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혜윰의 인생이란 감옥을 탈옥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
극단 혜윰의 '일분위 고독인'을 보고
연극 '일분위 고독인'은 외로움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는 사회가 배경이다. 이 사회는 고독을 계량화해 모든 시민을 십분위로 분류한다. 가장 외로운 사람을 일분위에, 가장 행복한 사람을 십분위로 표준화한다. 연극 '일분위 고독인'이 배경으로 삼는 사회는 복지 제도의 하나로 일분위로 분류한 시민을 십분위에 속한 가정에서 고독을 치유할 기회를 제공한다. 고독 일분위에 속한 아진이 십분위에 속한, 소위 사회가 행복하다고 인정한 십분위 가정인 유나의 집에서 외로움을 치유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대학을 휴학 중인 유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혼자가 된 엄마와 함께 살아간다. 유나의 엄마는 남편과 헤어지게 되면서 자살을 시도하고, 유나는 붉게 물들어진 욕조에서 ‘삶’이란 감옥을 탈옥하려는 엄마를 발견하고 가까스로 살린다.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엄마와 유나의 고통은 자라나기 시작한다. 자살 시도 이후에 생의 의지를 가다듬은 엄마는 어떻게든 딸과 함께 살아내기 위해 국가의 지원금을 받으려 재민을 아들로 입양한다. 재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고독 교류 시스템이란 제도의 십분위에 속하기 위해 재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재민의 입양은 유나와 엄마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재민도 점점 자신이 왜 입양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재민은 이런 불편한 진실을 묻고 엄마와 누나인 유나와 함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이렇게 해서, 유나의 가정은 국가의 고독 교류 시스템의 십분위에 속하게 되고, 고독 교류 시스템의 일분위에 속한 사람들을 치유할 기회를 제공할 자격을 얻게 된다. 이런 가정에 이 고독 시스템의 일분위에 속한 아진이 들어온다.
고독 일분위에 속한 아진과 십분위의 유나 둘 중에 누가 더 외로울까?
사회가 행복하다고 인정한 유나의 가정에 외로운 사람으로 평가받은 아진이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온다. 아진은 부모가 이혼하면서 혼자 살게 된다. 아진은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일분위로 분류된다. 하지만 사회의 평가와는 다르게 부모의 이혼으로 아진은 불행한 환경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에 고독 교류 시스템의 제안으로 '행복하다'고 공인된 유나의 가정에서 생활하게 된다. 지나칠 정도의 감수성으로 무장한 시인 아진은 유나 가정의 생존을 위한 친절한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유나와 가까워진다. 아진이 유나와 가까워질수록, 사회가 행복하다고 인정한 가정의 일원인 유나의 외로움이 두드러지고, 고독한 것으로 분류된 아진의 내적인 행복이 드러난다. 아진은 유나의 억눌린 외로움과 그로 인한 불행을 느끼면서, 유나에게 유나를 힘들게 만드는 상황 즉, 유나가 부정하고 싶은 유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유나는 위장한 행복 이면에 묻힌, 혹은 억눌린 자신의 외로움과 불행을 깨닫고 엄마에게 도움을 간절히 청한다. '치즈'라는 들고양이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지만 엄마는 치즈를 집에서 키우는 것을 반대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고독 교류 시스템의 십분위에서 강등될 수 있고, 이것은 국가가 유나 가정에 지원하는 지원금이 삭감되거나 지급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유나의 아픔을 유나 자신의 나약함으로 돌리고, 자신이 딸에게 주고 있는 불행을 자신과 딸의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설득한다. 사실상 설득이 아닌 강요였다. '유나 너를 위한 거라고!' 일분위에 속한 아진은 엄마와 유나의 고조되는 갈등과정에서 행복하다고 공인된 유나 가정의 민낯을 목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엄마가 생계 수단으로 입양한 재민도 추하게라도 살아내려는 엄마의 의지에 결국 폭발하고, 행복으로 위장한 유나 가정의 고통이 아진에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의지(Will to live)가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 쇼펜하우어 -
엄마는 자신과 딸의 생존을 위해 행복으로 위장한 자신의 가정에 재민을 끌어들인다.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엄마의 의지는 딸의 필사적인 몸부림, 혹은 삶의 의지마저 꺾어버린다. 엄마는 감춰진 고독으로 신음하며 들고양이 치즈를 자신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호소하는 유나의 간청마저 무시한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엄마의 살아남으려는 의지 자체가 역설적으로 유나와 본인 모두에게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가한다. 행복한 가정으로 공인된 유나의 가정은 사실상 고통의 사슬로 결박된 감옥이었다. 치즈의 아픔에 공감하며 살아내려는 유나의 필사적인 노력 자체가 엄마에겐 딸의 절규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한 고통을 주었다. 결국 자신과 유나의 생존을 위해 그 간청을 무시한 엄마의 선택도 유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유나의 생존 욕구가 둘 모두에게 고통의 근원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고통을 주는 자와 그 고통을 받는 자는 결국 하나였다.
생의 감옥에서 고통의 사슬로 결박된 유나의 선택은?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타르다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욕망(쇼펜하우어의 표현으로 생의 의지; Will to live)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욕망을 없앨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생의 의지'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고, 그러므로 고통의 소멸은 그 의지(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부정함으로 이루어진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통을 없앨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더는 살아갈 의지 자체를 잃어 버릴 정도의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거나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인생의 본질이 고통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나와 타인의 고통을 없애는 즉,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방법으로 '금욕주의와 정적주의'를 제시한다. 금욕주의는 말 그대로 '살아남으려는 욕구를 부정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정적주의는 '자신의 복지 혹은 안녕에 대해 근심하지 않으며, 타인이 자신에게 가하는 악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가난을 환영하고, 죽음을 시도하지도 피하려고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고통의 사슬로 구속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 유나의 선택은 엄마와는 달랐다. 유나는 '살아남으려는 의지나 욕망(Will to power or desire)'을 억누르기보다는 그 의지나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방식을 택했다. 그것도 고통을 주었던 엄마가 아니라 고통의 사슬로 묶여 있단 사실을 알게 해 준 아진과 함께. 고독 일분위에 속한 아진은 역설적으로 유나의 고통에 연민하며, 그 고통 속에 있는 유나를 구원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아진은 유나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 고통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라며 우월감을 느끼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나의 선택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유나는 동굴 밖을 보고 난 후 평생 동굴 안에만 살았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리려는 철학자를 혐오하는 대중의 일원처럼 나에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분위 고독인'을 쓴 작가의 의도가 이 연극의 홍보물에 들어가 있긴 하지만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이 땅에 남은 엄마와 재민은 '생의 의지'를 가진 채 살아 있다. 어디에?
비극의 장점은 운명 혹은 운명의 무지막지함에 대한 인간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는 데 있다. 주인공 유나와 아진은 안타깝게도 생을 다하지 못했다. 유나와 아진의 떠남 혹은 탈옥을 지켜본 엄마와 재민은 살아남았다. 여전히 '너를 위해'를 읊조리는 엄마가 쳐 놓은 고통의 감옥에 본인과 재민은 갇힌 채로. 연극 '일분위 고독인은' 비극의 장점을 충실히 우리에게 보여줬다. '삶의 의지를 완전히 없애버린 유나와 삶의 의지를 여전히 가진 엄마와 재민 중에 누가 더 비극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극단 '혜윰'은 순우리말이란다. '생각'이란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극단 혜윰은 비록 완전하지 않았지만 '일분위 고독인'란 연극을 통해 생의 비극적 본성과 그 비극적 상황에 부닥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을 탐험하는 시도를 한 것처럼 보인다. 혜윰의 이런 시도가 더 깊어져 우리가 엄마와 유나를 고통의 감옥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현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시작이 되길 희망해 본다.
* 생각공장을 깊이 있는 생각으로 초대해 준 창작 극단 ‘혜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위의 이미지는 극단 혜윰의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