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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Jun 24. 2020

우리는 서로의 방패가 될 수 있을까?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한국교회 안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 닭이 알 바깥에서 함께 부리로 껍질을 쪼아 돕는 모습을 이르는 사자성어입니다. 어떤 변화 혹은 탄생,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감에 있어 안과 밖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오늘 저는 생각해 봅니다.


과연 전세계적으로 성소수자들의 인권이 대두되어 그 운동이 활발한 작금의 흐름 속에서, 병아리는 누구이고 알은 누구인가?


한국사회가 병아리라면, 한국교회는 깨부숴야 할 껍질이 된 모습입니다. 그 바깥에서 이미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종교인/비종교인들은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아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제도를 마련하고 변화의 주춧돌을 놓기 위해 껍질을 두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교회가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세력에 침묵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인권 침해를 양산하고 있는 이 때, 한국교회라는 껍질을 깨뜨려서라도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교회 안에서 몸부림치는 이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당신에게 질문하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성소수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 경험상 별 생각이 없다거나, 조금 자세히 물어보면 내 주위에만 없으면 된다거나, 대체로 이러한 반응이 주를 이룹니다. 쉽게 말해 입장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존재가 아무렇지 않은 상태가 되는 데에는 몇 가지 국면이 있습니다.


첫째, 그 존재가 나를 해칠 것 같은 공포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호모"라는 단어는 매우 모욕적인 의미를 사용되었습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해서 남자만 보면 소위 '눈알이 뒤집혀' 쫓아다니는 사람 정도를 의미했습니다. "호색한"에는 "호모"도 포함되었죠.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그러한 방식의 막연하고 근거없이 자극적이기만 한 공포는 옅어졌습니다. 다만, 이것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누군가 "나 게이야"라고 당신에게 커밍아웃한다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할지도 모릅니다. 다름이 아니라 '얘가 날 좋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서 말이죠.


둘째, 서로간의 경계가 모두 사라져서 그 존재나 나나 별다를 것 없이 인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러한 상태는 불가능하죠. 사람과 사람은 서로 정도의 차이를 두고 경계를 맞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인권침해, 차별, 혐오라고 말하는 것들의 심리적인 작용은 서로간의 경계가 폭력적인 것으로 인식될 때 발생합니다.


셋째, 첫째 국면과 둘째 국면 사이 어디쯤에서 자리를 잡고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경계에서의 폭력적인 작용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이 무의미하듯 최초에 누가 성소수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고, 성소수자는 거꾸로 그러한 다수자들에게 "공포"를 느끼는 현실입니다.


첫째 국면의 막연한 공포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축적되어 온 "성소수자로부터의 폭력이라는 공포"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공포가 성소수자를 폭력적인 개인(혹은 집단)으로 낙인찍는 바람에 성소수자들이 폭력을 당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성소수자가 다수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존재로 인식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성적 위계나 권력구조 등을 교란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얼마든지 폭력적인 존재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은 성소수자뿐만이 아닙니다. 극빈자, 여성, 장애인, 어린이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간의 경계에서 발생한 폭력적인 작용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단지 그러하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지 않은 존재" 취급을 받는 차별과 혐오의 역사는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단지, 그렇게 태어나 살고 있다는 이유로 인생을 빼앗기고 난도질당하는 것이죠. 그리고 가슴아프게도 종교는 매우 자주 차별과 혐오의 역사에서 첨병의 역할을 도맡았습니다.






이 글을 보는 분 가운데 기독교인이 있으시다면, 썸네일의 "퀴어 예수"라는 문구가 눈에 거슬리는 분이 분명 계실 것입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지 말자는 말에는 동의하겠는데, 왜 굳이 예수를 퀴어로 만들어야 하나? 그게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겠죠.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아시나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브이'가 쓰던 가면을 쓰고 거리를 메운 군중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최근까지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내가 000이다." 라는 연대와 동참의 문구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특정인이 겪은 사건이나 그가 가진 고통, 또는 나아갈 지향점에 대해 동의하고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예수는 퀴어다."라는 선언은, 그 자체로는 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명제일지라도 "내가 믿는 예수는 성소수자를 사람 그 자체로 대하고 축복하는 존재다."라는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동성애자(성소수자)는 죄인이므로 그 정체성을 가지고서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기존 교회에 "그렇지 않다."는 선언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언에 따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20년째 계속되는 "퀴어문화축제"에 부스나 행진으로 함께 참여하거나, 그 주위를 둘러싸고 성소수자들을 저주하고 폭행하는 기독교인들을 막거나, 아예 자신들의 교회를 퀴어-프렌들리 교회로 세우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 한국개신교회의 차별과 혐오, 폭력의 몸부림이 극심했던 제 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목사로서 성소수자를 축복했던 한 목사가 교단 재판위원회에 기소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가 속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의 교리와 장정에 명시되어 있는 "동성애" 관련 항목은 처음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닙니다. 최근 성소수자의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고 교회 안에서도 이에 연대하는 목소리가 나타나면서 '교리와 장정'이라는 교단법을 개정하는 가운데 끼어들어간 것입니다. 성소수자를 축복하는 행위를 "범죄 행위 중 하나"로 규정하게 된 것이죠. 이 즈음에 한국의 다른 개신교단들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명확히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습니다. 결국 한국 교회는 스스로 반인권적인 조직임을 천명한 셈입니다.


세상을 선도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세상의 변화에도 발맞추지 못하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단체가 된지 오래입니다. 교회에서는 여전히 공공연하게 동성애가 죄라고 가르치며,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밝히면 자신을 "정죄"할 게 뻔한 교회와 교인들이 무서워 괴로움 속에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미 성소수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음을 알면서도 마치 그들을 사이비 세력에 포섭된 가짜 교인인 양 교화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봅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상황 속에서 말 그대로 "소수"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편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곁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로 저 목사처럼, 언제 차별과 혐오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주류의 폭력"에 노출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전 정권들에서 경험했듯, 힘을 가진 쪽은 오히려 자신이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꾸며내는 데 전문가입니다. 물론 언젠가 진실은 밝혀지겠지만, 그러한 거짓말이 시간을 끄는 동안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기에,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거짓을 걷어내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한국 교회 내의 반동성애 진영에서는 "동성애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앵무새처럼 외칩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사회가 그저 방관하는 사이에 거짓에 동조하며 차별과 혐오의 계기로 삼는 이들에 의해 "거짓을 이용해 교회를 망치는" 불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그들이 망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비기독교인, 그리고 기독교인 중에서 본인을 중립적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향해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소수자의 인권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한 여정에서 바로 그런 사람들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직장, 친구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많은 대화 속에서 누군가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할 때, 이제는 당신이 조금은 다른 목소리를 내어주었으면 합니다. 그게 당신에게 큰 위험이 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저 "뉴스에서 봤는데 ... 사실은 이렇다던데?" 정도의 환기하는 말도 좋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도 사랑하지 않을까?" 와 같은 부드러운 말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런 아주 작은 돌멩이들이 쌓여서 호수를 메워 끝내는 더 이상 그 호수에 빠져 죽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 혹은 중립적인 입장을 가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이 목사가 받고 있는 고통이 정당한 것인지 한 번 깊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의냐 반대냐를 떠나서, 어떤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기에 앞서서, 현실적으로 더 약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판을 짜는 것이 맞는 것인지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한국 교회라는 껍질을 함께 쪼는 성숙한 닭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편을 택하지 않을 거란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탁하는 것입니다. 스치는 길에, 그 껍질을 그냥 한 번 툭 치고 지나가 달라고 말입니다. 그게 껍질을 깨진 못할지라도, 그렇게 쌓인 진동들이 교회의 본질을 다시 깨닫게 하는 울림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껍질이 깨지기 전에, 아니 껍질이 깨진 후에라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새롭게 나타날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듯이, 그 부활의 능력으로 한국 교회도 부활해 시대를 이끄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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