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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Nov 06. 2018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

자유의지: 내 선택은 정말 내가 결정한 걸까?








나는 얼만큼 내 삶의 주인일까?


연지아 작, 연출의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은 사이 좋은 두 아파트 경비원이 겪는 설움을 그린다. 경비원 이 씨와 김 씨는 서로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주는 친구이자 직장 동료다. 하지만 이 아파트에도 CCTV의 도입으로 이 씨와 김 씨 중 한 명은 곧 아파트를 떠나야 한다. 이 둘 중에 누가 떠나야 할지는 아파트 입주자의 투표로 결정된다. 이씨는 자신보다 입주민의 입장과 요구를 먼저 생각하는 ‘좋은 게 좋은 거지!’란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조금만 날이 어두워져도 눈이 침침해져 불편해한다. 하지만, 전기세에 대한 입주민의 불평이 싫어 늘 정해진 7시가 돼야 가로등을 켠다. 반면, 김 씨는 이 씨에게 그렇게 눈치 보며 살지 말라며 늘 쓴소리한다. 내부 고발자로 회사에서 쫓겨난 전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고의 두려움 앞에서 투표함을 바꿔치기하여 친구인 이 씨를 배신한다. 이런 배신은 암으로 투병 중인 아내의 병원비를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이 씨도 모친의 임플란트 비용, 취업에 실패해 결혼 못 하는 아들 등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씨는 입주민에게 바른 말을 하는 김 씨가 더 많은 표를 얻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해한다. 스토킹을 당해 이 씨 본인에게 도움을 요청한 최양 마저 자신이 아닌 김 씨에게 투표한 사실에 망연자실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씨는 결국 앞서 김 씨가 했던 대로 투표함 바꿔치기를 시도하지만 이내 투표함을 제자리에 돌려 논다. 최양을 스토킹하던 남학생이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극은 점점 위기로 향한다. 이 씨는 최양을 도와야하지만, 스토커의 요구를 거절하면 김 씨와 아파트 입주민 모두에게 투표함 바꿔치기 미수가 알려질 딜레마에 빠진다. 결국, 이 씨가 주저하는 사이에 스토커는 최양의 아파트에서 자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최양도 조사를 받게 된다. 이런 일을 겪으며 고민하던 이 씨는 스스로 아파트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이 씨의 결심을 들은 김 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이 씨를 만류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김 씨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와 가책 때문인지 눈이 침침하다고 한다. 김 씨의 말에 이씨는 선뜻 가로등을 켠다. 아직 7시 전인데도 말이다. 입주민의 전기요금에 대한 불평을 듣는 것이 무서워 수년 동안 하지 못했던 행동을 서슴없이 하며 친구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렇게 스스로 그만두어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며.






혜윰의 생각 지도


일인이역으로 활약한 김씨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더 매력적이었지만 물론 이 극의 주인공은 이씨다. 이씨는 ‘좋은 게 좋은 거’란 인생관을 고수한다. 비굴한 정도로 자신을 굽히며 젊었을 때는 영업사원으로 은퇴 후의 삶을 누려야 할 노년에는 아파트 경비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씨는 평생토록 지켜온 자신의 가치관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혜윰의 연지아 작가가 밝힌 것처럼 이 극은 주체적인 삶(자유의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다른 여러 중요한 주제도 인물의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래서 연극을 보는 중에도 나에게 여러 생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극단 혜윰의 연극에 개인적으로 호감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이란 이 멋진 공연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이 부분은 글 후반부에서 다루겠다. 하지만 혜윰(깊이 있고 넓은 생각)의 공연은 혜윰이 생각했던, 고민했던 그 지점으로 관객을 초대해 준다는 매력이 있다. 생각공장이 창작극단 혜윰에 호감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혜윰이 자신의 공연에 생각공장을 초대해 주는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듯하다. 그래서 이 글은 혜윰이 고민했던 몇 가지 주제를 중심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생각공장이지만 혜윰의 생각이 미쳤던 그 낯익은 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 삶의 시작과 끝의 과정에 현재 내가 어디쯤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지점으로 나를 이끌었던 그 수많은 선택이 진정으로 내가 내린 선택이었는지를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식물의 자유의지와 인간?


현재 내 모습은 그동안 내 선택이 가져 온 결과물의 총합이다. 또 한편으로, 지금부터 내릴 여러 주요 선택은 미래에 내가 걸을 길을 결정하는 작은 씨앗들이다. 인간에게 선택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행동이다. 그러면 선택하는 주체인 나는 독립적인가? 일상에서 무엇을 욕망하고 소비할 것인가와 같은 작은 선택에서 직업이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중대한 선택에까지 나는 얼마나 주체적일까? 아니면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나에게 그런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 걸까? 즉, 인간에게 주체적으로 선택할 자유의지란 것이 있긴 한 걸까? 이 고민을 우리보다 앞서 니체가 했다. 니체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매우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얼마만큼? 식물만큼(B. Leiter, 2002, p. 81 & pp. 95-96).



식물의 운명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식물 스스로가 아닌 외부적인 변수가 결정한다.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지, 충분한 양분과 햇빛을 받을 수는 있을 건지, 그리고 나를 번식하게 해 줄 곤충이 많은 곳에 태어날지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식물은 벌의 날개에 붙은 자신의 꽃가루가 어느 바람에 날려,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 떨어질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인 나도 간디의 아들로 태어날지, 아프리카의 커피 농가에 태어날지를 꽃의 씨앗처럼 결정할 수 없다. 식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양분이 없는, 심지어 키 큰 나무에 가려 햇빛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환경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택지 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고 뿌리째 뽑힐 수 있다. 반면에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산 속에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이 충분히 비치고, 언제든 뿌리로 물을 끌어당길 수 있는 계곡 옆에 씨앗이 뿌려질 수 있다. 그러면 예쁜 꽃을 피워 더 다양한 곳에서 또 다른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식물이 할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서 꽃을 피우는 게 식물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다. 꽃을 피훈 후에 다음 생을 기약하는 거다. 인간도 식물처럼 내가 어느 지역에 태어날지 예를 들어,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나 예멘에 태어날지, 복지가 잘된 북유럽 국가에 태어날지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 주변 토양의 양분 상태와 적정한 일조량이 식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인간도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운명을 즉, 어떤 인생을 살다 어떻게 죽을지를 상당한 정도로 결정한다. 식물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꽃을 피우는 거다. 어떤 꽃일지가 중요할 뿐이다. 생각공장은 생각공장이 만들어 제안한 생각으로 꽃을 피워 생각공장이 걸을 길의 다양한 가능성(꽃)을 희망할 뿐이다.  






하이데거와 대머리?

 

20세기에 한 명의 철학자를 꼽으라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은 아마도 하이데거일 듯하다. 그의 나치당 가입 논란에도 그의 철학은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그 이후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 왜 하이데거가 국가사회주의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는가? 에 대한 물음은 다루지 않겠다. 혜윰이 끌어낸 생각 즉, 주체적인 삶은 어떠해야 할까? 란 고민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을 들어보려 한다. 하이데거는 주체적인 삶에 대해 이런 표현을 쓴다. 독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자신만의, 진정한'이란 표현이다. 주체적이지 못해 이 씨처럼 남의 시선과 기대에 맞추거나 남이 하는 선택을 따라 하는 삶의 방식이나 존재의 방식을 '그들 혹은 비진정한'이란 표현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2018년 한국에서 20대 남성이 탈모가 발생해 대머리가 된다고 가정해 보자. 대머리를 그리 달갑게 보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데이트도 해야 하고, 취업을 위해 면접을 봐야 하는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자신이 대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젊은 사람 중에 나만 대머리가 되진 않았을 텐데, 대머리를 가진 다른 사람들을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리고는 쉽게 가발, 모발이식, 모자 등등의 다양한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것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들이 취했을 아주 평범하고 대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머리가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 젊은이가 대머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바꾸려고, 혹은 자신만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리깡을 들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밀어보자고 권유하는 대머리 체험 캠페인을 벌이지는 않을 거다. 분명히! 하이데거는 전자의 선택 즉, 가발이나 모자를 착용하는 선택은 어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이런 선택은 내 운명에 대한, 혹은 삶의 선택에 있어 결정권을 '그들 혹은 남’에게 주는 것이라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선택을 존재의 비진정한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차라리, 대머리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고치는 일이 막막하고 무모해 보이지만 바리캉을 들고 다니며 대머리 체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자신만의 혹은 진정한' 존재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남들이 하는 대로, 남들이 나에 대해 기대하는 대로 내가 내 삶을 이끌거나 선택하는 건 사실상 '그들'이 내 운명을 결정해 그들이 걸어간 똑같은 길을 내가 걷도록 한다(M. Inwood, 2000, pp. 23-8). 하이데거는 계속 이렇게 선택하다 보면 진정한 나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거기다 어느샌가 죽음이 내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누구였는가? 를 스스로 물을 때, 나는 '내'가 아니고 '그들'이었다고 말할 운명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존재 방식의 다양성에 대한 가능성'이라고 한다(M. Inwood, 2000, pp. 22-3). 하지만, 내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들 혹은 남들'이 하는 대로, 혹은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내가 선택한다면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수많을 가능성 중에 나는 그저 남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인간 존재의 특징인 '다양한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니체가 말했던 '그나마 꽃이라도 피워 다음 생에서 수많을 가능성을 꿈꿔 볼 자유’마저 잃게 될 것이다.    






문화가 강요한 가치와 규범이란 끈에 매달린 꼭두각시는?  


지난 세기 문화학의 핵심 연구 주제 중 하나는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 vs. 문화가 그 문화권에 속한 인간에게 특정한 선택을 강요하는가?' ‘인간은 어느 정도로 독립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문화는 한 인간에게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까지 선택을 조종할 수 있을까?’ 였다(J. Culler, 2000, pp. 44-5). 문화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와 그 문화가 정한 규범에 따라 선택을 한다고 한다. 문화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공교육을 받을 것인지, 홈스쿨링을 선택할 것인지, 결혼할지 말지, 아파트를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해 살지 말지에서부터,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해야 할지, 해외 여행을 갈 거냐, 심지어 햄버거를 먹고 콜라나 주스 둘 중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까지도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와 규범, 혹은 유행 등에 따라 선택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크 데리다가 이렇게 말했나 보다. '문화는 제국주의적이다!'(C. Belsey, 2002, p. 64). 문화는 그 문화 속에 사는 인간에게 자신이 정한 규칙과 가치, 신념  같은 것들을 따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유발 하라리란 이스라엘 출신의 학자가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 같다. 그냥 평범한 주장도 왜 베스트셀러 작가나 외국 지식인이 말하면 더 특별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근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8/sep/14/yuval-noah-harari-the-new-threat-to-liberal-democracy. 구글과 같은 검색 엔진, 페이스북과 같은 SNS,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쇼핑몰은 인공지능과 수많은 사용자가 거기를 이용하면서 생기는 개인정보들(구매, 검색, 게시물, 좋아요. 등)을 활용해 우리의 여러 측면의 성향을 파악한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좋아할 만한 상품과 서비스 광고, 특정한 정치, 문화적인 성향을 가진 여러 기사를 골라 우리 페이스북의 뉴스피드에 올려 준다고 한다. 하라리는 이런 거대 기업이 우리의 뇌를 해킹해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특정한 상품과 서비스를 선호해 사게 되는 것에서부터 특정한 정치, 경제, 문화적인 신념을 가지는 것에까지 우리 스스로의 선택보다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분석 도구를 이용한 기업과 정부가 조종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하라리의 가디언과의 최근 인터뷰에서였다.






이 씨는 실존적인(자신만의 혹은 진정한) 선택을 한 것일까? 아니면 상황에 몰린(또 다른 부류의 그들이 내리는 비진정한) 선택이었을까?


극의 결론부에서 이 씨는 가로등을 켜야만 하는 7시가 되기 전인데도 김 씨가 눈이 침침하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가로등을 켠다. 그동안은 상상할 수 없던 행동이었다. 이 씨는 그동안 가로등을 켜는 것마저 남들이 정한 시간이나 시선을 의식했다. 자신만의 진정한 선택이 아닌 남이 자신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러면서 이 씨는 이번에 가로등을 켤 때의 느낌은 그동안 가로등을 켤 때의 느낌과 다르다고 김 씨에게 말했다. 혜윰의 연지아 작가는 이 씨가 이번에는 진정으로 자신만의 선택을 한 것이고, 이 씨가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첫 순간이란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주체적인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에 첫발을 딛는 시도를 이 씨의 대담하고 도발(?)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려 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어느 정도까지 주체적인 선택이었을까? 주어진 환경에서 이 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자신이 해고될 상황에서 고작 가로등을 켜는 시간을 부담 없이 어기는 것이었을까? 입주자(최양)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 아무 생각 없어 예의 없는 십 대 입주민의 무자비한 복수와 같은 것이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그 아파트를 단순히 떠나는 선택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가 말한 ‘진정한 혹은 나쁜 신앙에 사로잡히지 않은’ 실존적인 선택이었을까? 나는 이 물음에 흔쾌히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2018년 대한민국이란 시공에 가장 약자 중에 한 계층인 아파트 경비의 비참한 상황을 소재로 주체적인 삶에 대한 혜윰의 물음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아파트 경비가 겪는 생활고에 더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 현실에 대해 도전하기보다는 그 현실을 떠나는 것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이 씨의 선택은 좀 아쉬웠다. 아파트 경비 노동자가 겪는 불안정한 고용 현실과 이에 맞서는 이 씨의 결단력 있는 선택과 행동을 이 연극을 통해 소개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씨가 자신이 겪었던 고용 불안정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아파트 경비 노조를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결말도 가능할 수 있었을 듯한데. 물론, 노조 가입률이 전체 노동자의 10% 내외인 헬조선에서 노조 가입률이 7-80%인 스웨덴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좀 아쉬운 결말이다. 혜윰의 시선이 우리 사회의 을도 못 되는 수많은 병이 왜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사회 구조적 문제에도 미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혜윰은 어쩌면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이 씨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 그저 식물처럼 작은(?) 꽃을 피우는 정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라고. 이 씨가 마지막으로 가로등을 켜는 그 선택도 하이데거가 말한 또 다른 부류의 '그들이 내리는 비진정한' 선택이진 않았을까? 스스로 가로등을 켰지만, 그 선택 또한 그다지 독립적이지 않은 선택이란 걸 강조하며 한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의 한계, 혹은 주체적인 삶의 한계를 드러낸 걸까?


영화나 연극을 한 번 보고 리뷰하는 건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극단 혜윰에게 생각공장이 리뷰하며 무지를 드러냈거나 연지아 작가의 의도를 오해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바란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건 관객의 권리이기도 하니까.















* 창작 극단 혜윰이 '가로등을 켜는 순간'에 생각공장을 초대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 이글의 사진은 창작극단 혜윰의 것임을 알린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Culler, J. (2000), ‘Literary the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nwood, M. (2000), ‘Heidegger’,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Leiter. B. (2002), ‘Nietzsche on Morality’, Routledge Philosophy GuideBook (London: Routledge).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8/sep/14/yuval-noah-harari-the-new-threat-to-liberal-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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