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와 아싸 그리고 절대적 환대
얼마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한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은 요즘 핫하다는 인싸 게임 among us 플레이 영상이었습니다. 재밌겠다 싶어 주변 사람들을 꼬드겨볼까 궁리하던 차, 마침 이 게임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선뜻 응하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게임을 했습니다. 많게는 7~8명, 적게는 5명이 참여해 마피아 게임의 마피아인 임포스터를 색출해냈죠.
게임을 마치고 함께 플레이한 사람들과 여담을 잠깐 나누었는데, 그 중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많아야 할 수 있어서 인싸겜이라고 불린대요."
인싸와 아싸는 짧게 반짝였다 사라지는 유행어들 사이에서도 몇 년째 사라지지 않는 유행어입니다.
인사이더 Insider 와 아웃사이더 Outsider라는 영어 단어에서 파생된 인싸와 아싸는 말 그대로 "안에 속한 자", "바깥에 있는 자"를 뜻합니다.
생각해보면, 90년대만 하더라도 "아웃사이더"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을 정도로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하는 것이 하나의 "멋"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두가 주류적이고 평범한 삶,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회사에 들어가 결혼을 하고 출산과 양육을 거쳐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는, 지금도 여전히 유니콘처럼 사람들 마음 어딘가에 박혀 자리잡고 있는 환상을 좇을 때, 그런 삶을 과감히 포기하고 내 멋대로 살겠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서 센세이션이었고 "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다시금 인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싸/아싸의 구분짓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among us를 플레이한 후 "인싸겜"이라는 단어를 만나고는 말할 수 없는 어색함과 어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싸"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인싸겜을 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죠.
학창시절에는 키도 작고 허약해보이는데다 내성적이어서, 대학시절에는 술도 안먹고 누구와 어울려 지내길 좋아하지 않아서 늘 수업이나 듣고 책이나 읽다가 소수의 친한 친구들만 사귀던 아싸의 전형이 바로 저였습니다. 점점 그것과는 반대 성향이 개발되며 어느 정도 균형을 잡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도 인생의 경로는 늘 아싸인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인스타 갬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죠.
그런 제가, 같이 among us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싸로 분류되는 느낌을 받으니, 그 인싸와 아싸라는 게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학창시절 교과서로 배우고 몸으로 체험했던 "또래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설명 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무엇이 유행을 하든, 어떤 스타일이 힙하든, 중요한 건 "그렇다더라"는 어떤 것을 그대로 복제하고 수행함으로써 "안"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계 안의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고 상호작용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마 이러한 안과 밖의 끊임없는 직조와 변주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인싸가 되는 것"에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만드는 "또래집단"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잊고 지나칩니다. 제가 아무리 아싸라 해도, 흔히 말하듯 "아싸 속의 인싸"일 수도 있고, "인싸 속의 아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20대와 30대, 장애와 비장애, 취미, 거주지, 직업 등 우리는 잠재적 "또래집단"의 엉킨 실타래 속을 헤엄치지만 정작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착시는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들어갈 (Inside) 수 있는 집단을,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음에도, 변치 않을 어딘가를 찾아 쉬지 않고 길을 떠납니다. 목이 말라 쓰러지기 전 눈 앞에 아른거리는 오아시스를 향해 남은 힘을 다해 달리지만, 결국 그것이 신기루임을 깨닫고 눈을 감으면, 그 모든 것이 꿈이었으며 결국 진정한 길은 내 안에서 시작됨을 알게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똑같이 즐기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어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들어가는 (Inside) 사건은 관계망으로 넘실대는 듯 하지만 정작 내가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깨달음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들어가기'가 건강하고 즐겁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자신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그것을 '절대적 환대'라고 명명합니다. 절대적 환대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이 지구상 어딘가, 사람 사이 어딘가에 그를 위한 장소를 남기는 것이며 그의 존재를 알아주고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대하는 것이죠.
"건강하고 즐거운 인싸됨"이란 게 있다면, 저는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욕구와 행복을 위한 조건들을 잘 파악하여 그것을 충족하고 서로 나눌만한 모임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안에서 당신처럼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낀 한 사람이 자신의 비이성애적인 성적 지향을 커밍아웃 했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커밍 아웃 이후에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이전처럼 당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돕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뭔가 계속 신경쓰이지만 그런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특별한 인간'인가요?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건 인싸와 아싸라는 기준점은 늘 바뀔 수 있기에 어느 한 쪽을 좇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자각일 겁니다. 인싸와 아싸라는 경계를 잘 이용해보려는 건 파도가 들락이는 백사장에 지워지지 않을 선을 긋는 일만큼이나 힘이 빠지는 노력입니다. 인싸와 아싸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울타리를 만들었다면 그 안의 구성원들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사회적 성원권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만든 이 울타리 또한 언제든 그 모양과 크기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울타리를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환대'할 때, 그 울타리가 튼튼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인싸와 아싸라는 이름표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 수고는 더 이상 필요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자, 나와 당신, 우리 사이에는 among us 무엇이 있나요? 적어도 인싸와 아싸라는 표식은 이제는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