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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Jul 19. 2016

생각공장의 시선 - 정치철학 편 2

먹고살기도 바쁜데 정치철학은 무슨?  2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극혐 했다고?
민주주의가 먼데?    






‘한 선단의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해 상상해 보자. 이 배의 선장은 배 위의 어떤 사람보다 그의 키와 힘이 세다는 이유 때문에 우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장은 신중하지도 않으며 매우 근시안적이다. 동시에 선장의 바다에 관한 지식은 매우 얕다. 이 배의 선원들은 각자 자신이 선장이 되어야 한다고 서로 논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선원들은 배의 조종을 전혀 배운 적이 없고 항해하는 법을 가르쳐 준 자신의 선생님 이름을 댈 수도 없으며, 훈련 기간을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전혀 항해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선원들은 모두 배의 조종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이 선원들은 배의 조종이 배울 필요가 있는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언제든 죽일 준비가 되어있다. 이 선원들은 이 배의 선장 주위로 몰려들면서 떼를 쓴다. 그 선장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배의 방향키를 맡기도록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때때로, 만약 이 선원들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른 선원들이 배의 조종을 맡으면, 이 선원들은 배의 조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이들은 선장을 약이나 술로 취하게 만드는 방법을 동원해 선장을 진압한다. 그리고 배의 통제권을 잡는다. 물론 이 배가 가지고 있는 화물들도 자기들 손아귀에 넣는다. 이러한 선원들은 술 취한 채로, 자기들 맘대로 배를 조종하게 된다.’


                                                                                                     플라톤, 국가론, p. 208

     








짓밟힌 플라톤의 핑크빛 로맨스??






상상해 보자! 플라톤이 2016 년 대한민국을 타임머신을 타고 자신의 민주주의에 관한 생각을 점검 차 방문한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푸른 지붕을 가진 집과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왕 그리고 이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돔을 가진 , 그리고 거기에 권력을 상징하는 레드카펫을 밟으며 출근하는 소위 정치인들을 만나 본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제일 호화스러운 푸른 집에 살면서 여왕 노릇하는 사람이 5천만 명의 시민들이 위임한 5천만 개 분량의 권력을 혼자 독차지하는 현실, 그리고 그 권력을 다 담아둘 수 없어서 혼자 집을 그렇게 크게 짓고 동시에 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엄청난 수의 좀비들을 고용한 상황을 보면 플라톤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질까? 이제 돔이 엄청 큰, 폭파 욕망을 유발하는 곳에 레드 카펫을 밟으며 출근하는 300명의 면상을 확인하러 플라톤이 방문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급실망일 듯하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의미에서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 (성적 소수자)인 플라톤은 남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있는 큰 돔이 맘에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돔에 도착하자마자 줄 지어 서있는 검은 에쿠스에서 검은 양말에 검은 구두를 신은 검은 발목이 묵직한 차 문 사이로 살짝 발을 내밀 때 느껴졌던 핑크빛 설렘은 그들의 늙고 추한, 권력의 욕심에 쩔어 있는 면상을 보면서 확 깰 것이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늙고 추했지만 잘생긴 청년 장군이 유혹하고 싶을 만큼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매력적이었지만 이들은 플라톤의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못 생겼으면서 자신들이 마치 배우인양 레드카펫을 밟고 우쭐 거리며 어깨에 힘주고 출근하는 그 늙은 남자들의 모습은 플라톤을 한 번 더 할 말을 잃게 만들 것 같다. 플라톤에게도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제 필자가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여왕과 못생긴 늙은이들이 마치 배우인양 힘주는 것 보면 사실 필자도 토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돔의 레드카펫을 밟는 이 배우들의 연기는 사실 저질 연기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연기에 넘어가는 것은 더 짜증 난다. 근데 플라톤은 사실 이 여왕과 짝퉁 배우들을 보면 자신의 이상적 국가에 관한 신념이 이 천년을 지나면서 어떻게 이렇게 까지 뒤틀릴 수 있는지를 보고 자기 입을 꼬매 버리고 싶을 것이다.








소수 엘리트 정치인의 권력 독점을 민주주의라고 세뇌시키는 학교와 무뇌 헬조선

- 세종 -






플라톤이 원했던 가디언들에 의한 국가 통치는 플라톤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와는 다른 대의민주주의라고 부르는 형태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인구가 적은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하다고 배웠다. 그리고 역시 이를 악착같이 아무 생각 없이 외웠다. 그리고  4 년마다  저질 배우들을 뽑는 선거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제도라고 배웠다. 4, 날수로 계산하면 1460일에  하루, 그것도 30분도   되는 시간만을 투표를 통해 정치 참여하게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다수의 시민은 눈곱만도 못한 권력을 소중하게 감사하며 행사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이게 민주주의라고 외웠기 때문에 정말 아무 생각이 없다. 다들 아시겠지만 민주주의는 영어로 Democracy이다. 고대 그리스어의 demos (people) cratos (rule)에서 유래한 말인데,  그대로, ‘시민 다수의 지배 의미한다. 물론  역시  악착같이 외웠다. 근데 이걸 배우는 우리와 이걸 지금도 여전히 외우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생들도 적어도  번은 이상하게 느꼈을 수도 있을  같다. 대한민국은 시민 다수의 지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인데  소수 , 푸른 기와집의 여왕과 짝퉁 배우들만 정치권력을 독차지하지? 이렇게 혹시 흐뭇한 의심을 가끔씩 하는 학생에게 선생님은  고민 없이 ‘직접 민주주의는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에서나 가능한 거야라고 답해 버린다. 역시 예상한 대로 대한민국은 뇌가 없는 동물의 왕국이다. 푸른 기와집의 그분을 모시기 위해서 전국에서 수많은 샘들이 습관적으로 충분한 고민이나 판단 없이 대답한다. ‘아무 생각 없이 자라주길이라는 교육 목표를 가진, 장차 미래에 아무 생각 없는, 그래서 돈을 통한 화려함만 추구하는 좀비 집단이  우리 아이들은 선생님이 걸어간 ‘생각 없음의  뚜벅뚜벅 걷는다. 이쯤 되면 필자의 눈에 분노의 눈물과 함께 연민의 눈물이  뺨에 흐른다. 일단 학교에서 듣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암기하는 역사적 사명과 푸른 집의 그분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우리는 그저 외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공정한 분배를 가리키는
한 표현일 뿐이다

 - 세종 -






민주주의는 시민 다수의 지배라는 문자가 가지는 의미도 있지만 더 크고 무거운 민주주의의 의미는 ‘소수의 정치 엘리트 그룹에게가 아니라 권력의 주인인 시민들에게 어떻게 권력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나누어 줄 수 있을까?’ 란 물음을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민주주의는 시민들과 장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표현이다: 어떻게 하면 법과 규칙을 만드는 권리와 예산에 관련한 결정권을 골고루 시민들이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평등하고 공정하게 권력을 나누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정치 형태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통해 더욱 진보된 민주주의의 형태에 대한 아이디어를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함의를 민주주의는 갖고 있다고 필자는 강력하게 우기고 또 우긴다. 민주주의를 청와대에서 살거나 여의도 의사당으로 출근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것이라고 외우는 것을 멈춰야 한다. 물론 2016 년에도 왕이 대통령으로, 귀족이 시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으로 코스프레하고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이것이 대의민주주의라고 외운 우리는 짝퉁 민주주의를 최선의 민주주의라고 믿으며 산다. 대안은 없다고, 아니 대안이 왜 필요한 거야?라고 물을 수 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권력은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상기시켜주는 표현이며, 상기시켜 주어야만 한다. 권력을 평등하고 정의롭게 나눌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단어로 민주주의는 학교에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이 연사 목에 힘줄 바짝 세운 채로 주장한다! 힘 줄 정말 섹시하다. 이렇게 섹시하다고 하면 앞의 내용 다 잊은 채 섹시한 힘 줄 만 또 외운다. 학습이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외우는 걸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인공지능 시대가 곧 온다. 이렇게 외우는 능력으로 그동안 특권을 누려왔던 우리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은 곧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투표 안 하는 사람을 idiot이라고 불렀다고?
그럼 멍청이로 가득 찬 헬조선??
     





근데 현대 우리 사회에서 경험하고 있는 소수의 귀족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철썩 같이 믿는 이유가  플라톤 탓이다. 너무 가혹한가? 그럴 수도 있다. 사실 플라톤이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이용한 19세기 영국 귀족 탓이다. 물론 당시 지식인들도 한몫했다. 그리고 이걸 철썩 같이 믿은 우리 탓도 크다. ‘옥스퍼드, 캠브리지, 서울대를 나온 훌륭한 애들이 시민 상대로 사기를 치겠어?’라고 생각하고 그냥 외우고 믿었다. 가짜 민주주의를 대의 혹은 의회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바꾸어서 이게 최선의 민주주의라고 사기 쳤는데 아무 생각 없는 우리는 그냥 믿은 거다. 그리스어 idiotes  말이 영어 바보를 뜻하는 idiot 의미하는데,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바보는 시의 공적인 문제 , 정치에 관심 없고 오직 자신의 가정과 사업에만 관심 있는 사람을 idiot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필자는 바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오늘  자리에서 내리고 싶다. 그냥 믿고 외우는 사람들이 바로  바보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외운 그들에게 상을 주고 서울대에서 가장 아무 생각 없이  외운 아이들을 받아 준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개천에서  용이라고 부른다. 얘네들은 서울대에 가서도 교수의 농담까지  받아 적으며 외운다. 외우는  선수다. 이런 애들의 특징은 선생의  빛만 봐도  외워야 하고,  샘이 원하는지 직감한다. 이렇게 초중고 대학이라는 공교육 과정을 통해  기술을 마스터한다. 장장 16년을 자기보다 윗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만 봐도 뭐가 중요한지 그리고 그분들이  원하는지를 아는 기술을 진짜  대로 마스터한다. 그래서  대학교 출신들은 기업에 가면 회사의 오너가  원하는지를 오너의 말투, 몸짓, 그리고 표정을 보면 담박 알아챈다. 정말 따라갈  없는 어메이징한 능력이다.   학교 출신들이 정부  부로 외우는 시험을 통과해서 고위직 공무원이 되면, 장관이 그리고 대통령이  원하는지 분위기만 봐도 직감한다. 정말 이런 기술은 넘사벽이다. 이게 우리를  돼지, 혹은 뇌가 없는 거대한 짐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기이다. 그런데 자기들도 따지고 보면 개다. 정말이지 한국의 교육은 여러 종류의 개를 길러내는 이상한 교육제도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 개판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관해 가졌던 반감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이렇게  사족을 붙이다니 정말 놀라운 세종 (생각공장 수석 연구원인 필자의 호다;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 ㅋㅋ)이다. 여기까지 정말 웃기려고 애썼다. 글로 사람을 우끼는  생각만큼 정말 쉽지 않은  같다.

     







플라톤이 말하는 졸라 착하고 동시에
졸라 똑똑한 정치인이
과연 지구에 존재할까??






어쨌든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앞에 국가론에 언급한 배의 비유를 들어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정치제도라고 비난한다. 배를 조종할지 모르는 선원들이 그나마 바다와 배에 대한 경험이  있는 선장을 제압하고 배를 차지하는 상황을 민주주의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와 같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그렇때문에 플라톤에게 배로 비유된 국가바다와 항해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동시에 도덕성까지 갖춘 가디언(guardians)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가디언의 기준은 정말 쩐다. 왜냐하면 이들은 돈에 욕심이 전혀 없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술도 금잔에 마시지 말아야 하며 금과 같은 것들을 집에 두지도 말아야 한다. 가디언들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가져서는  된다. 가디언들은 철학 , 세상의 이치에 관해 그리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철학을 마치 영적 생활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공부해야만 한다. 가디언들에게 철학은 즐거운 의무이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훌륭한 가디언에 의해 국가는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렇게 훌륭한 가디언들에게 시민들은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고 플라톤은 믿었다. 선원들과 같은 무식한 폭도들이 국가를 운영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플라톤에게 용납될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아테네는 무식한 폭도들과 같은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였다. 이러한 형태의 민주주의에 의해 자신의 사랑하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다수 시민들의 무식함과 고집 때문에 죽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극혐  수밖에 없다. 이해는 된다. 나도 세종 (세계적인 종합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웃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필자가 생각해도 웃긴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어이없는 죽음이 플라톤이 가졌던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한다. 이런 사건을 직접 겪으면서 국가는 여러 면에서 탁월한 가디언(철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해는 간다.








폭도인 우리는 언제까지 정치에서 소외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플라톤이 죽은 지 대략 2 천년 후에 영국의 귀족들이 난 데 없이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타난 생각을 소환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을 동원해 국가론에 나타난 플라톤의 민주주의에 관한 생각을 당시의 대중들에게 가르친다. 무식한 대중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제도는 위험하며 그렇게 때문에 자칭 가디언인 귀족들에 의해 혹은 귀족들이 후원하는 지식인들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대중교육제도를 통해 시민들에게 학습시켰다. 이때가 19세기이다. 근데 이 당시에 영국의 시민들이 귀족들에게 참정권을 요구하던 시기였다.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망할 민주주의’를 라고 내뱉으며 시민들에게 투표권을 마지못해 내어주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2-30년 전에 무슨 일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의 마음 한 구석에 두려움이 커가고 있었다. 이 무식한 시민들이 진짜 참정권인 입법권까지 달라고 하면 이것도 어쩔 수 없이 내어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영국 귀족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귀족들에 대해 무식한 대중이 가지는 유일한 장점은 머리 숫자였기 때문이다. 이때 귀족들이 법을 만들 수 있는 진짜 참정권인 입법권을 지키기 위해 이 천 년 전의 철학자 플라톤을 화려하게 부활시킨다. 19세기 영국 귀족들에게 플라톤은 예수보다 더 은혜롭고 반가운 구원자였다. 플라톤의 가디언 개념을 활용해 무식하고 이기적이라고 추정되는 시민들의 정치에 관한 접근권을 당시의 귀족들은 완전히 제한해 버렸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배의 비유는 설득력이 상당히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귀족과 그들의 개인 지식인들이 플라톤이 극혐 했던 민주주의에 중우정치 (mobcracy)라는 딱지를 붙여버렸다. 민주주의의 진화를 가로막아 왔던 논리인 이 중우정치 즉, 폭도들의 지배라는 딱지는 매우 강력한 논리로 우리의 뇌 속에 쳐 박혀 여전히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 맞다. 우린 귀족들에게 무식한 폭도이며 개, 돼지이다. 개, 돼지에게 정치를 맡기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참 동물이 여럿 나온다!    







     









난 졸라 착하고 졸라 똑똑하다니까! 지랄해요!!






하지만 플라톤의 가디언 개념은 여러 가지 비현실적인 측면이 많다. 우선 플라톤이 말한 덕과 지를 다 갖춘 가디언은 우리 지구에는 별로 존재할 수 없는 유형의 인물들이다. 아마도 우리 은하계 어딘가에 이런 가디언과 같은 청렴하고 여자를 멀리하며, 그래서 자식도 없는 매우 선한 정치인이 한 두 명 정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엔 이런 정치인은 거의 등장한 적이 없다. 물론 등장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던 과장이 심한 위인전에는 등장한다. 플라톤의 가디언은 우리 현대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9세기 영국의 귀족과 그 귀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팔았던 지식인들은 이 가디언 기준에 한 참 못 미치는 인간들이었다. 근데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무장했던 귀족과 그들의 개인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가디언인 줄 착각했다. 아니다. 좀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를 속인 것 같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디언이라고 수도 없이 우겼다. 귀족들은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을 통해 자신들이 가디언이라고 대학이란 제도를 통해 우겼다. 시민 다수는 그냥 믿었다. 왜냐?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고 누가 말했다. 이 누구는 서양 사람들에게나 2016년 한국을 사는 1/5에 해당하는 인구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우린 잘 믿는 성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가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가짜 민주주의를 진짜 민주주의라고 믿으며, 사실 생각 없이 민주주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인 줄 믿고 산다. 정말 믿음이 좋다. 믿음은 정말 파멸과 비참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니까 내 밑에 평생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해 줄게! 오빠 못 믿니??
너 같으면 믿겠니??






가디언의 또 다른, 더 중대한 단점은 시민 다수는 죽을 때까지 가디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가디언의 존재 목적은 보호를 받는 사람들을 독립시키는 것이다. 근데 어찌 된 일인지 이 가디언들은 시민 다수를 독립시킬 생각이 없다. ‘그냥 죽을 때까지 자기들은 가디언 하고 시민 너네들은 내 밑에 있어!’라고 말한다. ‘내가 너네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너네보다 더 잘 알아.’ 마치 부모가 아이들한테 하는 식이다. 어려서부터 시민 다수는 집에서 부모라는 가디언들에 익숙해졌고 부모들 또한 교회에 가면 또 다른 종류의 가디언인 신부나 목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에서는 부모라는 가디언에 의지하고, 부모들은 집 밖에서 정치인과 종교인들이라는 가디언들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일을 아무 생각 없이 몇 천 년 동안 해 왔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가디언들로부터의 독립의지 자체를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또 심각한 문제는 이 가디언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플라톤이 말한 종류의 가디언들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권력과 돈을 탐하고 당연히 시민 다수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가디언들이었다. 이런 정치인들을 현대에는 마키아벨리언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건 오해다. 마키아벨리는 공익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말라고 했다. 근데 세속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정치인들에게 마키아벨리언이란 이름을 붙이는 행동은 마키아벨리 본인에겐 욕이다. 근데 자신들에게 오늘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마키아벨리언이란 이름이 붙여지면 한 사코 부정한다. 이런 정치인들의 반응은 마키아벨리를 두 번 죽이는 행동이다. 사실 세속 정치인들은 공부도 게을리하는 가디언들이다. 현대의 정치철학자들은 어차피 정치인들은 정치철학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칠 줄 모르는 정치인들의 시민사랑??
보호 vs. 지배??
     





여기까지 살짝 결론을 내리면 시민 다수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지배에 익숙해져 버린 거다. 플라톤의 가디언 개념은 독립보다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지배를 시민들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현대 사회의 위계 구조의 모든 층위에 지배가 숨어 있고 이것이 수많은 종류의 리더라는 이름으로 지배라는 부도덕한 관행을 숨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대신에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한 결정권을 나 아닌 누군가에게 맡기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학교 가서는 선생님께, 대학에서는 지도교수에게, 직장에서는 사장에게,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모두 맡겨버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다.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정치에 관심을 끄고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집착하면서 우리 삶이 왜 이렇게 힘들지 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여러 종류의 네모난 상자나 직사각형 프레임을 보면서 또는 술 마시면서 그 고통과 고민을 잊는다. 그리고 또 똑같은 갑질과 스트레스로 가득 찬 일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술과 네모난 상자, 그리고 그 상자 속에 참 종류도 많은 엔터테인먼트로 우리를 다시 마취시켜버린다. 서서히 끓는 주전자 속에 개구리처럼 외부세계가 주는 고통을 잘 도 참아낸다. 괜찮다. 우리는 우리를 마취시켜 주는 고마운 엔터테인먼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우리 귀족들은 대중을 사랑한다. 이렇게 저렴한 드라마와 쇼를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거의 공짜에 가깝게 제공한다. 정말 고마운 가디언들이다.      








고마운 가디언들의 다리몽둥이를 그냥??






근데 우리는 이렇게 고마운 가디언들에게 너무나 큰 신세를 졌다. 그래서 우린 이제 독립해야 한다. 우리도 염치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디언들은 계속 자기 밑에서 있으라고 한다. 아니다. 어떻게 염치가 있지 엔터테인먼트를 계속 공짜로 즐기고 우리 일을 정치 가디언들에게 계속 맡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일은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이제 가디언들에게 그동안 우리를 위해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해야 한다. 시민을 위해 선거 때마다 고뇌에 찬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뚜벅뚜벅 힘든 길을 가는 시장 후보, 도지사 후보, 국회의원 후보, 대통령 후보들의 짐을 은혜를 입은 우리 시민들이 다 같이 들어줘야 한다. 그래도 이 정치 가디언들이 그 힘든 길을 다시 걷겠다고 하면 진심에서 그들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야 한다.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도리가 아닌가? 우리 시민도 가디언처럼 분명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가디언들에게 혼자 지우게 하는 건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플라톤이 걱정한 중우정치 (mobcracy; 폭도들의 지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시민도 푸른 지붕 밑에 사는 그분보다는 적어도 더 현명하다. 물론 그분 밑에서 그를 섬기는 고위직 공무원들과 비교해도 별로 지적으로 딸리지 않는다. 물론 게네들은 서울대를 나왔다. 하지만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은 멍청하게 외우는 일과 강자의 눈치 보는 일을 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판단력이 좋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게네들도 생명공학, 나노공학, 인공지능에 대해 그리고 대마초와 같은 마약의 중독성에 대해 우리처럼 잘 모른다. 어차피 여왕을 섬기는 공무원들도 이러한 일에 대한 정책이나 법을 만들 때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고위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 전문가들의 지루한 의견을 듣고 우리를 대신해 결정이나 법을 만드는 수고를 우리는 이제 덜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대신 전문가들의 슈퍼 지루한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는 힘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제 정치인들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에게 그리고 푸른 기와집의 그분에게 쉼을 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누려왔던 네모난 상자가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를 그들이 즐기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제 그들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어야 한다. 그분도 이제 공무의 부담에서 벗어나 행복한 로맨스를 즐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염치가 있는 착한 시민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는 착한 시민들이다. 가디언들 뿐만이 아니다. 멘토라는 분들도 우리 사회에는 참 많다. 그분들도 이제는 쉴 때가 되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입 아프게 떠들었던 분들, 청춘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철새처럼 돌아다닌 분을 포함한 이 시대의 멘토들 다 쉬셔야 한다. 이제 그 힘들고 지친 입을 쉬게 해주자. 그래도 그 안쓰러운 그 입을 들고 나온다면 이렇게 말해주자. ‘쉬어!!’. ‘그래도 속으로 멍청한 저 대중은 우리의 입을 필요해’라고 생각하고 나와서 멘토라고 떠들려고 폼을 잡으면 우린 다시 말해 주어야 한다. ‘닥쳐!!’ 그래도 기어 나오면 그 입을 꼬매야 한다.

     















민주주의란 그저 국가 살림에 시민이
직접 참여함이다

 - 세종 -






     

그동안 정치인, 종교인, 멘토, 작가, 유명인사들이 나와서 자기들의 잘남과 선의를 뽐내면서 우리 시민의 일을 대신해 주었던 그리고 우리가  알아서  줄게 라고 말하면서 눈곱만큼도  되는 수의 인간들이 다수인 우리를 지배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민낯이다. 민주주의에 어떤 정해진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필자가 앞서 언급했듯이 권력을 모든 시민이 어떻게 균등하게 나눌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물음에 답하도록 시민들을 재촉하는 표현일 뿐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만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아니고 민주주의 제도도 역시 끊임없이 시민의 정치참여를 촉진시키는 방향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정치참여란 말을 이제 ‘살림이란 표현으로 바꾸어 보자. 경제적인 계층에 따라 각자 세금을 얼마를 내고,  전체 세금을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써야 하는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과정에 누구를 어떻게 참여시켜야 할지를 시민 스스로 정하는 일이 정치이며 국가, 지역의 살림이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어떤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지, 좋은 공항이나 고속도로를 이용하기 위해 정부가 기업을 운영해야 할지, 아니면 사기업이 운영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 그리고 시민들이  세금으로 만든 국가 기업을 민간기업에  , 정부가 이렇게 독단적으로 파는 행동이 적절하고 정의로운지를 따지고, 시민 스스로 이런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고, 이렇게 참여하는 과정에 더욱 공정하고 균형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할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필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시민의 정치 참여 방법은??






중앙정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지방정부에 나누어주고, 지방정부는 시정부에 권력을 나누어주는 과정을 거친 다음, 시의회에서는 정치 기본 소양교육을 이수한 시민들을 무작위로 추첨해서 지방선거로 당선된 시의회 의원수와 같은 수로 시의 예산 결정 과정에 시민의원을 참여시키는 방법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지능을 향상할  있고, 이렇게 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속된 무작위의 방식으로   많은 시민이 정치에 관해 교육을 받게 하고 시의회에 시민의원으로 참여시킴을 통해서 정치에 관한 계속된 관심을 이끌어   있고, 이끌어 내야 한다. 이렇게 가디언으로부터 시민을 독립시켜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삶에 영향을   있는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가질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있고, 만들어져야 한다. 필자가 제시한 방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으며, 아직 제시되지 않은 방법도 전국 오백만의 초중고 학생, 이백만에 이르는 대학생,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   진화된 민주주의 방법을 생각해 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시 왜 정치철학이 중요해??
  





앞서 이 글의 1부에서도 말한 것처럼, 로마의 정치인 세네카 그리고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대의 제도들에 대해 비판적인 판단을 가지지 못했었다. 정치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제도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주인인 시민은 법과 규칙을 정하는 일에 참여하라고 계속해서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정치철학은 감당한다. 또한 정치철학은 규칙이나 법을 따르기만 하는 사람은 바보이며 노예라고 계속해서 떠들어 준다. 정말 고마운 정치철학이다. 이 글 (먹고살기도 바쁜데 정치철학은 무슨?)의 2 부에서 우리 현대인들이 민주주의에 가졌던 인식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말이 안 되는 것이었는지를 정치철학이 또 한 번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아마 정치철학도 지쳤을 것이다. 18세기 장 자크 루소가 주장한 이래로 계속해서 정치를 소수에게 맡겨 놓고 관심을 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누누이 정치철학은 주장해 왔는데, 존 로크도 정치인들에게만 정치를 맡겨 놓는 일은 결국 우리를 사자의 입속에 쳐 박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는 이 말들을 계속 무시해 왔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정치철학적인 주장이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이상적인 생각들로 여전히 시민 다수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시민 다수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만드는 민주주의? 아직도 너무 이상적으로 들릴까? 반응이 급 궁금해진다. 생명, 나노 공학과 함께 인공지능의 기술적 혁신이 인간을 100세, 150세, 그리고 250세 까지 만들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정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주장은 그럴 수 도 있겠다 생각하면서, 시민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릴까? 만약 여러분이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이러한 진화된 민주주의 형태를 이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플라톤이 가졌던 민주주의의 극혐과 소수 정치 엘리트인 가디언에 의한 반민주적인 지배를 더 좋아하는 것일 수 있다. 여러분이 플라톤이 가졌던 민주주의의 극혐과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제 스스로 가디언이라고 자칭하는 정치인, 멘토, 종교인들에게 ‘닥쳐’라고 말한 다음, 그들에게 우리가 위임한 정치권력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되찾아 오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자칭 가디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이제 닥치고 너네가 텔레비전이나 보아라! 정치 즉, 살림은 우리가 하겠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 길고 지루하면서 잡스러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어떻게 하면 가장 정의롭고 공정하게 나눌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생각해내라고 요구하는 한 표현일 뿐이다. 민주주의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모든 규칙을 정하는 일에 시민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상식이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면 정치제도와 사회는 자연스럽게 건강하게 변할 것이라고!’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정치철학은 먹고살기 바쁜 상황을 여유롭게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해법이라고!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정치가 먹고사는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고!'

















Bibliography     

Oksala, J. (2013), ‘Political philosophy’, All That Matters (London: Hodder & Stough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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