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말에 따르는 것도 좋지만.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집에 오셨다. 새해맞이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6살 된 아이가 영 새배가 하기 싫은가 보다. 쑥스러워서 그런가 싶어 옆에 나란히 서서 엄마랑 같이 하자 하고 꼬드겨봐도 뻣뻣한 몸이 굽혀질 줄 모른다. 음.. 새배를 하기 싫은 거야?라고 물어봐도 묵묵부답. 형이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 있던 둘째는 천연덕스럽게 태해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벌써 세뱃돈 만원을 챙겼다. 조금 기다리면 할까 싶어 가만히 쳐다보았지만, 역시나 실패. 어머니는 하기 싫은가 보다 하면서 너그럽게 말씀해 주셨다. 그 순간 말을 듣지 않던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은 왜 불편했을까. 어쩐지 나와 다른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릴 때 명절이 기다려졌던 것은 평소 못 보던 친척을 보고, 맛있는 명절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친척 어른들이 주시는 세뱃돈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새배를 하면 세뱃돈을 받고 어른들의 뿌듯한 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명절 아침 차례가 끝나고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리면 어른들은 다들 둘러앉아 아이들의 새배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형식적으로 나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말하고, 고개를 들면 어른들의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나온 예쁜 봉투 속에는 푸릇한 세종대왕이 여러 장 들어있었다. 몇 장인지 정확히 세보고 싶었지만, 엄마가 가져갈까 봐 몰래 방이나 화장실에서 두근거리며 돈을 세봤던 기억이 난다. 그게 어찌나 좋았던지 매년 설날을 기다렸다.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한 이후에는 세뱃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복돈이라고 해서 어른들은 복을 나누어주셨다. 물론 나도 따로 어른들께 드릴 용돈 봉투를 준비하였지만. 커서 받는 복돈도 여전히 좋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어른들께 인정받고 싶었던 어른 아이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첫째 아이는 종종 알 수 없는 이유로 고집을 부렸다.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절 한번 하고 나면 끝날 일이 그 아이에게는 왜 어려웠을까 싶어서 잠깐 생각에 잠겨본다. 세배하는 것은 어린이집에서도 배우고, 유치원에서도 배워서 알 텐데. 그럼 뭐지? 그냥 그 순간 하기 싫었던 걸까. 세뱃돈이건 할머니의 칭찬이건 엄마의 부탁보다 자신이 하기 싫은 마음이 더 먼저였다면 그 마음을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 만약 어머니께서 억지로 아이를 절하라고 호통쳤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이를 키우는데 정답은 없어서 인지 세상에는 많은 정답이 존재한다. 부모는 우리 아이가 어떻게 자라면 좋을까 고민한다. 아이가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자라길 원하는 부모가 있을까?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는 확실한 노(no)다.
늘 부모에게 사랑받기를 원했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부모님이 뭘 원하는지 먼저 알아차리는 나였다. 부모님이 원하는 내 모습을 가졌을 때 그게 내 기쁨인 줄 알았다. 그렇게 어느새 나를 잃어버린 어른이 되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님의 기대를 맞추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 아닌 그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키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가능했다. 그렇게 부모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난 나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조금씩 찾아갔다. 우리 아이가 나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아이가 아닌 그저 아이 자신으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내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결과이다.
가끔 친구를 만나면 올해는 어떤 아이가 제일 예쁘냐 질문을 받는다. 나는 내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말을 하는 아이가 예쁘다. 교사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교사의 말도 맞지만 자신의 소신을 펼칠 수 있는 아이 말이다. 상대방에 맞춰 자신의 선호를 숨기는 것은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때로는 소신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아이들도 더러 있다. 이런 아이가 사실 제일 어렵다. 교실에서 교사의 말은 권위가 사라지고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몇몇 아이들 때문에 매일매일 학교로 출근하는 것이 공포스럽고 언제 끝나나 매일 우울한 나날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담임 말만 잘 듣는 순둥이라면 그것도 꽤 슬픈 일이지 않을까. 자신의 의견 없이 무조건 어른의 말이 옳다고 믿는 아이들이라면 그것이 괜찮은 일일까. 착하다는 말에 속아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무작정 따르는 것에는 위험이 없을까. 어떤 것이 좋은 교육일까.
그 와중에 인상적인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눈에 띄지 않고, 평소에는 말없이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아이의 말하는 습관이었다.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 할 말이 있으면 회의시간에 어찌나 조목조목 따지듯이 이야기하던지,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가 손만 들어도 질리는 얼굴이었다. 담임이 있건 말건 어찌나 속 시원하게 말을 하던지. 그 이후 그 아이의 별명은 사간원이 되었다. 조선시대 논쟁을 담당하는 부서 말이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말하던 무심한 그 표정은 오래오래 내 기억에 남았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담보로 하여, 아이들을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키워내려는 욕심이 아닐까. 물론 그 속에 진실된 사랑과 걱정하는 마음, 잘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른이기에. 하지만 가끔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투영된 부모의 욕망보다 자신의 욕망을 조금 더 먼저 알아차리게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교사로서 오늘도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이다.
교사의 언어는 아주 가끔 생각보다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