 1박 숙식권을 얻게 된다. 그 호텔 이용권을 올해 가을에 찾아오는 내 생일에 활용한다는 이야기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 이야기처럼 실제로 내가 2017년 11월 12일인 오늘 한 호텔에서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즐기는 이 휴가는 석 달 전에 썼던 내 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에게 '쓰다'는 내가 원하는 혹은 꿈꾸는 미래에 관해 쓰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11월의 가을 햇살을 받으며 여유를 만끽하는 장면을 쓰면 실제 세계에서도 그 일이 일어난다고 믿고 그렇게 석 달 후에 내가 살 미래를 썼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작은 세상이다. 마치 소설이나 영화가 다양한 등장인물과 배우가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공간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쓰는 행위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또 하나의 작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꾸는 꿈을 '쓰면' 실제로 그 꿈이 이루어진다. 어떻게?
'쓰다'란 동사가 가지는 매우 개인적인 (?)깨달음
나에게 ‘쓰다’란 동사가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마법의 힘을 가진 바로 이 동사는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글 속에 잉태하게 만든다. 지구라는 시공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에겐 낯선 발견일지 모르나 소수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진실이며 과학적 사실 (?)이다. 한 인간이 자신이 소망하는 세계를 자신에 글 속에 쓰는 행위는 우리가 사는 세계보다 훨씬 작은 차원인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글을 담는 원고지에 또는 컴퓨터 화면에 내가 원하는 바를 써 내려갈 때 우리가 사는 거시 세계 안에 미시 세계 (micro-reality)를 만들어 내는 행위가 글을 ‘쓴다’의 물리학적인 의미라고 난 생각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 미시 세계 (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에 살게 된 또 다른 나는 결국 그 글을 쓴 거시 세계의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글에 쓴 것처럼 현실에서도 꿈이 이루어진다.
실제로 내가 쓴 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사례가 있다. 2017년 올해 1월 초에 브런치에 '생각공장이 꿈꾸는 새로운 대한민국' https://brunch.co.kr/@ntdntg/61이라는 글을 썼다. 시민이 정치 참여의 주체가 되는 방법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서 '시민 심사위원단 (citizens jury)'이라는 제도를 브런치의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시민의 정치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다. 이 글에서 그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한 예로 노후 원자력발전소의 사용연장 이슈를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재인 정부가 신고리 5, 6호기 원전의 건설 백지화 이슈를 결정하는 데에 시민 참여단 (citizens jury; 시민 배심원단 혹은 시민 심사위원단의 또 다른 번역이 시민 참여단)이라는 공론화 과정을 밟겠다고 최근 (2017년 8월 초 https://youtu.be/BlCyfr2b56U) 들어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담당자가 이름 없는 브런치 작가인 내 글을 읽었을 가능성은 솔직히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내가 쓴 글이 아니더라도 제퍼슨 센터 (Jefferson Center;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를 만든 연구소 https://jefferson-center.org/) 가 쓴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에 관한 글을 반드시 누군가 보았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이런 결정이 나왔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쓴'대로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리학적인 깨달음은 항상 자신이 과거에 글 속에 만들어 낸 세계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가 경험하고 나서야 찾아온다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이렇게 자명하고 공공연한 진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자신이 쓰는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 낸 미시 세계를 거시 세계 (macro-reality)에서 똑같이 살아간 수많은 위대한 지성들조차 ‘쓰다’의 이런 물리학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장 자크 루소,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앞서 언급한 위대한 인류의 지성들의 예다. 이들이 손으로 쓴 글 (정의롭고 공정한 민주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 특정 정치적 사건 (프랑스 혁명)과 여러 긍정적 제도 (복지제도)를 근대의 유럽이라는 시공에 실제로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쓰는 행위는 미래에 생겨날 물리적 세계를 잉태하게 만든다. 써서 공유하는 행위는 추상적인 생각을 퍼트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물리적인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글은 사상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쓰는 행위를 통해 글 속에 담긴 사상과 생각이 한 사회의 모든 제도와 법을 만들어 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그 법과 제도가 물리적 세계 즉, 그 사회를 지배한다. 새로운 사상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제도가 과거와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쓰는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지식과 사상은 미래에 피어날 물리적 세계를 위한 설계도이다. 건물을 짓기 위해 설계도가 필요한 것처럼 새로 생길 물리적 세계를 위한 설계도인 지식과 그 지식에 기반을 둔 깨달음은 한 인간이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런지 주요 언론사의 여러 주필이 광고비를 후원해 준 한 대기업에 지면으로 보답하겠다는 말을 했나 보다. 그 지면에 쓰인 글이 한 기업에 유리한 환경으로 즉, 물리적 현실인 시장을 그 기업에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그자들도 가졌나 보다. 어쨌든 최근에서야 나는 이러한 과학적 진실 혹은 깨달음을 얻었다.
'쓰다'의 물리학적인 의미를 공유하고 싶은 이유?
일명 브런치의 ‘쓰다’란 주제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알게 되면서 '과연 나에게 이 동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란 물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그 생각의 결과물이 바로 지금 이 글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발견을 뒷받침할 ‘쓰다’의 물리학적인 깨달음을 각자의 소중한 꿈을 가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지금 이 글을 쓴다. 거대한 제도와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왜소함을 느껴 개혁의 의지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좌절한 사람들에게 이 깨달음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 왜소한 한 개인이 '쓰는' 글이 갖는 막강한 잠재력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이런 깨달음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이유는 나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 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인문학을 연구해서 강의해왔다. 강의 주제는 주로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주요한 여러 제도에 관한 것이었다. 정치, 경제, 사법, 언론, 교육제도와 이런 제도를 인정하게 만드는 우리 문화에 관한 비평이 6년여간 진행된 인문학 강의의 주제였다. 위와 같이 필수적인 제도들이 현재 우리가 사는 매우 긍정적인 (?)사회를 만들어왔다. 'N포세대, 이번 생은 망했음, 헬조선' 등의 기타 등등의 우울한 표현들이 우리 사회와 문화를 가득 채웠다. 이런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정치, 경제, 교육, 사법, 언론 같은 제도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인문학 연구와 강의 주제는 당연히 이런 제도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안적인 제도에 관해 연구하고 강의하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의 제도에 관한 비평을 소개했다. 객관적으로 신뢰성이 있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다 보니 내 강의 내용에 청소년과 성인 수강생들의 상당수는 열렬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 열렬한 동의에 뒤따르는 질문이 나의 마음을 늘 어둡게 만들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의 지적은 타당하고 정의로운데 이렇게 적은 수의 사람들, 아니 힘없는 시민 한 명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여러 제도와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인문학 강의를 듣고 이런 감정을 느꼈던 분들과 똑같은 마음을 가졌던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분들과 한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다. 내가 공유하고 싶은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내가 글에 쓴 대로 실제로 현실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러니 정의로운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 낼 힘이 여러분의 손끝에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을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물리학적으로 설명해보겠다.
'쓰다’의 물리학적 의미에 대한 상념 - 상대성 이론의 관점에서
꿈꿔왔던 시공 (spacetime)을 쓴다!
내가 내 미래에 관해 한 이야기를 쓰면 지금 쓰고 있는 나보다 더 작은 차원이 우리 세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내 글을 통해 열린다. 그 미시적인 차원 (micro-reality)은 내가 미래에 관해 쓴 바로 그 글이다. 내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 또 다른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처럼 한눈에 다 보인다. 왜? 내가 그렇게 내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썼기 때문이다. 위의 단락 '내가 쓴 풍경'에서 그렸던 것처럼 2017년 8월에 그해 11월 12에 누릴 휴가에 관해 글을 쓰는 시작 (과거), 그리고 그 쓰는 행위의 결과로 11월에 호텔에서 휴가를 누리는 결말 (미래)이 8월에 썼던 그 글 속에 다 담겨있다. 그래서 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다. 마치 소설이나 영화처럼 등장인물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일생을 언제든 책장을 넘기듯 혹은 화면을 빠르게 돌리기를 통해 미리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 상대성 원리에서 말하는 4차원적인 시공 (spacetime) 즉, 블록 유니버스 (block universe)에서도 영화, 소설, 그리고 나의 이야기에서처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 상식과는 다르게 우리 인간은 3차원적인 물리적인 현실에 사는 것이 아니다.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이라는 차원 하나가 얽혀진 4차원의 시공에 산다. 이 4차원의 시공을 블록 유니버스라 한다. 시간이 공간과 독립된 물리적 개체로 그동안 우리의 상식 속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공간과 독립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계 아니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진 4차원의 물리적 현실이다.
그래서 시간의 특성은 공간의 특성과 다르지 않다. 시공의 본성을 이렇게 이해해보자. 내가 전진할 때 내가 지나친 뒤의 공간을 과거로,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공간을 현재로, 그리고 내가 나아갈 방향의 몇 발자국 앞을 미래로 가정해 보자. 내가 한 지점에서 출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뒷공간이 과거라는 시간처럼 내 기억 속으로 사라질까? 아니다! 그러면 내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몇 발자국 앞에 이미 존재하는 공간이 있는 것처럼 미래라는 시간도 내 앞에 던지어져 있지 않을까? 공간과 연결된 물리적 존재가 시간이란 사실을 전제하면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시간도 내 앞에 있는 공간이 지금 거기에 있는 것처럼 존재한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진 4차원의 시공인 블록 유니버스엔 과거, 현재, 미래란 물리적 시간이 공간과 함께 동시에 존재한다. 마치 아날로그 영화의 필름을 펼쳤을 때 영화의 시작 (과거),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중간 부분 (현재), 그리고 영화의 결말 (미래)이 그 펼쳐진 필름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영화와 현실이 같을까? 란 의심이 들 수 있다. 잠깐 영화의 본성에 대해 살펴보자. 영화는 사진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영상 즉, 동영상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눈에 동영상으로 인식되는 영화도 사진과 똑같은 정지화면이다. 그런데도 이 정지된 사진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매우 원시적인 시각 능력 때문이다. 인간의 눈은 1초당 정지된 사진 24장을 빠르게 연속으로 보여주면 그 정지된 사진 24장의 연속을 동영상으로 인식한다. 조금 더 생각의 범위를 확장해 보자. 좀 충격적일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나는 동영상으로 인식한다. 내 눈은 키보드를 때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고 있다. 분명히 나는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동영상으로 인식한다. 정말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행동이 동영상일까? 정지된 사진을 단지 연속으로 빨리 보여주면 동영상으로 인식하는 인간의 시각적 능력에 대해 이제는 한 번 의심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4차원의 블록 유니버스엔 정말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까? 한 편의 영화를 앞뒤로 돌려보거나 소설의 시작과 결말을 언제든 책장을 넘기며 주인공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일이 4차원의 블록 유니버스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일이 원래는 가능한데 우주에 존재하는 전체 물질의 겨우 4%밖에 못보는 시각적 능력을 인간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현실 (reality)의 본성이 아직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인간이 이런 인식능력의 한계를 미래의 어느 순간엔가 극복한다면 우리 인류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한 편의 소설과 영화에서 주인공의 태어남부터 죽음까지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쓰다’란 주제로 이 글을 '쓰는' 행위 때문에 나는 미래의 나와 내가 살아갈 세계를 볼 수 있다. 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는 '나'라는 등장인물이 사는 작은 세계다. 한 편의 소설이나 영화가 등장인물이 살아가는 공간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쓰는 행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동시에 존재하는 4차원의 작은 블록 유니버스를 창조하는 행위다. 내 미래에 관해 글을 쓰는 일을 통해서 만들어진 이 작은 세계에 나의 과거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 현재 (글을 다듬어 응모라는 순간), 그리고 미래 (어느 호텔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순간)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미시 세계에 존재하는 미래의 나 (2017년 11월에 호텔에서 한가한 아침을 즐기는)를 본다. 동시에 그 미래를 석 달 전에 쓰고 있는 2017년 8월이라는 시공에 존재하는 나도 본다. 그런데 잠깐! 이 작은 세계와 그 세계에 등장인물로 사는 또 다른 나는 거시 세계의 나와 그 미래에 같은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양자 역학으로 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쓰다’의 물리학적 의미에 대한 상념 - 양자 역학의 관점에서
내가 ‘쓰다’란 동작을 통해서 그렇게 창조된 미시 세계의 나와 그 현실 (나에 관한 이야기)은 지금 현재 글을 쓰고 있는 더 큰 차원의 나와 그 현실에 영향을 준다. 글을 쓰는 나는 2017년 대한민국이라는 4차원의 시공을 산다. 거시 세계 (macro-reality)다. 내가 글 속에서 나의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쓰는 행동은 지금 쓰고 있는 나 즉, 더 큰 차원의 나의 삶이 나아 갈 경로에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두 차원 속의 두 가지 버전의 나의 상관관계는 전자 (electron)의 얽힘 (quantum entanglement)의 현상과 닮아있다.
원자 (atom)내부에 존재하는 전자의 특성은 신비 그 자체다. 그 신비한 전자의 특성 중에 얽힘 (entanglement)이란 현상이 있다. 전자는 두 지점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두 지점 즉, 두 물리적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그 전자는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러니까 한 쌍의 전자가 다른 두 물리적 시공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한 쪽 전자가 측정되면 다른 물리적 공간에 연결된 그 전자도 즉시 영향을 받는다. 두 전자 사이의 이러한 상호 연관성을 얽힘이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점은 인간도 그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브런치의 '쓰다'란 주제의 프로젝트에 당선되어 멋진 호텔에서 브런치를 먹고 있는 상상을 하며 그렇게 글을 쓰는 행위는 현재 글 쓰고 있는 나보다 작은 차원을 글 속에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작은 차원에 쓰인 나의 미래는 결국 다시 더 큰 차원의 나 즉,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차원 (거시 세계)에 영향을 미쳐서 난 결국 브런치 '쓰다'란 주제의 프로젝트에 당선된다. 왜냐하면, 이런 ‘쓰다’란 동작을 통해서 생긴 두 차원 속에 모두 존재하는 두 명의 나 (two mes)는 전자처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결된 존재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전자의 얽힘 (entanglement)처럼 말이다.
다시 '쓰다'의 물리학적인 의미를 공유하고 싶은 이유?
'쓰다'의 물리학적인 나의 개인적인 깨달음이 브런치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때문에 일어났다. 2017년 브런치를 쓰는 무명의 한 작가인 내가 발견한 소중한 과학적 (?)진실을 나누고 싶었다. 누구와?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꿈꿨지만, 불의하고 거대한 제도와 압도적인 문화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순수한 영혼들과 이 깨달음을 혹은 희망을 공유하고 싶었다. 내가 속한 집단, 조직, 도시 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부조리함과 병폐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약하지만 의로운 사람들과 이 생각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젊은 장 자크 루소가 자신의 꿈을 담은 세계를 글로 표현했을 때 위대한 혁명이 일어날 18세기 말의 프랑스라는 물리적 세계 (시공)를 잉태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부의 공정한 분배에 관해 자신의 글로 썼을 때, 그 글은 부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진 20세기의 유럽이라는 물리적 세계를 잉태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마음에 소망을 담아 생각으로 쓴 그 미래도 특정한 시공에서 생겨날 것이다. 이렇게 창조된 현실 즉, 여러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 여러분은 그곳에서 꿈을 이룬다. 꿈을 이룬 작은 버전의 여러분은 그 작은 세계를 변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작은 세계와 그 세계 속의 여러분은 그 세계를 만든 거시세계와 그 속에 사는 현재 여러분의 삶을 미시세계와 똑같이 만들 수 있다. 불의와 갑질이 피라미드 구조와 같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계층구조의 각 층위에서 일상화되었다. 이곳에서 신음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살고 싶은 건강하고 정의로운 세계에 관해 꿈꾸고 그 꿈을 글로 써서 공유하자고 권하고 싶었다. 불의한 제도와 문화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 좌절하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사회에 대한 꿈을 우리 손으로 써서 서로의 꿈을 공유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우리가 그토록 꿈꿔왔던 그 세계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많은 이들이 들을 수 있게 외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내가 살아갈 세상은 내가 쓰는 대로 바뀐다!
바로 이런 깨달음 아니 어쩌면 이런 희망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마음에 생각으로, 종이에 연필로, 컴퓨터에 타이핑으로 혹은 스마트 폰에 손가락으로 여러분의 이상적인 세계를 쓰면 작은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 미시 세계는 곧 피어날 거시 세계의 씨앗이다. 여러분의 선하고 정의로운 꿈을 담은 글이 사람들과 공유될 때 여러분이 꿈 꾸는 세계가 피어나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널리 나누고 싶었다. 그러니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에 관한 꿈을 포기하지말고 계속 그 꿈에 관해 '쓰자!' 그 꿈을 서로와 공유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만들어지길 희망해본다. 우리가 다같이 꾸는 꿈은 곧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쓴' 나의 행동이 그리고 여러분의 '쓰는' 행동이 이런 문화를 만드는 작은 씨앗이 되길 소망한다. 물론 이 꿈도 방금 내가 썼기 때문에 곧 현실이 될 것이라 믿는다.
세상은 그렇게 그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쓴 대로 그렇게
매번 자신의 모습을 바꾸며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