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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Aug 03. 2016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편 2부

아이들에게서 의심, 저항정신, 그리고 창의성의 싹을 잘라버리는 방법?!








커리큘럼이 질문과 저항 정신 그리고 창의성을 짓밟아?!







커리큘럼이 답이다. 커리큘럼은 우리말로는 교육과정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교육과정하면 애매하니까 세종이 좀 쉽게 풀어보자. 학교에서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학생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교육과정이다. 여기에는 각 과목의 내용, 학교 수업의 운영 방식, 학교 운영 방식에 대한 아이들의 경험과 참여, 반의 운영 방식과 위계제도, 반의 일을 아이들이 나누는 일, 반장과 학교 임원을 뽑는 일, 시험과 수행평가 등의 모든 아이들의 경험이 교육과정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교육과정이 아무 생각없이 걍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학교에서 경험하는 아이들의 모든 경험은 교육부가 의도한 방식대로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국민을 개, 돼지로 생각하는 교육전문가가 이 교육과정을 설계하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말을 잘 듣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의심도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불의에 저항할 수 없게 또는 침묵하게 만드는지 정말 세심하고 꼼꼼하게 설계할 수 있다. 이런 교육 과정을 설계할 때, 소위 교육전문가 뿐만 아니라 발달 심리 전문가, 정신분석 등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다. 교육부 장관 그리고 이 사람을 임명하는 대통령의 역량과 신념에 따라 교육과정은 그때 그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헤드가 꼴통이면 교과과정도 아이들을 꼴통으로 만드는 교과과정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정치인을 똑바로 잘 뽑아야 한다. 입 아프지만 그래도 노파심에 이 말을 꼭 하고싶다. 교육과정 설계의 숨은 의도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예는 열나 많지만 구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만 들어보겠다. 반장제도, 시험제도 그리고 교과서의 선택과 그 내용이다.  

















임기가 긴 반장제도는 시민의 정치 지능을
계속해서 유아 수준으로 만든다

 - 세종 -







일단 반장제도를 운영하는 방식이 아이들의 민주주의와 권력에 관한 견해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학기를 반장 임기로 정하면 아이들의 정치지능을 계속 유아 수준으로 유지 시킬 수 있다. 사실 이런 반장제도를 경험한 한국 성인의 정치 지능이 거의 세살 수준인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이런 반장제도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폐해는 쩐다. 일단 정치의 무관심이다. 학급의 살림을 반장이나 소수의 임원들이 다 맡아 하게 되면서 나머지 다수의 아이들은 이 학급 운영의 세부적인 일들에 관심을 꺼버린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더 심각한 점은 반의 임원단에 들지 않은 나머지 아이들은 학급 일에 무신경해지고, 심지어는 무관심해도 된다는 생각에 공교육 기간 동안의 이런 반장제도를 통해 길들여진다. 반면에 반장을 일주일씩 돌아 가면서 맡는 방식은 아이들에게 반의 살림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서로 협력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다음주에 자기 차례가 오기때문에 현재 반장의 도움 요청을 무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학급의 운영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이런 반장제도는 앞으로 개, 돼지가 될 아이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스스로 정하고, 타협을 통해 갈등을 풀고, 그리고 공동체의 살림을 해야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우리 아이들이 생각하도록 교육받으면, 동시에 이런 참여가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의 자연스런 의무이자 권리라고 20년 가까이 공교육을 통해서 학습되면, 우릴 뇌가 없는 사나운 거대한 짐승이라고 부르는 개들에겐 거의 재난 수준에 가까운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개들은 많은 수의 시민들이 제발 정치에 관심을 꺼주고, 그리고 시민들이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두는 거, 또 맡겨야 하는거야! 라고 생각해주길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날강도 같은, 아니 생선 앞에 고양이처럼 우리가 싸구려 마취제인 엔터테인먼트에 취해 있는 동안 다 해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 날강도들에게 참 다행히도 시민들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이런 반장제도를 통해서 공동체의 살림은 소수가 알아서 하는게 효율적이고, 더 나아가서 공동체의 일을 관심 갖고 맡아서 하는 건 참 귀찮은 일이야! 라고 생각해버렸다. 반장제도를 이딴 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세종은 매일 목격한다. 왜?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썩었어, 국회의원 뽑으면 머해?,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 대의 민주주의가 그래도 최선 아냐? 정치에 관심 없어? 왜? 썩었잖아!' 시민들의 이런 정치에 관한 무관심과 혐오는 고의로 조장된 것들이다. 학교와 언론이 정치에 관한 무관심과 혐오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제도들이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 수록 시민들의 정치 지능이 향상되고 누가 우리의 편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반면에 시민들이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거고, 4년에 한 번 투표하는 것이 시민이 할 수 있는 정치참여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법은 국회의원이 만드는 게 당연하고, 기소는 검사만 할 수 있고, 판사만 법의 해석 권한을 독점하고, 행정부만 예산 계획의 결정권을 독점하는 게 선거제도를 통해서 합의한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면 이 날강도 같은 조폭집단에겐 천만다행이다.








정치에 무관심은 고양이에게 생선 정식을
진상함에 다름 아니다

 - 세종 -







세종 (필자의 호; 세계적인 종합지식인 ㅍㅎㅎㅎ)이 한국의 정치꾼들을 조폭이라고 부르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원래 국가란 것이 정치학 이론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참 고맙게도 걍 지킨다고 떠들어 댄다. 제대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세금은 조폭이 삥 뜯어가듯이 잘도 가져간다. 그리고 그 돈으로 우리 사회의 진짜 큰 형님들한테 갖다 바친다. 기업들이다. 국민 혈세로 공사 구간 담합해서 대기업 건설사에게 퍼주는, 자원 개발로 해외 기업에 투자했는데 정말 이상한 투자 결정이 이루어지면서 누군가는 분명 혜택을 보았을 것 같다고 많은 이들이 의심하고 있다. 이 두 사업만 해도 7-80조가 넘는 세금이 들었다. 매년 정부 예산 중에 기업의 연구 개발비 지원으로 수십조의 돈이 기업집단에 들어간다. 이 정도면 조폭도 동네 조폭이나 양아치 집단 정도가 아니다. 열라 큰 조폭집단이다. 이 조폭 집단 뒤에는 기업이, 앞에는 짖어대는 전문가라고 불리는 개들이 함께 한다. 상당한 힘을 가진 연맹체이다. 어쨌든 현재 형태의 헬조선 같은 나라를 민족국가라 하는데 원래는 도시국가가 먼저 출현했다. 인류의 문명을 좀 살펴보면 도시국가가 시민의 정치참여의 측면에서 훨씬 민주적이었다. 하지만 도시국가는 소규모였기때문에 큰 제국들의 위협앞에 쉽게 무너졌고, 이 때문에 도시국가들이 연합해 현재의 민족국가를 만들게 되었다. 도시국가의 민주적인, 그래서 시민 참여적인 정치제도가 스스로 타락해서 붕괴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규모가 작아서 현재의 민족국가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의 정치참여의 가치는 포기되고 중앙정부의 소수 엘리트들의 의한 권력 독점을 용인하게 된 게 지금 우리가 헬조선에서 겪고 있는 모든 불평등과 갑질의 근본 원인이다. 그리고 이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독점 자체가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가장 쉽고 효과 만점인 방법을 교육과정에 넣는다. 임기가 긴 반장제도다. 이 반장제도는 권력의 독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데에는 탁월한 수단이다. 그래서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서 길러진 시민들은 사실 민주적 시민의 자질인 권력에 대한 의심과 견제 그리고 저항정신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된다. 정치에 관한 무관심은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가 된다. 그들에게! 반면에 독재국가를 위한 백성의 자질인 정치에 무관심, 정치지능 장애, 권력에 복종과 순응, 기껏해야 뒤에서 욕하기 등의 자질을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착실하게 습득한다. 아니 체화한다. 그래서 아마도 여의도를 검은 에쿠스를 타고 주름잡는 조폭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잠깐!?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 왜 시민이 정치 참여해야하지? 너무 비효율적인 거 아냐? 아님 시민이 어떻게 정치참여 할 수 있는데? 라며 궁금해 하시거나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들은 세종의 또 다른 글, 생각공장의 시선 - 정치철학편을 세종 아니 생각공장의 브런치에서 읽어 보시기를 강추한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 도서를 읽어 보시기를 강추한다. 아주 유익하고 신뢰할 만한 학문적인 책이다. 그림은 거의 없고 글자들만 난무한다. 문자 성애자가 아닌 이상 사실 읽기를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세종은 참고로, 문자를 보면 흥분하는 문자 성애자이다. 커밍아웃했다. 머 상관없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창의성과는 전혀 관계 없는, 멍청하고 고분고분한 아이로 만드는 방법이 시험제도다. 한국의 학교는 시험을 참 좋아한다. 근데 거기다가 또 객관식을 참 선호한다. 그나마 요즘에는 서술형 문제가 있긴 하다. 일단 객관식 문제는 아이들에게 프레임에 길들이게 만드는 매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탁월한 능력은 여의도를 주름잡는 조폭집단들에게 매우 매력적이다. 선거 때마다, 주요 경제, 정치, 사회, 국방 등등의 이슈마다 시민들에게 사고의 프레임을 던져주면 시민들은 그 프레임 안에서만 사고한다. 객관식 문제는 5지 선다형인데 사실 이런 문제 형태는 셤을 보는 아이들에 5가지 선택지 중에 무조건 하나는 답이 있다는 생각과 함께 꼭 이 다섯 가지 선택지 중에서만 답을 찾게 만든다. 사실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 딱 정해진 어떤 답도 없을 뿐더러, 대부분은 타협과 갈등 조정을 통해 풀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사실 아이들이 푸는 문제들도 이상하지만 그 이상한 문제의 답이 어떤 때는 167번이 정답일 수도 있다. 근데 이 객관식 문제는 항상 그 프레임 1-5번 사이에서 답을 아이들에게 고르라고 한다. 이렇게 20년 가까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은 이런 생각의 프레임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여러 가지 정치적인 표현이나 수사를 접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종북, 노동개혁, 테러방지, 법치주의, 규제완화, 자유(무역), 등등의 용어들이 시민들의 사고를 한 쪽으로만 쏠리게 만든다. 이런 표현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생각과 태도를 만들어 주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런 프레임으로 길들이기는 시민들과 아이들에게 정치적인 지능을 바보수준으로 끌어내리게 만들뿐 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에도 재난 수준의 악영향을 준다. 창의성이 혁신을 만들고 혁신이 우리를 밥 먹여 주는데 이런 프레임에 길들어진 우리와 아이들은 혁신보다는 빨리 정답을 찾고, 남이 찾아 놓은 정답 예를 들면, 아이폰 같은 걸 빨리 따라 만드는 것만 잘 하게 만들 뿐이다. 혁신가 (first-movers)가 아니라 맨날 쫓아가느냐고 숨차 허덕이는 사람 (fast-follwers)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답만 찾는 눈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을
볼 수 없다  

- 세종 -








혁신을 만드는 창의성은 요렇게 정의된다. 상자 밖에서 사고하기 (thinking out of a box)다. 즉, 생각의 프레임 밖에서 사고 하는 것이다. 문제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관점을 다수와는 다르게, 그리고 기존의 신념과 가치체계 밖에서 보는 능력이 창의력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래서 남들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혹은 새처럼 프레임 위에서 보는 능력을 통해서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창의력이고 이 지적 능력이 혁신을 낳고 우리를 먹여 살려 준다. 근데 학교 교육은 프레임에 길들이는 객관식 문제 뿐 만 아니라 암기능력만을 압도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제도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정답 외에 어떤 것도 쳐다보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서 정답을 찾은 이후에 더 좋은 정답이 있는지를 찾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 아니 더 좋은 정답이 있는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적절한 정답을 찾는 시간에 다른 문제들의 정답을 외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이런 개효과적인 방식으로 시험을 대비해야 샘에게 인정받고 서울대가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탁월한 교과과정이다. 소수의 정치엘리트들은 프레임으로 시민의 눈과 생각을 한쪽으로 향하게 하는데 탁월한 뿐 만 아니라 빨리 따라오는데는 은하계 최고 선수인 중국의 기업들에게 한국의 기업들이 먹히게 만드는 데 또 탁월하다.








사고의 프레임은 한국 경제의 발을 묶는 프레임?

- 세종 라임 드립 -









이들에게는 공적자금이라는 눈 먼 돈이 존재한다. 사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이 돈은 여러분의 월급에서 매달 악착같이 빠져 나가는 돈이며, 여러분이 구입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10%에 해당하는 부과세다. 그래서 수퍼부자나 기업가들에겐 회사가 잘되면 좋고 망해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래서 이러나 저러나 사실 머 상관없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 사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천국에 가깝다. 부자들에게만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중국의 기업들에 여러 국내 산업이 먹히면, 개고생하는 건 시민 다수이지, 우리 사회의 귀족들은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IMF 이후로 시민들의 삶은 서로 무자비하게 갑질해야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피폐해졌고, 반면에 헬조선의 귀족들은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한국 사회의 위기는 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키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면 닥칠 수록 이들에게는 좋다. 되는 놈들은 멀해도 된다.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제도 등이 결국 귀족이나 권력자들이 이기게끔 설계되어 있다. 누구에게 헬조선은 천국이다. 귀족과 권력자들에게! 그래서 우리를 개돼지 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헬조선이라고 하면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헬조선은 그들에겐 그분이 계시는 천국과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죄를 지어도 사면되고, 잘못을 해도 검사들이 수사와 기소를 하지 않거나 약하게 기소하면, 설령 기소가 되더라도 전관 변호사를 쓰면 참 잘도 풀려난다. 무슨 된장하고 이름이 비슷한 로펌이 다 무죄로 만들어 준다. 능력이 쩌는 로펌이 있기 때문에 이 수퍼리치에겐 천국 맞다. 눈치 채셨겠지만 세종은 사족 대마왕이다. 어쨌든 시험제도가 천재적인 교육과정이란 사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프레임으로 시민 다수를 길들여서 효과적으로 다수를 지배하는데에 시험제도만큼 탁월한 수단은 아마 없을 듯 하다. 그리고 의심하고 질문하기 보다는 샘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해진 시간 안에 외우도록 하게 함으로써 독재국가의 시민 자질 중에 최고인 '고분고분'함을 한국의 개, 돼지에게 심어준다. 질문과 토론 보다는 암기를 최고의 지적 능력으로 생각하도록 셤 제도가 우리를 학습시킨다. 이렇게 교육과정에는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설계가 숨어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 (extension)일 뿐이다  

- 세종 -








마지막으로 교과서의 선택과 내용이 아이들에게 확실하고 강력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세종이 이 글의 참고 목록으로 주로, 아니 압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토마스의 교육 (2013)이라는 책은 영국 학교의 역사책 마샬 (Henrietta Elizabeth Marshall)의 ‘우리의 섬 이야기 (Our Island Story)’를 교육과정에 숨겨진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끄집어 낸다. 이 역사책도 2015-6년의 국정교과서 논쟁과 내용이 상당히 닮아 있다. 이 먀샬의 책은 한 마디로 영국은 야만의 역사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인류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진보의 역사였다고 자찬한다. 거의 찬양 수준이다. 근데 19세기면 영국이 전 세계에 못된 짓을 가장 악랄하게 저지르던 시기다. 중국과의 아편 전쟁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영국은 차와 실크의 무역에서 오는 대 중국 적자를 메꾸기 위해서 중국에 마약인 아편을 유통시키고 중국 황제가 아편 무역을 중지하려고 시도하자 전쟁을 일으킨다. 대영제국이라고 지랄했던 그 나라는 마약중개국이었다........개국 (a dog country)? 말 된다. 그리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영국 제국은 18세기에서 20세기 까지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살인, 강간, 약탈, 원주민 학살 등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잔인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위대한 영국이다. 필자도 어려서 영국 제국을 대영제국이라고 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위대한 나라로 배웠다. 그러면 위대한 대일제국이라고 배워야 하는데 또 그건 아니었다. 이런 역설적인 해석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세종은 참 영리했다. 젠장! 어쨌든 자국의 역사를 찬양 일변도로 혹은 전쟁 영웅의 스펙터클한 묘사로 역사를 기술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지배이념의 대표적인 예이다. 인류 역사는 항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문화였다. 소수에게 이 다수는 거대한 뇌가 없는 사나운 짐승이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예측 불가능이다. 지배하는데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다. 그래서 이 소수는 이 거대한 날뛰는 짐승을 항상 예측 가능하도록 길들여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젤 극혐하는 단어가 불확실성이다. 최근에 시장의 불확실성 머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을 거다.







지배와 불평등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것은
현재 (status quo)를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려는 의도다

- 세종 -







어쨌든 자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찬양 일변도를 가르치는 것은 현재의 권력 구조를 정당화시켜주는데서 그치지 않고 현재의 권력구조를 시민 다수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왜냐하면 사실 현재라고 하는 이 순간도 바로 이 순간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와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현재는 그저 과거의 연장 (extension)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 즉, 과거의 사건이나 권력구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건 바로 현재의 권력구조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과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과거를 인정하는 건 과거에서부터 소리없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동시에 현재에 소리 없이 쌓이는 모든 제도와 관행을 인정하는 것이고, 단지 인정하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를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성숙이라고 찬양하면, 현재 권력구조를 인정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결국 현재의 상태 (status quo)를 찬양하게 된다. 인간 사회의 제도는 즉, 지배의 제도는 너무 단단해서 왠만하면 깨지지도 심지어는 균열 하나 나기도 쉽지가 않다. 그 과거의 지배의 제도라는 거대한 벽은 지금 이 순간 현재에도 굳건히 서있다. 근데 이 굳건한 제도는 사실 어제의 제도였고, 그 어제의 제도는 1년 전의 것이었고, 그 1년전의 제도는 십년전, 그 십년 전의 제도는 삼십년 전의 제도였다. 이 단단한 제도는 시민 다수의 의심과 시민의 피나는 저항이 없으면 그냥 소리 없이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진행한다. 그래서 이 무거운 제도의 짓누름이 역시 이 순간의 우리를 그리고 미래의 우리를 계속해서 짓누를 것이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2016년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시키겠다는 의미이다. 과거의 제도와 관행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제도와 관행을 찬양하게 만들고 이 찬양을 통해서 미래까지 과거의 잔인하고 후진적인 이런 제도와 관행을 유지시키겠다는 권력자들의 의지를 가장 뻔뻔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지배와 착취, 불평등과 약탈, 살인, 전쟁 등으로 가득찬 약자의 눈물과 피에 의존한 역사이다. 이 역사를 긍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것은 그 약자를 그리고 그 약자들의 수많은 후손들을 두 번 죽이고 앞으로 태어날 우리 손자 손녀들, 증손, 고손까지, 그리고 영원히 그들의 눈물과 피를 쥐어 짜겠다는 소리다. 일본이 자국의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 미화하는 것만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우리나라의 독재와 착취의 역사, 불의와 기회주의가 승리한 역사, 그리고 이런 기회주의와 불의가 용서되는 역사에 대해 우리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 그 악독하고 교활한 지배자의 후손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와 우리 후손들을 지배하기 위해 역사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이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려 한다.








기회주의와 편법으로 승리한 소수의 역사는
다수가 흘린 피눈물의 역사다  

- 세종 -







이렇게 찬란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일 뿐이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짱이었던 아주 찬란했던 역사다. 근데 이새끼들이 짱 먹을 때 다수의 시민들은 눈물과 피를 흘렸다. 이걸 어떻게 찬란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나? 우리에겐 자학사관이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를 살인과 약탈로 쩔어 있는 일본과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처럼 꼼꼼하고 예리하게 기록해야 한다. 다시는 역사의 죄인들이 우리 사회의 전면에 뻔뻔하게 나올 수 없게, 우리의 눈물과 피를 짜냈던 그들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 할 수 없도록 철저하고 차갑게 우리 역사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아프고 힘들고 억울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서 다시는 가해자들이 우리가 언제 그랬냐? 하는, 심지어는 우리 때문에 니네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어! 라고 하는 개소리가 나오는 순간 사회에서 매장될 수 있게 역사를 아프지만 차갑고 예리하게 기술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만 하는 일이다. 갑자기 세종이 욱했다. 갑자기 숫자 하나가 떠으른다. 열여덟. 욱할려고 했던 것 원래 아니었다. 욱하다 보니 좀 먼데까지 왔지만 교과서의 선택과 내용 즉, 역사책의 선택과 그 내용은 대표적인 지배 이념의 하나이고 이 지배 이념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독재국가에서 말 잘 듣게 만드는데 그리고 현실의 불공정한 제도와 관행에 순응하게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현재의 불공정하고 불의한 역사는 어제부터, 그리고 한달 전, 1년 전, 십년전, 그리고 한 세대 전에서부터 내려오던 거다. 이 과거의 것들이 지금 우리 어깨 위에 소리 없이 앉아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과거를 긍정하는 것은 현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그 현재는 다수에게는 헬조선이다. 하지만 우리를 짓누른 그 제도와 관행 위에 올라탄 그들에게는 천국이다.














정리해보자. 학교의 교과과정에 있는 임기가 긴 반장제도, 시험제도, 그리고 교과서의 선택과 내용은 우리 아이들의 정치지능 장애와 이를 통해서 반민주적인 제도를 민주적인 제도로 착각하게 만드는 점, 시험제도를 통해서 우리 아이들을 창의력하고는 담쌓게 만들 뿐 만 아니라 프레임의 덫을 이용한 지배에 속게 만든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교과서의 선택과 내용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 자녀 뿐 만 아니라 손자 손녀까지 계속해서 영원히 과거의 불의와 폭력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논리적인 세종의 설명은 가히 쩔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필자인 세종은 욱했다. 욱할 수 밖에 없다. 이 숨겨진 교육과정이 헬조선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수단이다. 그러면 그들, 우리를 지배해왔던 즉,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우리를 영원히 지배하고 싶어하는 더러운 욕망을 보이는 그들을 위한 헬조선을 만들어서, 이 헬조선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교육철학은 있는가?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세종의 교육철학과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가 생각공장의 시선 -교육편 3부의 주된 주제가 될 예정이다. 궁금해 죽겠는가? 세종의 통찰이? 시간이 필요하다. 세종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소시민이다. 하지만 다음 번에 욱하지 않고 차분하게 세종의 교육철학과 그 구체적인 대안적 교과과정을 기술하려고 노력하겠다. 헬조선 최초 인문학 전문학원인 생각공장의 시선 -교육편 2부 끝!!!












Bibliography     

Thomas, G. (2013), ‘Educ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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