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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Aug 03. 2016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편 2 +

학교는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학생을 세뇌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주요 수단?!

Poststructuralism Ⅰ              

후기 구조주의 Ⅰ     

The Lecture Series in the Humanities delivered by Idea Factory on Jan 16, 2015     



'Eternal Man’ 불멸의 존재     

 In this respect, Mythologies indicates, our own historical moment is special. From the dirt that infiltrates our clothes to alien invasion, we have myths as never before. Why? Because the form of ownership that determines the nature of our society is bourgeois, Barthes says, and it is the particular property of bourgeois ideology to efface itself. There are no bourgeois thought police; no one votes 'bourgeois'; the bourgeoisie simply spreads its values everywhere without naming itself as a class at all. The press, the judicial system, cookery books, weddings, and comments on the weather are all silently and anonymously informed by the representation the bourgeoisie transmits of the relations between human beings and the world. This understanding of the way things are is so pervasive that it comes to seem like a law of nature, and its hero is 'Eternal Man', a classless (and generally male) figure, who recognizes his own ideals in the norms of good sense and good taste that prevail at any given time (C. Belsey, 2002, p. 31).      


이러한 측면에서 롤랑 바르트의 ‘신화’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의 역사적인 순간은 특별하다. 우리의 옷에 스며든 먼지에서부터 외계인의 침략까지, 우리는 전에는 결코 가진 적이 없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왜냐고? 우리 사회의 본성을 결정하는 소유의 형태가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트는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이념은 자기 스스로를 보이지 않게 숨겨버리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적인 사상경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는 누구도 자본가들을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 자본가계층은 자신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자본가계층의 이익을 위한 여러 가치들을 사회에 확산시킨다. 자본가 계급이 인간과 세계 사이의 여러 관계에 대해 퍼트리고 있는 주장들에 의해 언론, 사법체계, 요리책, 결혼, 날씨와 관련한 언급들 모두가 조용히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인지도 모르게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제도는 마치 하나의 자연법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게 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영웅은 특정 계층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반적으로는 백인이 되는데, 왜냐하면 이 자본가 계급의 영웅은 특정한 시대에 지배적인 취향과 교양에서 자신의 원칙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Marxism and Ideology 마르크스주의와 이념     


At this point in the argument, as you may have noticed, Mythologies has adopted a vocabulary derived from Marxism. Barthes was not himself a Marxist, but it was impossible to be an intellectual in Paris in the post-War era without taking Marxism into account. Many of the influential theorists of the time defined their own positions in line with or against the views of the French Communist Party. Marxism already offered an account of culture.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rote The German Ideology in 1845-6, before the revolutions that occurred all over Europe in 1848. They did not publish this early work, which survived only in manuscript form until the 1930s, but among all sorts of local observations, of interest now mainly to historians of ideas, the first part in particular includes a number of insights, not always fully worked out, but way in advance of their time.     


이 지점에서 바르트의 ‘신화’는 마르크스주의 한 개념을 채택한다. 바르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후에 파리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모르고 지식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시기에 많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학문적인 입장을 프랑스의 공산당의 관점을 기준으로 정의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문화에 대한 정의를 제공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전 유럽에서 일어났던 혁명 전에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1845-6년에 썼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초기 작품을 출판하지 않았지만 1930년대 까지 이 초기 작품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부분적인 통찰 중에서도 특히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이 많은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완벽히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통찰들은 그 당시의 시대를 앞선 발견들이었다.


'Ideology', Marx and Engels proposed, consists of the forms of social exchange that correspond to the mode of ownership prevailing at the time. They saw history as a succession of forms of ownership, tribal in the first instance, then 'communal' in the city-states of Greece and Rome, next feudal, and now capitalist. Ideology justifies the rule of each ruling class, whether as chieftains, patricians, landowners, or those with capital, the bourgeoisie. And in an example that perfectly anticipates semiology, Marx and Engels point out that under feudalism we hear a good deal about 'honour' and 'loyalty', but when capitalism takes over, 'freedom' and 'equality' (of opportunity, presumably) rapidly take their place. Moreover, they argue, in order to represent its own interests as the shared values of all members of the society in question, the ruling class has to invest its views with the character of inevitability and convince everyone that these ideas are the only serious option, the one way of understanding the world that is genuinely sensible and valid. We might now reflect on the fact that universal suffrage is the product of the capitalist epoch. In our own period, in other words, the mode of ownership is freely chosen, at least officially, though always from within ideology. Capitalism becomes synonymous with nature.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념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소유의 형태와 일치하는 사회적인 교환의 여러 형태들로 구성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를 다양한 소유 형태의 연속으로 정의했다. 역사의 첫 번째 단계의 소유 형태는 부족중심적인, 두 번째 역사의 단계에서는 공동체적인 소유 형태,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봉건적인, 그리고 지금은 자본주의적인 소유 형태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기술되었다. 완벽하게 기호학을 예측하는 한 예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봉건주의에서 우리는 ‘명예’와 ‘충성’에 관해 상당히 자주 듣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면서 ‘자유’와 ‘(기회의)평등’이 전자의 표현들을 재빨리 대체시켜버린다. 게다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로 만들기 위해서, 지배계급은 이러한 가치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지배 계급의 이익을 뒷받침해주는 자본주의 제도나 사상들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확신시켜야만 했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장한다. 시민 다수가 이렇게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자본가계급은 시민다수에게 확신시켰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장했다. 우리는 지금 보편적인 참정권이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란 사실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우리 시대에, 비록 소유권의 방식이 항상 이념 안으로부터 기인하긴 했지만, 소유권의 방식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유롭게 선택된다. 자본주의는 자연의 질서와 동의어로 여겨진다.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이념적인 국가 장치’     




 Under capitalism the state sets up institutions to defend property. The most obvious of these is the law, backed by the police force and the prison system. When in 1969 Louis Althusser reread (or rewrote) The German Ideology in the light of Saussure and semiology, as well as Marx's own later work, he began from there and went on to explain how capitalist society maintains itself. According to Althusser, the Repressive State Apparatus preserves order, the existing relations of production, in which some people have to sell their labour-power to earn a living, and some don't but live on their investments. If it is directly challenged by revolution or civil disobedience, the Repressive State Apparatus works in the last analysis by force. But many, or perhaps most, of us barely come into contact or collision with the police and the courts. We 'work by ourselves', Althusser says, to reproduce the class relations on which capitalism depends, even if these do not serve our long-term interests.      


자본주의하에서 국가는 사유재산권을 방어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세운다. 이러한 여러 제도 중에 가장 분명한 제도가 사법제도이다. 이 제도는 경찰력과 감옥제도의 힘에 뒷받침되면서 사유재산권을 방어한다. 1969년에 루이 알튀세르가 소쉬르와 기호학의 연구 결과와 마르크스의 후기 작품을 활용해 ‘독일 이데올로기’를 재해석하고 다시 썼을 때, 알튀세르는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시키는지를 설명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억압적인 국가기구가 질서 즉, 동시대의 생산에 대한 관계를 보호하고, 그 질서 속에서 사람들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다. 동시에 이 생산의 관계 속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노동력을 팔 필요가 없고 자신들의 투자가 벌어준 이익으로 살아간다. 만약 이러한 제도가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이나 혁명에 의해 도전 받으면, 억압적인 국가 기구는 기존의 제도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최후에는 무력을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많은 혹은 대부분은 거의 억압적인 국가 기구인 사법제도나 경찰과 충돌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억압적인 국가 기구와는 별개로 살아간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억압적인 국가 기구와 동떨어진 우리의 삶도 자본주의가 의지하고 있는 현재의 계급관계를 계속해서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계급 관계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이익에 반한다.      


The deserving poor of the 19th century reaffirmed the values of that society, even though by doing so they mostly remained poor. Why? Because, in Althusser's account, the Repressive State Apparatus finds a parallel in the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s), institutions that produce and reproduce the meanings and values which represent the relationship we imagine we have to our real conditions of existence. The ISAs tell us that work is a duty ; that work well done is a pleasure; that we are free to get another job if we don't like this one; that we can move to Cuba if we don't like capitalism. (The range of places to move to is dwindling fast, of course, as McDonald's takes over the world for the free market.) None of this is simply false: ideology is not a set of delusions foisted upon the stupid. But most of it isn't exactly the whole truth either. Being a night office cleaner, for instance, especially if you are a woman with small children, probably isn't much of a pleasure most of the time; what's more, without qualifications, the job you get instead might not be much better.     


19세기에 도움을 받아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그 시대의 여러 가치들을 재확인했다. 물론 이런 가치의 재확인이 그들을 계속해서 가난하게 만들었다. 왜냐고? 알튀세르는 억압적인 국가 기구가 이념적인 국가 도구들 중에서 비슷한 제도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도들은 현재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계급제도들을 상징하는 의미와 가치들을 생산하고 확산시킨다. 이념적인 국가 도구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들은 우리에게 '일은 우리의 의무이다; 훌륭하게 수행된 일은 우리에게 즐거움이다; 우리는 현재의 직업이 맘에 들지 않으면 자유롭게 또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쿠바로 이민갈 수 있다' (맥도날드가 점점 전 세계에서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잠식해 가면서, 이민 갈 수 있는 지역의 범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위의 여러 주장 중에 어떤 주장도 단순히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이념은 멍청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한 세트의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이념의 대부분은 완전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특히 당신을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이라고 전제할 때, 야간 청소부가 되는 것은 즐거움의 한 예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자격증이 없다면, 일을 그만두고 다시 얻는 직업은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Althusser's list of ISAs includes religion, the family, the political system of elections and parties to choose from, the unions (in so far as they set out to improve the existing order but not to change it), the media, sport, literature and the arts, and, supremely, education. These institutions, while not homogeneous in their output, and not without internal conflict, sometimes bitter, have the effect of securing our conscious or unconscious consent to the way things are, by making them appear at best in our interests and at worst inevitable. Above all, they seem obvious. In 2001 Jeremy Paxman interviewed Slavoj Zizek (of whom more in Chapter 5) on BBC radio. Zizek was calling for a radical rethink of liberal democracy. Was it, he wondered, truly 'liberal', or truly 'democratic', come to that? Could there be a better way of organizing society? Paxman could only assume that Zizek must want to go back to East European communism. What else could there be? This was an instance of ideology at work: capitalism is better than communism, obviously, and the idea that there might be an alternative to both is apparently unthinkable.      



알튀세르의 이념적인 국가 제도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들은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이 이념적인 국가 제도들은 종교, 언론, 간접민주주의제도와 정당제도, 조합, 언론, 예술, 문학, 교육제도 등을 가리킨다. 이중에서도 단연코 교육제도가 가장 효과적인 국가의 이념적 도구이다. 알튀세르가 주장한 이러한 이념적 장치들은 시민 다수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데 이러한 이념적인 국가 도구의 영향으로 인해 현재의 상태 (status quo) 즉, 시민들로 하여금 현재의 제도를 인정하고 동의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념적 도구들이 현재의 사회나 제도가 시민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제도로 보이게끔 만들거나 최소한 어쩔 수 없는, 너무나 명백한 제도로 보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지젝이 등장하는데, 2001년에 영국의 유명 언론인인 팍스만 (Jeremy Paxman)의 지젝 인터뷰는 알튀세르의 이념적 도구가 팍스만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되는지를 보여준다. 지젝은 팍스만에게 인터뷰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있게 재고해 볼 것을 요청한다. 지젝은  또한 현재의 제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적이고,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팍스만에게 제기한다. 더 나아가서 지젝은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란 질문도 팍스만에게 던진다. 만약 이러한 지젝의 요청과 질문에 팍스만이 자연스럽게 지젝이 90년대 초에 붕괴된 공산주의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이것은 알튀세르가 주장한 이념적 도구가 BBC 유명 언론인인 팍스만의 사고 속에서 잘 작동되고 있는 분명한 예가 될 수 있다. 만약 또한 팍스만이 공산주의보단 자본주의가 더 낫다거나, 이러한 두 지배적인 정치, 경제제도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은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이것 또한 이념적 국가 장치가 영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인 팍스만에게 조차 은밀하게 성공적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Those of us who were involved in teaching in the 1970s, when Althusser's essay on the ISAs first appeared in translation, were thrilled to learn that the education system was the main ideological apparatus. This meant that, as radicals, we had work to do on our own doorstep, instead of looking slightly out of place on other people's picket lines. The argument was that schools and universities not only eject a proportion of the young prepared to take up occupations at every level of the economic structure, but in the process of teaching reading, writing, and arithmetic they also provide instruction in obedience, deference, elementary psychology (the character-types of the  19th-century novel, for instance), the virtues of liberal democracy, how to give orders, and how to serve the community. In short, educational institutions inculcate discipline, and the self-discipline that encourages their pupils to go out into society and 'work by themselves' to maintain the status quo.     


1970년대의 가르침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교육제도가 주된 이념적인 장치임을 알게 되면서 흥분했다. 이것은 정치적인 급진주의자로서, 다른 시위나 파업의 저지선을 신경 쓰는 일 대신에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학교나 대학에서의  교육의 과정 즉, 읽기, 쓰기, 수학 등을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복종, 사회의 다양한 위계제도에 대한 존중, 간접민주주의의 우수성, 명령하는 법, 그리고 개인보다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교육제도는 현재 사회의 제도나 관행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학생들도 하여금 훈육과 자기 관리에 대한 가치들을 반복적으로 심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이념적 도구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이념적 도구인 교육제도는 사회의 각각의 경제적 위계 구조를 채울 학생들을 길러내고 즉, 학생들을 학업성취도에 따라서 이러한 경제적 위계제도의 각 층위에 채워 넣는 제도이기도 하다.      


 A more recent example would be the demand (with the best intentions, of course) that sex education should always be given in the context of family values. The family, we know, is yet another place where children are supposed to learn obedience, deference, and the values (especially the heterosexist and gender values) of their community. (The reality, we are beginning to recognize, may be rather different. Besides love, the family can also shelter domestic violence, sexual abuse, and untold psychological torment.)      


현재의 질서나 제도를 유지시키기 위해 작동하는 이념적인 국가 도구로서의 교육이 보여주는 최근의 한 예는 성교육이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조건에서 항상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족도 아이들이 복종, 존중, 이성애와 성역할과 같은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배우는 또 따른 장소이다. (우리가 점점 알아가고 있는 것처럼 현실은 좀 다를 수도 있다. 사랑 이외에도 가족은 가정폭력, 성적학대, 그리고 심리적인 고통을 숨겨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Ideology secures the system by consent. It is not a conspiracy. Its reaffirmation is not deliberate. Adam Bede doesn't set out to reproduce the existing class relations. On the contrary, he simply does his duty and takes pleasure in his work. But it is exactly the sense of duty and pleasure that mask the element of exploitation involved in the fact that he has to sell his labour-power (he can't afford not to) for a wage that is less than his employer will get for the coat of arms he is carving, and much less than its purchasers probably earn from the rents they impose. Adam Bede doesn't set out to mask exploitation either. But by showing the scene in its ideal form, and presenting class difference as inevitable, obvious, this 'realist' novel does in practice reproduce the imaginary relations of individuals to their real conditions of existence (C. Belsey, 2002, pp. 31-37).      


이념은 사회적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현 제도를 보호해준다. 이념은 음모가 아니다. 이념의 재확인은 사회구성원의 의도적인 행동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인물 아담 베데도 당시의 그의 계급적인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을 시작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담은 단지 자신의 의무를 감당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일에서 기쁨을 얻는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일에서 얻는 의무감과 즐거움이 자신의 노동의 대가인 월급이 사장이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서 얻는 이윤보다 적은 착취의 현실과 자본가들이 부과한 임대료 보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훨씬 적은 착취의 현실을 가려 버린다. 그렇다고 아담은 착취의 현실을 가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고 이러한 계급적인 차별을 보여 줌으로써,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소설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와 가지는 가상의 여러 관계 (여러 사회, 경제적인 위계구조)들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재생산함으로써 시민들의 의식 속으로 이러한 위계구조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확산시킨다.





------------- 생각공장의 시선 - 교육편 부록- 은 대중 교육이 현재의 상태 (status quo)을 유지시키기 위해 대중을 세뇌시키는 가장 대표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임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주장을 요약한 생각공장의 강의록입니다. 언론과 함께 대중 교육제도는 현 시대의 정치 (대의민주주의), 경제 (신자본주의), 문화 (돈과 소비를 강조하고 이 가치로 대중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적인 가치를 확대 재생산해서 시민들에게 한 곳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지배이념의 수단이다. 그래서 소수가 다수를 예측 가능하게 컨트롤 하는데에 있어 사용되는 이념적 수단이라고 루이 알튀세르는 주장하고 필자인 세종도 이 부분에 심하게 동의한다. 쉽게 말해 교육제도와 언론은 대중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진 생각들을 퍼트리는 대표적인 나쁜 생각공장이다. 그래서 필자 세종은 대안적인 생각공장을 세워서 이 나쁜 혹은 못된 생각에 대한 백신을 제공하는 참 좋은 생각공장을 2013년 3월 부터 운영하고 있다. 이 생각공장은 세종이 강조하건데 헬조선 최초 인문학 전문학원이며, 세종은 이 인문학 연구소 겸 인문학원의 수석 연구원이다. 참고로 번역은 세종이 한 번역인데 약간의 오역이 있을 수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오역이 발견되면 댓글로 바로 잡아 주셔서 좋은 지식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시기 바란다........................




                                                                                                                                         

Bibliography     

Belsey, C. (2002), ‘Poststructuralism’, A Very Short Introduc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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