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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Feb 10. 2021

소수자를 바라보는 대중의 눈

2021년 2월 10일 수요일 오늘, 서울 지하철 4호선에서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연착 시위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SNS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오갔는데, 그 중에 한 분의 타래를 그대로 옮겨 와 비판해보고자 합니다.




피해를 봤으면, 가해자에게 따져야지 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피해를 봐야하지? '이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라는 것은 핑계 밖에 안된다고 본다. 합일된 여론을 조성해도 모자랄 판에 제3자들을 두편으로 편가르기 시켰다. 심지어 우호적인 사람들도 당신들을 위해 움직여 줄 것 같은가?



비폭력운동에서는 투쟁을 위한 역장 force-field을 분석합니다. 이 중 하나가 대중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인데, 크게 "적극적 반대-소극적 반대-중립-소극적 찬성-적극적 찬성"으로 나눕니다. 위와 같은 의견은 소극적 반대 쪽에 가깝습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뇌는 자신의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정보와 인식의 스펙트럼을 취사선택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선입견, 편견, 차별(적 인식)입니다. 이건 어느 정도 필요악인 게, 집 문을 나설 때 문을 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면 아마 엄청난 심리적인 에너지 소모가 있을 것이고, 누군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할 겁니다. 그러니 선입견, 편견 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인간의 인식 한계선을 그어주어 효율적인 에너지 투여가 가능한 일상을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의 선입견과 편견이 타인과 연관될 때 문제가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내가 그어놓은 인식적 한계선 너머에 존재하는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과 공포는 혐오를 차별로 연결짓는 데 좋은 구실이 됩니다.


저 트윗의 작성자가 보여주는 인식은 차별과 혐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나는 제 3자이며, 피해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시위 방법은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에서 나는 그들이 받는 차별에서 무관한 존재이며,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그들을 '도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권리(권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인간이 낯선 존재에 대한 불안이나 공포를 표현하는 정제된 방식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태도는 실제 투쟁하는 당사자에게는 가해로 작용합니다.


대다수의 대중이 이러한 가해적 태도를 보일 것을 알면서도 '시위'라는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그러한 불편감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장애인 이동권을 인식할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호적인 사람들도 당신들을 위해 움직여 줄 것 같은가?"라는 글쓴이의 발언은 틀렸습니다. 이러한 시위는 적극적/소극적 반대의 편에 있는 글쓴이와 같은 이를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옹호하는 사람도 그저 사회적 윤리관 속에서 자기는 정의롭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냉소주의에 찌든 하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만족감"을 얻을 명목을 찾았을 뿐이다. 정말 그 중 극소수만이 실질적으로 타인을 돕는다. 그것이 현대사회니까.



무슨 근거로 현대사회에 대한 이런 분석을 자신있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냉소주의에 찌든 하등한 인간"은 글쓴이 본인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썩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렇게 휩쓸려 사는 건 아닙니다. 그게 현대사회입니다.


휠체어를 끌고 들어오면 시민들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며 환영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가? 퇴근시간대에 일에 지친 사회인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집에 빨리 가지 못하는 것보다 피곤한 일이 몇이나 더 있을까.



선입견과 편견이 발전하여 차별과 혐오를 낳으면, 내가 보는 세계와 인식의 경계선이 강화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말을 자신있게 하게 되는 것이지요.


훨체어를 끌고 들어오든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함께 들어오든 그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회가 차별이 "적은" 사회이며,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실제로 누군가의 "박수와 환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늘의 시위를 통해 "퇴근하는 비장애인이 연착으로 인해 겪는 피곤함보다 더 큰 고통"을 눈 앞에서 전달한 사람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남긴 건, 그만큼 당신이 차별과 혐오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지를 얻으려면 지지층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형태의 시위는 정말 부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의 이동권,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권리를 찾기위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친다면 그것은 100%의 설득력을 끼치지 못한다.



위에서 역장force-field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그 긴 투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척이 더딘 투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장애인권 투쟁입니다. 위에서 썼듯 시위는 타인에게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의도적인 불편함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시위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시위의 기능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류의 의견을 볼 때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 교육이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컨데, 어느 빵집 주인이 갑자기 건물주에 의한 퇴거 통보를 계약기간 중에 아무런 이유없이 받았다고 해보자. 이것은 분명히 권리를 빼앗긴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주인장은 그 건물 앞을 지나가는 시민을 계속 붙잡고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소매를 붙잡으면서, 과격하게. 이러면 행인들은 주인장을 어떻게 생각할까? "딱하긴 하지만 귀찮게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100퍼센트 일대일대응이 되는 비유는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으로써 이해될 것으로 사료된다.
결론을 다시 내려보자면,  의도는 좋았으나 방법이 잘못되었다. 백번 양보해서 승강장(플랫폼)에서 시위를 했어도 통행량이 많은 시간대에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차지하여 불편하게 한다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누가 이런 시위를 기획했는지 모르겠으나  약자라는 라벨 뒤에서, 동정심이라는 방패를 두르고 이런 이기주의적인 행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권리가 있다. 그것을 알아야한다.



예컨 '대'입니다. 아무리 SNS라지만 기본적인 맞춤법은 지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답변은 위에서 서술한 제 의견으로 대신합니다. 끝으로 제가 이 트윗에 주목한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이 트윗이


1. 자신을 제 3자로 놓고

2.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이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3. 투쟁 당사자와 자신, 그리고 가해자가 서 있는 지형을 평면적으로 인식하여

4. 결과적으로 현실의 투쟁의 장에서 악영향을 끼치는


대중의 보편적인 인식을 잘 투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이 분처럼 "우리를 납득시킬만한 방식으로 설득하라"고 요구하는 이들 중에 실제로 찬성 입장으로 선회하는 분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여러 영역에서의 투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내린 저의 신중한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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