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정치 (살림)의 주체 즉, 참여자가 되는 진정한 민주국가??
목차
1. 국회의원들이 개헌을 통해 진짜로 탐내는 건?
2. 그럼 개헌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
2.1. 시민에게 입법권과 법의 개정, 폐지의 권한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2.2. 시민이 예산안을 스스로 편성하고 심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2.3. 판사를 시민이 탄핵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어떻게?
3. 맺음말
1. 국개 (?)의원들이 개헌을 통해 진짜로 탐내는 것은?
보통 게임의 형세가 불리해지면 게임의 규칙을 바꾸자고 하죠? 헌법이 대한민국의 가장 근본적인 게임의 룰이다!
여당이 도저히, 어떤 수를 써도 다음 대선에서 정권을 재창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도 여당의 의원들도 다 알고 있다. 이럴 땐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 상책이다. 그 게임의 규칙이 헌법이다. 대통령 단임제를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물론, 대통령 중임제도 포함되지만 국회의원들이 원하는 개헌 방향은 전자다. 이들이 내세우는 개헌의 논거는 86년 체제가 2016년에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며 동시에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든다. 이 의원들이 어디선가 필자의 통찰인 '신념, 가치, 제도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나보다. 맞다. 제도에도 분명 유통기한이 있고, 그래서 개헌을 하긴 해야 한다! 근데 너무 좋아하지 마라! 권력을 니네들이 독식하는 개헌이 아니라 권력을 시민들에게 골고루 정의롭게 나누어주는 방향으로의 개헌해야 한다고 생각공장은 주장한다. 이들의 두 번째 논거인 '제왕적 대통령'은 필자도 좋게 보진 않는다. 평소에 비판해왔다. 일단 개헌을 외치는 이 개들은 근혜정권초기에는 제왕적 대통령 밑에서 온갖 특혜와 권력을 누리고 근혜가 힘빠지니까 평소 찍소리도 못하다가 이제 '제왕적'이란 매우 부정적인 단어를 대통령이란 직함에 갖다 붙여 버렸다.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이었다가 집권 후기에 힘빠지니까 '제왕'인가? 한 사람 즉,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은 당연히 나누어져야 한다. 개헌을 외치는 국개 (?) 의원 떼들은 대통령이 혼자 독점하던 권력을 지들이 다함께 나누기를 간절히 원한다. 대통령이 사고쳐서 힘 빠지니까 그 권력을 나누자고 난리다. 그래서 이들은 '개헌'이란 단어를 꺼내들었다. 이쯤 되면 동물 하나가 연상된다. 하이에나다. 근데 그래도 시민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고 권력에만 환장한 '그들'을 우리 정서에 익숙한 '?떼'들이라고 하자.
대통령에게 독점된 권력을 나누데, 그 권력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분산시키고, 국회가 가진 권력을 시민에게 나누어주고, 동시에 국회의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는 견제 장치를 시민에게 주는 방향으로, 사법부가 독점하는 법의 해석권한을 시민에게 나누어 주고 시민이 사법부의 판단을 견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회가 그 동안 아무 저항없이 입법권을 독점해 놓고 이젠 행정부가 가진 권력마저 지들이 가지겠다고 한다. 이제 게임의 룰 (헌법과 법률)을 정하는 데에서 시민이 낸 세금까지 날름 먹겠다는 거다. 마치 행정부 수반 즉, 대통령이 사고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부의 권력을 지들이 갖고 그나마 삼권의 독점에서 (헬조선의 아이들은 삼권의 독점을 삼권분립이라는 개사기로 학교에서 아무생각 없이 배우고 외움) 이권 (입법부와 사법부)의 독점으로 제도를 바꾸겠다는 거다. 이제 학교 교과서에서 삼권의 견제와 균형이 아니라 이권의 견제와 균형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사기치겠다는 의도다. 그러면서 그 이권 (interests)을 지들끼리 배터지게 챙기겠다는 말이다. 라임드립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재 국회의원의 다수는 여야 구분 없이 개헌을 찬성한다고 한다. 왜 그럴 수 밖에 없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의원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권한이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다수의 의원들이 지들끼리 짜고치고, 편가르고, 줄 잘서서 최소한 내각의 한 자리 (장관)를 차지하고, 운이 좋으면 정파들의 수장 노릇하다가 수상 (총리; 내치의 최고 권력자)을 하겠다는 소리다. 의원 내각제에서는 다수당이, 혹은 과반을 넘는 다수당이 없으면 소수 정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내각 (정부)을 구성하기 때문에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대통령 중임제는 국회의원들이 원하지 않는다. 지들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그나마 좀 정치인다운 소수의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두 번씩이나 하는 걸 눈뜨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성, 자질, 능력 등 그 어느 것하나 대통령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 최고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에게 의원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 같은 개헌은 정말이지 판타스틱한 제도다. 이런 식으로 개헌이 되면 시민은 그나마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한마저 국회에 뺏기는 거다.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선호하는 개헌방향은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쥐뿔도 안되는 권한마저 시민의 손에서 박탈하겠다는 거다. 이게 개헌을 외치는 자들의 짖음이다.
그래서 이분(?) 들이 생각하는 게 이원집정부제다. 대통령이 국방이나 외교를 맡는, 반면에 지들끼리 국회에서 뽑은 수상이 내치를 맡게 하는 제도가 이원집정부제다. 그래서 필자처럼 내각제가 최고 권력자도 국민이 뽑을 수 없는 제도라 비판하면 무늬만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은 니네들 (개, 돼지)이 뽑아! 수상은 우리 (국회의원)가 알아서 뽑을께! 그리고 필자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수상을 왜 니네들만 뽑을 수 있니? 라고 물으면 우리가 니네들의 표로 당선된 국민의 의사를 대변(?) 하는 대표잖아. 그니까 니네가 뽑나 우리 의원들이 뽑나 결국 니네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거야! 이게 대의민주주의 혹은 의회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이야. 그러면서 공부 좀 더 해야 겠네! 하고 기를 죽이려고 한다. 개수작이다. 국회가 국민의 이익을 그렇게 잘 반영했다면 근혜정권의 청부 입법이나 이 청부 입법을 가능하게 하는 토나오는 정경유착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벌 2세들에 비해 시민 다수는 국회에 접근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이 시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말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만한 개소리다. 이런 말은 개소리기 때문에 개들도 웃을 수 있나보다. 최근에 새누리당의 채 5% 도 안되던 대선주자였던 분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며 박근혜 정권의 부역의 책임을 어느 정도 지며 개헌에 앞장서겠다는 대표 개소리를 한 적이 있다. 이 대선 불출마 선언은 사실상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한 수상 (총리)출마 선언이다. 새로운 판을 만들어서 거기서 짱 먹겠다는 소리다. 대통령 될 가능성이 화성에서 산소 찾는 것만큼이나 희박해진 상황에서 잔대가리 굴려 가능성을 반전시키겠다는 잔머리 쩌는 아이디어다. 근데 어쩌나? 들통나서리! 그래서 이 글을 읽고 계신 생각공장의 브런치 독자들은 그 잔깨를 퍼트리고 폭로하시는데 앞장 서셔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살 세상에서 권력에 환장한 개들이 판치는 걸 방치하면 그 미친개들한테 우리와 우리자식이 물릴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진실을 알리고 확산시키는 것은 이들의 잔대가리와 사기의 관행을 막을 수 있을 뿐 만아니라 이런 행동이 깨어 있는 시민의 의무다.
2. 그럼 개헌은 어떻게 하는 게 좋아?
간단하다. 분권이다. 그래서 권력기관내에서의 분권과 그 분권된 권력을 다시 시민이 견제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삼권 즉, 행정, 입법, 사법부에 독점된 권력 (이 시끼들은 삼권의 독점이 아니고 삼권의 분립을 통해 서로 견제와 균형이 가능하다고 우리를 초중고 심지어는 멍청한 정치학자들이 가르치는 대학에서까지 세뇌시켰다)을 시민에게 공정하고 정의롭게 나누는 방식에 대해서 소개해 보려 한다. 민주주의는 독점된 권력을 시민에게 공정하고 정의롭게 분배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렇게 공정하게 분배된 권력이 시민에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교육, 의료, 주거, 고용, 노후, 복지 혜택을 어떻게 얼마만큼 받아야 하며, 이런 복지제도의 혜택을 입기 위해서 세금을 얼만큼 내야하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그리고 이 결정을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제도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다.
'위임'은 시민을 영원히 무력한 노예로 만든다. 이게 대의 민주주의의 생얼이다!
헬조선의 모든 문제는 시민이 스스로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규칙을 정할 수 없다는데에 있다. 문제는 이 규칙이 내가 세금을 어떤 종류로 얼마를 내야하고, 그 세금으로 복지혜택을 받을 건지, 아니면 기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으로 쓰여질 건지, 혹은 4대강 같은 토목사업이나 창조경제에 예산이 얼마나 쓰일지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담뱃값을 올려도, 누리과정 국고지원이 중단되도, 국정 교과서가 시민다수의 의견과는 무관하게 강행되어도, 사장의 쉬운 해고가 노동개혁이란 이름으로 통과되도, 국민연금 3000억원을 잃으면서 삼성의 3대 세습을 보장해주는 일이 벌어져도,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운 복지제도보다 말로만 창조적인 '창조 경제' 사업에 수십 조가 쓰여도 (물론 시중에는 순실언니와 그 친구들에게 그 돈의 상당부분이 흘러들어갔다는 설이 있다) 헬조선의 주인인 시민다수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이 정치인들의 독선과 오만을 견제할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니까 모든 헬조선의 원인은 대의민주제의 핵심 원리인 '위임'이다. 시민의 운명을 대표자인 국회의원을 뽑아서 결정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진지한 개인적인 대화는 커녕, 얼굴도 한 번 직접 본적도 없는, 손 한 번 안 잡아보고 그 국회의원 후보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바보같은 선택을 시민에게 대의민주주의는 강요한다. 심지어 친구도, 친척도, 심지어는 형제, 자매끼리도 돈 때문에 갈라서는데, 선거기간 동안에만 잠깐 얼굴 보이는 그 인간들 (국회의원)에게 우리가 일년에 최소 수백만원, 4대 연금까지 합치면 천 만원이 넘을 수 있는 세금을 정신나간 대통령 혹은 그 인간들 (쪽지로 자기 지역구에 예산 따가는)에게 맡기는 일처럼 멍청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생각공장의 시선 - 시민권과 민주주의 & 플라톤의 국가론이 추천도서라고?'란 글에서 대의 민주제의 귀족주의적 본성이 폭로되어 있음).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란 이름으로 혹은 '노동 개혁 입법'이란 이름으로 사장들이 자신들의 직원을 '저성과자' 등으로 낙인찍어서 쉽게 언제든지 잘라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을 통과시켜도 시민 다수가 이것을 막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투표를 통해서 그들에게 우리 운명의 결정권을 300명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에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니까 시민 다수의 운명과 생활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선거를 통해서 위임하라고 하는 대의민주제는 합법적인 사기꾼들의 dog 수작이다. 합법적인 사기다! 초중고 심지어 대학에서도 이런 대의민주제를 가장 현실적이며 대안이 따로 없는 가장 좋은 제도라고 가르치고 이걸 걍 아무 생각없이 외우거나, 혹은 자기 자신만의 독립적인 판단 없이 외우면 헬조선은 쭉 지속된다. 분명히!
2.1. 시민에게 입법권과 법의 개정, 폐지의 권한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법을 만들수 있는 권한이 국회의원에게 독점되어 있단 사실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 일단 문제다. 어린이집,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헬조선의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은 항상 다른 사람이 혹은 자신 보다 월등한 존재 (선생님과 교장, 원장)들이 결정하는 거고 자신들은 그저 그 규칙을 따르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 이후로 중등, 고등 교육을 거쳐도 이러한 멍청한 인식은 변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결과로 성인이 되어서도 직장의 규칙은 사주가, 국가의 규칙은 소수의 국회의원들이 정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거의 투표과정에 참여하면서 흐믓해 한다.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빌리면 투표날만 시민은 자유로우며 새로 선출된 대표는 말만 대표일 뿐이지 시민의 주인 (masters) 혹은 지배자일 뿐이다. 대의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손석희 사장이 말했던 (물론 손사장은 그저 책에서 본 걸 인용한 사람 중에 하나겠죠) 선거는 그저 새로운 지배자를 뽑는 우울한 날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지배 엘리트들은 이런 선거제도를 이용한 대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라고 학교와 언론에서 우리 애들과 시민을 세뇌한다. 이런 속임수 쩌는 교육제도와 언론환경에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살아왔다. 이렇게 헬조선에서 인간이 태어나면 이딴식으로 사회화와 세뇌가 진행된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진실'이 우리 뇌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채 잊혀진다: '자기가 속한 그룹이나 공동체의 규칙은 스스로 정한다!'.
시민입법?
민주국가의 주인은 자기 스스로 자기 공동체의 규칙제정에 참여해야 한다. 입법부가 자신들이 독점한 입법권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의민주제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여러 제도들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개헌이 되어야 한다. 시민이 동료 시민의 서명을 받아 법안을 국회에 제출해서 국민투표로 그 법안의 가부를 결정하는 시민입법제도 (우린 이걸 국민발안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가 있다. 스위스가 이런 시민 입법제도를 실행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유럽의 국가나 미국의 여러 주단위에서 이런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런 제도를 반대하는 일부 정치학자들은 시민 입법 (국민 발안)제도가 실패한 사례로 캘리포니아를 들고, 반면에 스위스의 진보된 민주주의는 좋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우기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게 헬조선의 현실이다 ('생각공장의 시선 - 플라톤의 국가론이 추천도서라고?' 란 글에서 필자와 진보정치학자라고 코스프레한 노학자와 그 똘만이와 겪었던 일화가 상세히 기술 됨! 참조하시면 재미있을 듯). 어쨌든 시민 입법을 짧게 설명하면 전체 유권자수의 1~2%의 서명을 제한된 기간에 받아 시민이 원하는 법을 직접 의회에 제출하고, 이 서명을 입법부가 확인한 다음, 법안 발의한 시민 단체와 입법 전문가들이 위헌여부 등을 정밀히 고려해 법안을 정교하게 확정한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민 투표로 이 법안의 통과여부를 결정한다. 스위스 같은 나라는 국민 투표가 일년에서 3~4번 정도 정기적으로 시행된다. 국민 투표 비용 낭비를 걱정하실 수 있다. 4대강, 자원외교, 창조경제 등으로 들어 간 수 백조에 수 백분의 일도 안되는 돈이고 한 번 국민 투표할 때 한 이슈만 국민투표지에 기재되는 것이 아니고 한 기간 동안에 시민에 의해서 발의된 법들이 같이 기재되기 때문에 비용도 그리 많지 들지 않는다.
'시민주도'의 국민투표
입법부의 권력 독점과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환상적인 제도가 있다. '시민주도'의 국민투표이다. 두 가지 국민투표 중에 입법 폐지를 위한 국민 투표와 법률 개정과 폐지를 위한 국민 투표가 있다. 입법 폐지를 위한 국민 투표는 입법부가 국민의 의사와 이해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소수 특권층의 이익만을 위하는 법률을 통과시킬 경우에 시민들은 국민 투표를 동료 시민의 서명을 받아 시행할 수 있다. 소수 기득권층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 발효되기 전 즉, 입법 예고기간 (나라마다 입법 예고 기간의 길이가 다름)안에 국민 투표를 시행해서 이 법이 최종적으로 통과될지의 여부를 국민투표의 과반 찬성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입법 폐지를 위한 시민주도의 국민투표제 도입을 위한 개헌으로도 입법부의 권력 남용을 확실히 견제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소수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한 예로 다수의 시민들이 혐오하거나 찬성하지 않는 성소수자 차별 폐지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법률 개정이나 폐지를 위한 국민투표를 시민이 직접 주도할 수 있다. 동료 시민의 서명을 받아 소수자 그룹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위헌 소지가 있는 법률을 폐지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국민 투표다. 혐오 대상이거나 차별을 받고 있는 소수자를 위한 입법 활동은 국회의원들에게는 모험이다. 자기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하는 행동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거나 차별을 폐지하는 입법활동을 했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상당한 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없는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는 영원히 존중받지 못하게 되고, 소수자들이 차별 당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성소수자 차별 폐지를 위한 법을 한 국회의원이 발의하면 그 국회의원은 다음 선거에서 유권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특정 종교의 표를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의 폐지나 개정을 위한 시민주도의 국민투표는 이런 대의 민주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제도이다. 건강한 사회를 가늠하는 척도 중에 하나가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 그룹이 얼마나 평등하게 권리를 다수 시민과 똑같이 누릴 수 있느냐의 여부다.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은 이들의 안전과 재산권에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다. 성소자의 배우자가 죽으면 합법적으로 혼인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같이 산 배우자는 상속의 권리가 아예 없어진다. 배우자가 응급실에 실려가도 보호자로 인정되지 못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런 법적 차별 때문에 자기 배우자를 잃을 수 있는 위험에 까지 처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태어나 시민의로서 세금, 병역 등의 의무를 다 지면서도 모든 시민이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에서는 차별되는 매우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성적 소수자를 포함해서 다양한 소수자 그룹을 향한 다수의 편견 그 자체가 비정상적이고 다수의 의식 수준이 아직 멀었다라는 사실을 인증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인권 선언에는 인종,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에 따라 모든 권리에서 차별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 되어있는데 유독 대한민국에선 이런 인권 선언이 개무시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하긴 헬조선에선 이 정도의 일쯤이야! 머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필자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그나마 헬조선을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만들어보려는 작음 몸부림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법률의 보호의 사각 지대에 있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법률 개정과 폐지를 위한 시민주도의 국민 투표도입이 절실해 보인다.
2.2. 시민이 예산안을 스스로 편성하고 심사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행정부는 여러 권력을 독점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예산 편성과 집행에 관한 결정권을 독점한다. 매년 400조에 가까운 돈을 대통령 맘대로, 최소한 행정부 거의 맘대로 어디다 어떻게 쓸지를 결정한다. 이 예산의 권한을 중앙정부에게 독점시키는데서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이 예산이 세수의 기여도에 따라, 동시에 지방의 균형발전이라는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도정부에 분할된 예산은 다시 세수 기여도와 시, 군의 균형발전의 원칙에 따라 재배분되어야 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시장이 각 시의 예산의 편성과 집행, 그리고 시의회가 예산 심의하는 과정과 이에 따른 예산안 통과과정 모두에 각 시의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 단, 시정과 시의회에 참여할 시민 선발 원칙은 무작위의 방식이어야 한다. 4주 혹은 8주 지방행정과 의회정치와 관련한 정치 기본 소양 교육을 이수한 시민들 중에서 추첨되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시민의원으로 뽑힐지 몰라야 로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 정치에 참여를 원하는 모든 시민이 이 정치 기본소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은 주말에 이루어져야 하고, 이렇게 교육과정을 이수한 시민들이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시의회 의원수의 최소 3분의 1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 의회의원의 결정이 소수 이익집단이나 지역 이기주의 등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결정권이 없는 자문위원회를 두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정보와 지식에 기초해서 시민 의회 의원이 판단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은 시민의 정치참여를 장려하고 동시에 시민의 정치지능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런 방향으로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약간의 시행 착오와 단점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는가?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진화는 시민 스스로에게 자신의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돌려주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시의 살림 즉, 시의 예산 편성과 시의 예산 심의와 의결 과정에 시민이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참여는 정치에 관한 시민의 관심을 이어가게 할 뿐 만 아니라 시민의 정치 지능도 향상시킬 수 있다. 보너스로 시장과 시의회 의원에게 집중된 권력을 시민이 견제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시민의 정치 참여를 장려하는 노력이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시가 최우선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임무가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시민 심사 위원단 제도 (Citizens Juries)를 활용해 시의 전체 예산안을 성공적으로 편성한 호주의 여러 도시들이 있다. 캐나다 베이, 제랄드톤, 그리고 멜버른이 이런 도시에 포함된다.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 (Citizens Juries)?
부산, 경남지역에 있는 수명이 다한 원자력 발전소 가동 연장 문제를 필자 (사실 미국의 제퍼슨 센터의 시민 심사위원단제도다; Citizens Juries)가 제시한 시민 참여에 기초한 정책 결정 방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일단 부산을 대표할 수 있는 표본 집단을 무작위로 뽑는다 (원전 사용기한 연장은 사실 부산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집단의 크기는 15-24명 정도면 적당하다. 선정 기준은 연령, 성별, 거주지, 교육 수준, 소득 수준, 정치적인 성향 등을 골고루 고려한다. 이렇게 선정하는 이유는 이 표본 집단이 부산 인구를 대표할 수 있는 초소형 그룹이 될 수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시민 심사위원단이 구성되면 원자력 발전소 가동 연장의 문제에 대해 그들만의 능력으로 토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원자력에 '원'자도 평소에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시민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의 자문이 필요하다. 전문가 집단도 세 종류의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 첫 번째 전문가 집단은 원자력 발전소에 관한 일반적인 배경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중립적인 전문가들이다. 두 번째 전문가 집단은 원자력 가동 연장을 찬성하는, 그리고 반대하는 각각의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 이런 전문가집단의 이념적 성향은 분명하다. 그게 진보일 수도, 보수일 수도 있다. 세 번째 전문가 집단은 시민 배심원단이 첫번째, 두번째 전문가 집단의 설명을 듣고 토론을 시작하면서 필요해진다. 이 세번째 전문가들은 토론의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평가하고 토론 참가자인 시민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잘못된 지식이나 편견을 체크해주는 역할을 하게된다. 그리고 시민 심사위원단은 3일에서 5일 정도 함께 원자력 발전소 사용 연장 문제에 관해 학습하고 토론하면서 마지막 날에 최종 권고안을 스스로 작성한다. 그리고 이 권고안은 이 문제를 결정하는 정책 결정자와 지역주민 모두에게 전달된다. 그러면 정책 결정자는 시민 심사위원단이 충분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서 만들어진 권고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정책 결정권자는 그 지역 다수의 시민 반응 (시민 심사위원단의 권고안을 듣고 난 후)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시민 심사위원단의 '권고안'이기 때문에 정책 결정권자는 꼭 그 권고안대로 따를 의무는 없다. 하지만 정책 결정권자는 시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의 장점
시민 심사위원단 (Citizens Juries)제도를 실시하는 이유는 대의 민주주의의 대표성에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의사와 시민의 대표인 대통령과 국회의원과의 입장차이가 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고,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 (대통령,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이 자기들 맘대로 법과 정책을 통과시키고 집행하는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 시민 심사위원단제도를 통해서 시민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정책 결정자나 정치인들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가장 큰 장점 중에 하나는 여론 형성이 또 하나의 권력 기관이 된 언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 현실에서 그 동안은 언론이 주는 정보에 근거해서만 시민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권력 자체가 된 언론기관이 준 정보는 부분적이거나, 편향적으로 언론사에 의해 해석된 정보라는 데에 있다.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하에서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전문가 집단, 그리고 이념적 성향이 뚜렷한 전문가 집단, 그리고 토론 과정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평가하고 시민의 편견을 체크해주는 제 3의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얻어서 최종 권고안이 작성된다. 즉, 객관적인 그리고 깊이 있는 정보와 지식에 근거해 시민의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이라 말할 수 있겠다. 또한 단순한 여론조사보다 시민 다수의 의견을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시민 심사위원단은 무작위로 뽑혀지기 때문에 로비나 외부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깨끗한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가 실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시민들은 보너스로 비판적인 사고력 (판단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고, 소수의 권력자들과 그들의 전문가 집단의 속임수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된다. 보너스 하나 더! 이렇게 무작위로 한 지역의 표본 집단으로 뽑힌 시민 심사위원단에게는 그 회기 동안 급여가 주어진다. 급여를 제공하는 이유는 생계 때문에 시민의 권리 행사가 제한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이게 제대로 된 민주주의다! 이런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를 통해서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위임의 덫'에서 다수 시민은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이제 필자가 제공한 정보와 지식을 알리는 일만 남았다. 그 일은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몫이다. 많은 댓글과 좋아요 그리고 공유를 부탁드린다.
2.3. 판사를 시민이 탄핵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어떻게?
사법부는 권력에 따라 혹은 그 권력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판결이 바뀌는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권력을 가진 자의 눈치를 너무나 잘 살핀다. 그래서 대한민국 대법원의 정의의 여신은 다른 국가의 정의의 여신과는 다르게 안대를 착용하지 않는다. 너무나 뻔뻔하게 피고와 원고의 배경을 보고, 그리고 나서 힘센 쪽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겠다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헬조선에는 대략 3천 명의 판사가 존재한다. 이들이 판사가 되면 자신이 어떤 사회적, 정치적 계층에 속하게 되는지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느낀다. 5천 만 명 중에 3천명이면 헬조선 상위 0.006%에 속하는 지위를 갖게 된다. 법정에서 판사의 권위는 쩐다. 그래서 이들은 헬조선의 사회적, 정치적 계층구조의 최상부에 자신들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알 수 밖에 없다. 사법부의 중립성과 사법부의 견제 방식을 설명하기에 앞서 법철학 이론 하나 좀 어려워도 이해하고 넘어 가보자.
CRT (Critical Race Theory)란?
직역하면 비판적인 인종 이론 (Critical Race Theory)이지만 실제 의미는 법에 내재된 인종 차별적 요소에 대한 비판적 이론이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듯 하다. 1989년 위스콘신의 메디슨에서 CRT가 비판적 법 연구 (Critical Legal Theory; '생각공장의 시국선언 - 박근혜 최순실 및 개헌 관련)의 급진적인 해체로 간주한 것에 대한 반응의 한 형태로 유래되었다. 그럼에도 ‘정의’, ‘진리’, 그리고 ‘이성’과 같은 계몽주의적인 이상에 대해 비판적 법학 연구 못지 않게 상당히 회의적이다. 비판적인 법학 연구와는 다르게 CRT의 주된 요소는 법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CRT는 특권층에 속한 백인, 중산층에 속한 백인 학자들은 자신들의 관점으로는 법에 만연한 인종차별적인 본성이나 정도를 완벽히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종 때문에 직접적으로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무시를 경험했던 사람들만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인종적인 소수자들을 위해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CRT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의 형식적인 체계는 특권층의, 엘리트적인 다수의 현실을 반영할 뿐이라고 CRT는 주장한다. 각 사회의 엘리트만의 문화, 삶의 방식, 태도와 규범적인 행동이 결합되어서 법의 중립성에 대한 시민 다수의 동의가 형성된다. 엘리트들의 특권과 지위를 보호해주는 문화가 힘없는 다수의 시민 문화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말이다. 시민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가 시민 다수에 의해 아무 저항없이 받아들여지는 참 어이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종적 소수자들은 법의 주변부로 소외된다. 법에 내재된 인종 차별적 요소를 비판하는 이론 (Critical Race Theory)에서 인종 (race)를 사회, 정치적 계층 (class)으로 바꿔서 이 이론을 헬조선의 현실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특권층에 속한 판사들은 자신들이 항상 읽고 해석하는 법속에 특권층만의 이익을 대변하고, 다수의 힘 없는 계층을 차별하는 법의 요소들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까? 더욱 더 큰 문제는 특권층에 속한 판사들이 자신들이 즐겨 사용하는 법 속에 계층적 차별 요소가 숨어 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판사들은 자신들이 해석하는 법의 심판을 받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법이 실제로 어떻게 한 계층을 보호하거나 차별할 수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판사들은 이렇게 계층을 차별하는 법 체계가 중립적이라고 확신하는 단계에 까지 이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힘없는 다수의 시민들은 그 법에서 소외되고 차별 받게 된다. 법은 기존 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우리 인류는 평등한 사회, 정치, 경제적인 질서를 누려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종류의 사회가 가졌던 법체계는 결국 그 불평등한 제도와 계층사이의 권력관계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해왔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법 체계에서 소외되고 차별 받는 우리는 어떻게 사법부를 견제할 수 있을까?
탄핵이다! 우리 헌법 65조는 국회의원 재적 3분의 1이상이 헌법 재판관 및 법관의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으며 국회재적의원의 과반이 찬성하면 헌법 재판관과 판사는 탄핵된다. 물론 법관이 직무 집행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경우다. 이 헌법 조항도 물론 필자 맘에 들지 않는다. 대통령의 탄핵도 다수 시민의 의사가 외면 된채 부결되거나 본회의 상정마저 시도되지 못할 뻔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관의 탄핵마저 우리 시민이 스스로는 할 수 없다. 이것도 국회의원만이 할 수 있다. 정말 시민을 이렇게 중요한 정책이나 결정에서 소외시키는데 있어 대의 민주제만한 것이 지구상에 또 있으랴? 필자는 교과서의 주장과는 다르게 판사의 탄핵안도 시민이 직접 발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대법원과 정치인들은 판사의 판결권한이 침해되며, 판결이 여론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거품물고 지랄을 할 가능성이 99%다. 교과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도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 사실 필자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교육의 놀라운 세뇌효과 덕분이다. 교과서의 위력은 이렇게 대단하다. 비판적인 사고력 (판단력)에 있어 세계 최고인 필자도 잠깐 속았다. 한 발 물러나서 생각한다해도 법의 해석이 소수의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판단되는 것보단 헌법과 법률의 주인인 시민 다수의 판단에 근거해 법의 해석이 이루어지는 게 더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판사들은 법의 해석에 있어 소수 엘리트편에 설건지 아님 힘없는 다수이자 헌법의 주인인 시민의 편에 설건지를 결정해야 한다. 지금!! 그 동안 힘 있는 자들을 위해 판결을 내려 온 관행을 이제 힘 없는 다수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판결내려지기 위해서는 시민의 법관 탄핵 발의권을 보장하는 헌법으로 개정되어야 한다. 필자는 노동자의 헌법적 권리인 파업권보다 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더 가치있게 여겨 사장편을 들어주는 법관은 자신의 양심 뿐만 아니라 헌법 그 자체를 무시했기에 시민의 손으로 탄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검사장에게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을 준 회사 대표와 그 전직 검사장 출신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사도 탄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시민의 손으로! 선거 기간에 댓글을 달았는데 국정원법은 위반인데 공직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한 법관도 시민의 손으로 탄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시민주도의 국민 투표와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가 답이다!
법관 탄핵발의는 시민이 헬조선 국민 1%의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제출한다. 서명확인은 필수다. 국회는 이 탄핵 발의를 심사할 시민 심사위원단을 무작위로 선발한다. 물론 이 시민 심사위원단도 앞서 언급한 대로 대한민국 시민을 대표하는 초소형 그룹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에 제시한 선발 기준 (시민 심사위원단의 기준; 연령, 성별, 소득 및 재산, 교육, 정치, 종교적 성향, 거주지 등을 고려해서)을 충족시키면서 선발되어야 한다. 추첨으로 선발된 시민 심사위원단은 3종류의 전문가 집단의 자문을 활용하면서 충분한 시간 (3-5일)동안 한 의제에 관해 토론한다. 시민 심사위원단의 토론에 앞서 첫 번째 전문가 집단이 의제 (법관 탄핵안)에 대한 일반적인 배경지식을 시민 심사위원단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전문가 집단은 의제에 대한 찬성, 반대측의 논리를 각각 설명해 준다. 이렇게 두 전문가 집단의 설명을 듣고 시민 심사위원단은 그 의제에 관해 토론을 시작한다. 세 번째 전문가 집단은 토론 전체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한다. 토론이 객관적으로 진행되는지와 토론과정에서 시민 심사위원단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이나 편견을 체크해주는 역할을 세번째의 전문가들이 맡는다. 토론 과정이 마무리가 되면 시민 심사위원단이 최종 권고안을 스스로 작성해 국회와 시민에게 동시에 발표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충분한 정보와 지식에 근거한 집단 지성의 결과물인 권고안을 국회가 의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권고안만이라도 국회에 제출되 표결되거나 혹은 국민투표로 법관탄핵을 물을 수 있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헌법과 법률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판사들을 시민이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만 법관의 탄핵을 결정할 수 있게 만든 현행 헌법은 국민을 정말 '뇌가 없는 거대한 짐승'으로 생각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한 마디로 헬조선의 엘리트들은 시민을 '뇌'가 없다며 절라 개무시해 온거다. 하나 더! 사법부가 그 동안 워낙 자신의 임무에 충실 (?)했기 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란 상당히 유쾌한 (?) 표현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그래서 기존의 권력 관계를 유지하는데 활용되어 온 사법부에게 이참에 시민 다수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권력자이며 헌법의 주인인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사법부로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를 활용한 법관 탄핵이 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사법부가 현재의 권력구조를 계속 유지시키고, 더 나아가 그 권력구조로 인해 발생된 불평등과 차별을 보호한다면 정신나간 법관 하나가 아니라 사법부 전체를 탄핵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이 주인인, 그래서 추첨으로 선출된 시민 심사위원단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고급정보에 기초한, 그리고 편견이 여러 층위로 걸려진 집단 지성의 판단이 사법부를 완전히 대체해야 할 것이다.
3. 맺음말
삼권 즉, 행정, 입법, 사법부의 권력 독점을 나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이 권력 집단을 시민이 견제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가 우리의 새로운 헌법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시민입법 (국민 발안), 시민주도의 국민투표, 국민소환, 의제 발안으로 국회가 가진 권력을 나누고 시민의 집단지성이 입법부를 견제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시민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될 수 있는, 동시에 원천적으로 로비나 외부 영향을 받지 않도록 무작위로 추첨된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로 행정부의 독단적인 정책 결정과 집행에 시민이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 심사위원단의 최종 권고안이 고급 지식과 정보에 의해 작성되도록 하기 위해 3종류의 전문가 집단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 전문가들은 기본적인 자문과 토론 과정에서 편견을 걸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깊이 있는 토론과 그 토론의 결과물에 기초해 시민 심사위원단의 최종 권고안이 작성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시민의 집단 지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게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를 더욱 진화시켜야 한다. 물론 모든 정책 결정이 이런 식의 과정을 거칠 수는 없다. 논쟁적인 이슈 특히, 시민이 정치인에게 위임한 권력의 범위를 벗어난 결정을 선출된 공무원이 독단적으로 내리려 할때, 그리고 시민 다수의 안전 문제에 관한 주제들은 이런 시민 심사위원단 제도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민이 공동으로 소유한 기업을 민간에게 넘길 때 이런 중요한 문제를 선출된 공무원이 지맘대로 마치 자기 재산인양 민간에게 팔아 버리려고 시도할 때 시민은 이를 제지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고급지식에 근거해 형성된 여론 (시민 심사위원단의 최종 권고안)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4대강 사업 같이 시민의 환경에 직결된 문제이며, 논쟁이 격렬한 문제 역시 선출직 공무원이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문제는 아니다. 더군다나 엄청난 양의 국민의 혈세를 써야 하는 사업은 시민 다수의 정확한 의사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지식에 근거해, 그리고 편견이 걸러진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서 형성된 여론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선출직 공무원인 대통령, 도지사, 그리고 시장들이 가장 먼저 해야 임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중요하고 우리 돈을 엄청나게 써야하는 문제까지 지들 맘대로 하라고 뽑아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가진 법의 해석권한의 독점을 이용해 헬조선의 상위 1% 미만의 이익을 위해 법을 지맘대로 해석하는 판사가 있다면 전체 시민 1%인 50만명의 서명을 받아서 시민 주도의 국민투표로 법관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게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리고 발의된 탄핵안은 무작위로 선출된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민 심사위원단 절차를 통해 해당 법관 탄핵의 인용여부를 담은 최종권고안이 국회와 시민다수에게 제출되어야 한다. 그 권고안을 고려해 국회는 법관 탄핵안을 표결 해야한다. 물론, 그 최종권고안이 시민다수의 판단 자료로 역할을 하면서 법관 탄핵안의 인용, 기각여부도 국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한 방법이라도 새로운 헌법에 포함된다면 판사들이 진정한 헬조선의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민을 무서워할 줄 아는 판사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보수적인 사법부를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 교과서에 있는 설명이나 보수 언론이 쏟아내는 '여론 재판' 머 이런 표현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독자들은 재네들 우리 시민을 '뇌가 없는 거대한 짐승'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그 단어로 인증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삼권 분립, 견제와 균형 머 이런 교과서에 있는 얘기는 이제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 삼권 독점의 실체를 두눈 부릅뜨고 응시해야 한다. 삼권 분립이 아니라 삼권의 독점을 현재 우리 헌법은 보호하고 있다. 헌법의 주인은 시민인데, 실상 우리 헌법의 주인은 상위 1%의 헬조선을 해피조선으로 살아가는 '그들'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우리 것을 찾아와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바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헌법 1조 1항도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아니라 '모든 권력은 국민의 것이다'로 수정해야 한다! '~로부터'란 표현에서 '위임'의 개념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게 주인인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덫'이기 때문이다.
* 부의 집중해소를 위해서 '경제적 자유'를 헌법에 명시해라!
시민의 경제적 자유가 다음에 개정되는 헌법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부분은 필자의 글 중에 '생각공장의 시선 - 이재명 시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참조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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