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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공장 Mar 28. 2017

공포정치인 테러는 전형적인 지배수단?

고 백남기 농민은 국가테러의 희생자다!






누가 테러 방지법을 만든다고??


2015년 11월 13일에 일어난 IS (Islamic State; 이슬람 국가)의 파리 테러로 전 세계에 테러에 대한 분노와 함께 테러방지에 대한 국제적인 협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이에 질세라 테러방지를 위해서 국정원장 소속으로 테러대응종합센터란 조직을 만들어서 테러 의심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출입국 규제, 정보 조사, 외국환 거래 정지요청 및 통신이용 정보 수집을 가능하게 만드는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국회에 요구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 다음날 인 11월 14일에 서울 광화문에서는 대한민국 민중총궐기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를 경찰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농민 백남기 씨는 물 대포에 맞아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2016년 1월 14일 현재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시민의 공권력인 경찰의 시위대응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분명 시위대의 안전을 지키는 것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권력 (public force)은 시민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사용되는 물리적인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찰과 군대가 공권력의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시민 모두의 권력인 경찰이 지키고 보호하려 했던 대상은 시위대가 아닌 청와대에서 사시는 분의 심기였던 것처럼 보인다. 시위를 하고 있는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공권력인 경찰이 시민을 향해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 정부가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우기고 있는 현실에 이 말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참 어이없다!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미화된 국가테러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경계가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1997년에 출간된 세계 테러리즘에 관한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of World Terrorism)은 763 쪽에 이르는 상당히 두꺼운 책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자국민 대상의 국가 테러에 관한 내용은 단지 13 쪽 분량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스럽게 테러에 대한 시민 다수의 관심이 IS 와 같은 국가 외부의 적에 의한 테러리즘에만 쏠려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는 테러라는 단어가 국가테러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자체가 시민들에게 폭넓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 혁명과 테러     


Reign of Terror

테러와 테러리스트라는 용어가 정치학사전에 등장하게 된 기원이 프랑스 혁명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1792년 루이 16세의 처형과 함께 시작된 프랑스 공화국은 2년차에 들어서면서 외국의 침략과 내부 반역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1792년 프랑스 국회는 공화국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선포하고 1793년 10월에 혁명의 적들인 왕들과 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혁명을 지키기 위해 공포 정치를 선언한다. 이 과정에서 평민들 만 명 정도가 처형되는데 이들의 처형 명분은 국가 재정비를 수용하지 않았던 지역 가톨릭 사제들을 지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무분별한 처형은 프랑스혁명의 진보적인 가치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대의민주주의와 법 앞에서의 평등은 프랑스혁명의 공안 위원회 (The committees of Public Safety and General Security)가 인류사에 처음으로 선보인 프랑스 혁명의 대표적인 가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치학 사전에 ‘테러리스트’란 단어를 등장시킨 주체 또한 바로 프랑스혁명의 공안 위원회였다. 자코뱅 혁명가들이 이해한 것처럼, 분명히 혁명은 1792-3년 사이에 내, 외부적인 위협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공안 위원회는 공포 정치를 채택한다. 프랑스 혁명을 뒤엎으려는 반 혁명세력 (왕과 귀족 계층)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공안 위원회의 공포정치는 1794년 공포 (terror)그 자체인 프레리알 22일 법 (the law of 22 prairial Year Ⅱ)의 등장과 함께 정점에 이른다. 이 법은 피고로 하여금 변호사를 고용하거나 증인을 부를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할 수 있는 법이었고, 동시에 혁명 재판위원회로 하여금 도덕적인 판단에 근거해 반혁명 혐의자를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였다. 이 공포 정치법이 시행되는 동안 하루 당 평균 사형 집행 건수가 3-5배 정도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공포정치의 시행자인 막스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공화국의 모든 선과 업적들을 선전했다. 물론 군주제에 대한 모든 악함과 부당함을 대비시키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혁명의 적들은 로베스피에르에게는 괴물들, 흉포한 야수들, 거머리, 남의 불행을 이용해 먹는 사람, 도적들 그리고 귀족들보다도 천한 사람들이었다. 군주론자 혹은 프랑스 공화국의 시민 헌법에 복종 서약을 거부하는 가톨릭 사제들도 반혁명 세력들이었다. 장 폴 마라는 이러한 반 혁명세력들에 대한 사형 집행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 한다: 반혁명분자에 대한 처형은 주권자인 국민의 절대적인 권리이며 독재와 억압에 저항하는 즉,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정당한 폭력이다. 혁명 재판위원회의 살인에 대한 이러한 장 폴 마라의 정당화에도 불구하고 공포정치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정치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테러란 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테러는 일반적으로 자국 시민을 향한 국가 권력자들에 의한 겁주기와 폭력을 이용한 지배를 일컫는다. 테러의 이러한 정의는 ‘테러리즘’의 현상과 구분하기 위해서인데, 비 국가적인 단체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이 ‘테러리즘’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치 후유증     


정적을 포함한 동료 시민, 특히 현재의 권력에 반대하는 모든 시민에 대한 권력자의 고삐 풀린 공권력의 남용에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테러와 테러리스트란 용어가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혁명 공안 위원회가 자행한 폭력의 잔인하고 체계적인 사용은 혁명 이후의 전 세계 여러 국가 권력자들에게 공포정치의 유용한 (?) 적용 모델을 제시했다. 즉, 반정부 세력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 대응방식을 프랑스혁명은 공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자들에게 학습시켰다. 테러리즘에 관한 최근의 대학교과서는 국가 테러리즘에 대한 세 가지의 기능을 소개 한다: 반정부주의자나 반대파를 좌절시키는 협박; 삶의 방식을 바꾸는 강요된 전향; 한 계급, 인종, 종교에 대한 의도적인 인종학살이다. 억압적인 귀족과 독재주의, 러시아 내전 동안의 볼셰비크와 같은 극단적인 혁명 정부도 국가 테러의 대표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위기의 시대에는 헌법적인 여러 국가도 흉포한 억압적인 조치들을 자행했다. 예를 들면, 1871년의 파리의 꼬뮨의 진압과 1848년의 노동자 민란이 있다. 미국정부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KKK단에 의한 남부 흑인 공동체의 테러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물론 미국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기업가들의 위협적인 폭력의 사용도 조금 덜 과격한 테러의 한 형태이기도 했다. 이렇게 은밀한 기존의 정치, 사회적인 질서를 지키기 위한 보수적인 권력가들의 ‘백색 테러’는 근대의 역사에 계속된,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의 흐름이었다.         






국가 테러     


'내가 들었던 잔혹행위는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이러한 잔혹행위는 우리 군대의 지속된 행동 패턴이었다. 살인, 팔 다리 절단과 같은 것들을 자랑하는 장교들이 있었다.............그들은 내게 전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런 잔인한 행동들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에게서 충성을 얻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중을 겁주고 이로 인해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드가 차모르, 국제 사법 위원회에 제출된 진술서, 1985 (미국과 니카라과 분쟁)     



The Great Terror, a campaign of political repression in the Soviet Union from 1936 to 1938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둘 다 테러리스트 정부로 분류된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다.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과 집단들을 독일 사회 전체의 안전을 해치는 공공의 적과 위협으로 비방하면서 히틀러 자신의 학살행위를 정당화한다. 실제로 이러한 조치들은 반대파를 무력화시키거나 나치 정부의 자유만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소련의 스탈린 정부도 이와 판박이다. 소비에트 특별 위원회 (Soviet Special Boards) 앞에 수십만 명이 계급의 적으로, 스파이로, 혹은 반역자의 가족이란 죄목으로 서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들에게 ‘법에 따른 공정한 절차’는 보장되지 않았다. 소비에트 특별 위원회는 모든 정치적인 반대파를 억압하고 제거하기 위한 문자 그대로 특별히 (?) 설립된 위원회에 불과했다. 심지어 기소의 가능한 범위를 확대하면서 소련 사회에 공포 (terror)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킨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1938년에 ‘침묵하는 자들 (the silent)’에 대한 기소로 이어지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침묵하는 자들은 단지 특정한 정치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고소를 받고 처벌받게 된다. 소련의 검사장인 비신스키는 다음과 같이 선언 했다: 적을 제거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재판 없이 그들을 처형을 할 수 있다. 비신스키의 이러한 선언은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의 공포정치의 심각성의 정도를 드러내 줄 뿐 만 아니라 이러한 형태의 공포정치가 반대파 제거에 있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남아메리카의 국가 테러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브라질, 우루과이의 군사 정권은 사회주의의 위협이라는 명분으로 자국 내의 진보적인 좌파의 활동을 마비시키기 위해 테러를 개시한다. 이러한 테러의  수단은 군대와 경찰력이었다. 공권력인 군대와 경찰은 살인, 투옥, 고문 그리고 ‘납치’와 같은 테러를 자국의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한다. 1973-4년에 일어난 칠레의 국가 테러와 고문 방식에 대한 엠네스티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문의 방식들은 전기고문, 구타, 염산이나 담배로 화상 입히기, 못 앉게 하기, 계속해서 두건으로 눈 가리기, 독방에 감금, 손톱 뽑기, 고환 부수기, 성 고문, 물고문, 가짜 처형.........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문을 강제로 지켜보기 등을 포함한다.


같은 시기에 똑같이 끔찍한 테러의 시스템이 아르헨티나에서도 등장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국가 뿐 만 아니라 민간 암살단도 국가테러 행위에 가담한다. 이러한 암살단은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이나 노조지도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민중의 혁명 군대와 같은 반정부 조직도 대략 700 여명을 암살한 것으로 정부는 추산하고 있다. ‘트리플 A'라는 아르헨티나 극우 조직은 1973-4년 동안 2천 명 이상을 살해하는데 이 테러의 피해자들은 페론 정부에 반대하던 사회주의자들, 파업 노동자들, 그리고 반 정부주의자들이었다. 1976년에 군사정권 수립 이후에, 이 조직은 국가 테러의 한 조직이 된다. 불행하게도 이 조직의 희생자들은 아르헨티나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게 된다. 1976년 중반에는 납치가 하루 당 평균 5 건 이상이 발생했고, 최소 9 천명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 만 명에서 3만 명 정도의 시민이 군사 정권의 국가 테러에 의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 전역에 존재하는 약 340개의 비밀 수용소에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비밀 수용소에서 고문당하고 처형당한 이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비행기에 의해 바다에 버려지기도 했다. 군사정권은 이러한 납치, 고문 그리고 살인을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은 이러한 테러로부터 발생한 공포가 시민들 사이에서 퍼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공안 (공공의 안전)이란 이름의 국가 테러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 채 70살이 되지 못했다. 70년도 채 안 되는 대한민국 역사 중에 이승만 (12년), 박정희 (17년), 전두환 (7년)의 임기를 다 합하면 거의 36년에 이르는 기간이 군사 쿠데타에 이은 군사정권과 독재로 얼룩져 있다. 대한민국의 암울한 역사가 드리운 그늘에 국가 테러의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의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정통성이 결여 된 자신들의 정권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외치며 독재 정권과 용감히 맞선 대학생, 노동 운동가,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인들을 공안 (public safety)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처형했다.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으로 인혁당 사건과 부림 사건 등이 있다. 또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국가 테러의 전형을 보여 준 매우 비극적이고 잔인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인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면서 시작된다. 1971년에 박정희 정권의 세 번째 연임이 시작되고, 급기야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민주재야세력과 대학생들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 독재정권에 저항한다. 이에 반응해서 유신정권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이 조치에 위반한 자들을 비상 군법회의에서 처단하려고 시도한다. 결국 1974년 4월 3일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으로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판사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수색하여 비상 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고 규정했다. 이어 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 (현 국정원의 전신)장인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사건에 배후세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과 국내 좌파가 그 배후 세력이라고 신직수는 발표한다. 결국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에 의해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등 8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피고들의 항소는 모두 기각되었다. 결국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이 확정되고 바로 그 다음 날인 4월 9일 비상보통군법회의는 8인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게 된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하의 대표적인 인권침해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2005년 12월에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가혹행위와 ‘인민혁명당’ 구성 및 가입 등에 대한 조작 사실을 인정하였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은 도예종 등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현재 문화방송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인 고모 검사와 관련된 부림 사건도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이다. 부림 사건(釜林事件)은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한다. 부림 사건을 계기로 노무현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체포된 이들은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되어 구타는 물론 물고문과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인 고문을 겪는다. 고문에 못 이겨 부림 사건의 피해자들은 검사의 각본에 짜인 대로 자백하기에 이른다. 검사들은 독서 모임이나 몇몇이 다방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 단체의 ‘이적 표현물 학습’과 ‘반국가 단체 찬양 및 고무’로 날조시켰다. 이 사건의 검사들은 반국가 단체 ‘부림’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피고인들을 구금하고 기소한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단체나 조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는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와서 처음 대면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부림이라는 명칭도 ‘부산의 학림(學林)’이라는 말을 줄여 붙인 것이었다. 오로지 고문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유령 단체가 부림이었고, 그러한 유령 단체를 조작한 사건이 부림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도 정치군인들이 자행한 잔인하고 폭력적인 국가테러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면서 같은 해 12월 12에 전두환과 노태우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과 대학생들은 전국적으로 저항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인 배경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전남대의 학생 시위가 공수부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면서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한 공수부대의 발포로 인해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무장해서 맞서 싸우지만 결국 27일에 시위대는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진압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공식 통계로 민간인이 166명이고 8백 여 명의 부상자가 생겨난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는 정치군인이었던 전두환, 노태우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벌인 국가 테러의 가장 잔인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 대한민국 법원은 17년이 지난 1997년 4월 17일에야 비로소 다음과 같이 5.18에 대해 법적 판단을 내린다: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며 5·18사건은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다. 원래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에서 법원은 전두환은 무기징역, 벌금 2205억 원 추징을, 노태우는 징역 15년에 벌금 2626억 원 추징을 선고한다. 1997년 4월 17일의 상고심에서 위 형량이 확정되었으나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즈음해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석방되었다.      






누구를 위한 공안인가?      


프랑스 혁명 이래로 공공의 안전 (public safety)과 질서라는 명분이 정치적인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어 왔음을 남미와 한국의 사례에서 너무나 명백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다수의 안전과 공공질서는 당연히 지켜져야만 한다. 하지만 공안과 사회질서를 강조하는 정치세력 특히, 집권 세력이 공안을 강조할 때, 이러한 정권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의무다. 국가 테러의 전통을 이어 받은 현 정권은 2015년 11월 대한민국민중총궐기 1차 대회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농민 백남기 씨에게 테러 행위를 가한다. 사실, 이 사건은 2, 3차 시위에 참여 할 수 많은 뜻 있는 시민들에게 가한 국가테러 (공포정치의 한 형태)행위였다. 이러한 테러리스트 정부는 피해자 가족에게 사과는커녕 다른 테러리스트 (?)를 감시하고 잡겠다는 테러방지법의 통과를 국회에 요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1월 13일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테러방지법의 조속한 통과를 국회에 요구 한다:      


국민 여러분. 이번 북한의 핵 실험으로 인해 국민 여러분들이 느끼실 안보 불안감이 크실 겁니다. 이와 관련해 우선 우리는 동맹국인 미국과 협조해 국가방위에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철저한 군사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한·미 양국은 미국의 전략 자산 추가 전개와 확장억제력을 포함한 연합 방위력 강화를 통해 북한의 도발 의지 자체를 무력화시켜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처럼 우리의 안보 위기상황이 심각한데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대내외 테러와 도발을 막기 위한 제대로 된 법적 장치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북한은 남북 간의 고조된 긴장상황을 악용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도발이나 사이버 테러를 언제든지 감행할 우려가 있습니다. IS와 같은 국제 테러단체도 이러한 혼란을 틈타 국내외에서 언제든지 우리 국민들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것은 국민들의 안위를 위험 속에 방치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디 국회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민의 생명 보호와 국가 안전을 위해 테러방지법을 조속히 처리해 주기를 부탁 드립니다.      


대통령의 담화문을 좀 해석해보면 위의 두 번째 국민여러분을 기점으로 전반부에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한미군사 공조를 통해 철저히 대응해 나간다고 대통령은 말하면서, 후반부에서는 북한의 테러위협으로부터 사회의 질서와 안전을 지키기 위해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 한다. 논리전개가 대단히 창조적이다! 이쯤 되면 공안을 외치는 현 집권 세력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테러방지법의 핵심은 테러 용의자에 대한 출입국 규제, 은행거래 정지, 통신이용기록 등에 대한 조사와 자료 수집을 국정원장 소속의 테러대응종합센터에서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다. 한 가지 심각한 위험성이 이 법안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테러 의심 혐의자를 규정하는 기준을 누가 정할까? 정부 정책에 반대해서 자주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는 시민들이 테러 용의자로 둔갑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 특히 카톡 이나 이메일과 같은 통신기록을 법원의 영장도 없이 국정원이 들여다볼 때 누가 혹은 어떤 주체가 국정원을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정권이 사회의 안전과 질서 유지 즉, 공안이라는 명분으로 불특정 시민의 이메일과 카톡 내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면 이 보다 더 한 테러 (공포)가 과연 존재할까? 위에 열거된 프랑스 혁명 이후의 공포정치의 수많은 사례는 시민들에게 위와 같은 여러 질문과 의심을 가지라고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9/11 테러 이후에 만들어진 미국의 애국법 (The US Patriot Act) 사례가 위에서 언급된 테러방지법의 잠재적인 위험성에 관한 주장에 타당성을 실어준다. 9/11 이후에 테러 용의자에 대한 ‘정당한 법적 절차’에 의한 사법판단이 위협받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 시민 다수가 가졌던 공포의 확산으로 인해 미국의 애국자법은 자국 시민 감시에 대한 필수적인 법적 규제의 상당수를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의 한 법학 교수는  테러 용의자를 고문해도 괜찮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근대 이후의 서양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입장의 변화를 보여준다. 공안 통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면서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권력자들은 한 미국 평론가의 주장처럼 대중은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 자신들의 자유를 내 팽겨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들에게 공안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경계하라는 역사의 외침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는 꼭 필요해 보인다. 또 한편으로 국가테러의 합법적인 제도인 경찰, 검찰 그리고 사법권력 또한 무한 신뢰의 대상이기보다는 견제와 감시, 그리고 의심의 대상이라는 역사의 가르침을 시민들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통사고로 죽을 가능성보다 훨씬 낮은 테러의 위협을 과장해서 테러방지법을 만들자고 하는 집권 세력의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정권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대학생을 합법적으로 감시하고 싶은 욕망의 구체적인 표현이 테러방지법의 국회통과 요구는 아닐까? 만약 진실이 이와 같다면, 감시와 공포정치를 통해 시민의 자유를 빼앗는 권력은 공안의 수호자일까, 아니면 테러리스트일까?



* 참고로 필자는 이 글은 2016년 1월 14일에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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