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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Feb 18. 2021

발.화.지.점.



요즘 뜨는 클럽하우스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던 차에, 페미니즘 어쩌구 하는 방이 보여서 무슨 얘길 하는지 궁금해 들어갔습니다. 모더레이터가 프사로 증명사진을 걸어놓은 남성인 것부터가 쎄했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걸까요?


꽤 많은 사람이 리스너와 스피커로 참여하는 그 방에서는 이미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남성은 모더레이터 포함 두 명이었는데, 다수의 여성들이 어이없음을 토로하며 그들의 주장에 반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싸움 구경이라 흥미롭게 내용을 들어보니, 한 남성 스피커가 줄곧 전체적인 측면을 totally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여성 스피커들이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그에 반박을 하고, 젠더권력관계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지점들을 역설했지만 그는 말로는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totally만을 반복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남성 스피커의 비논리적인 -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논리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고 믿는 듯 보였습니다. - 주장에도 불구하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작용하는 권력이 그때 그때 달리 배열될 수 있으니 그 지형도를 잘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른바 totally에 대해 여남 스피커 공히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도 끼어들어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하지 못하고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여기 제 공간에 조금 남겨보려고 합니다.




남성 스피커의 totally는 사실 그 진술 자체만 놓고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인문사회철학이론 개론서만 들춰봐도 총체적, 복합적 등등으로 묘사되는 조감적 태도는 이제는 공리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입니다. 학문이란 게 현실을 잘개 쪼개는 게 목적이 아니라 관점을 재구성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니 당연한 귀결이지요.


다만, 문제는 그가 어느 지점에서 totally 발화를 했느냐는 데 있습니다. 그는 페미니즘을 논하자는 그 자리에서, 젠더 권력이 최우선적으로 작동하는 사안에 대해 totally를 외쳤던 것입니다. 이게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대다수의 남성이 여전히 같은 태도로 페미니즘과 퀴어, 젠더 이슈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양할 겁니다. 첫째로 정말 totally한 관점이 중요하다고 믿기에 페미니즘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페미니즘도 하나의 관점이기에, 그것이 놓칠 수도 있는 지점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보충하는 의미로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쉽게도, 그리고 대다수 남성이 입으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마음으로는 깊이 담고 있을 그 어떤 관념체의 작동이 진짜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성은 논리적인 주장을 개진할 능력이 떨어지고 - 또는 없고 - , 그렇기에 페미니즘은 이론이라기에 여전히 부족하며, 그것은 합리적인 남성에 의해 보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입니다. 이러한 관념은 소위 이퀄리즘에서 남녀의 동등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식 차원으로 부상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럴 필요없이 남성은 인간이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존재임이 천지신명께 맹세코 자명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성이 '인간이 되면서', 남성은 드디어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타자를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었기에, 이제는 인간 남성이 인간 여성과 무엇이 다른지 비교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왜 같은지를 고민하라는 강요를 받게 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적 움직임인 '백래시'는 이 강요에 대한 반발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남성은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기에, 다시 말해 권력 구조에서 '주인'의 자리에 내려올 수 없기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지 궁리하며 다양한 전략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합리적이고 근거가 없는 관념체가 그들 논리의 동력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논쟁의 상황에서 이건 명백한 무리수임에도, 남성은 최악의 경우 비장의 카드로 정신승리를 시전하려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앞 뒤가 다른 자신의 논리가 뻔히 읽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논쟁에서 벗어나면 자신이 가진 권력적 우위의 일상은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 반대편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고된 일상이 놓여 있기에, 논쟁에서의 합리적인 우위가 주는 효용은 휘발되기 일쑤입니다.


totally 라는 발화를 이러한 전체적인 구도 아래서 이해하면, 그 남성 스피커가 얼마나 명백하게 여성혐오적이고 반페미니즘적인 발화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totally를 하필이면 그 자리에 놓음으로써 여성들의 버튼을 누른 것이지요. 일견 공리처럼,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의견이 이 맥락과 지점에 놓이자 화학반응을 일으킨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공리적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처럼, 같은 말이라도 어떤 맥락 어떤 지점에 놓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화용론적 공리입니다. 예를 들어 "잘 해결하지 그랬어?"라는 말은 그 자체로만 보면 '일이 잘 해결되어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전제를 되새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애인한테 실수했는데 사과 안했다고 삐쳤어." 뒤에 붙을 때와, "부모님이 몇 년째 나를 들들 볶아대서 결국 따로 살게 됐어." 뒤에 붙을 때 산출될 감정과 반응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전자에서야 적당히 응대해주는 말이 되겠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심한 말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남성이 "나도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최소한 그 뒤에 자주 따라붙는 "하지만..."을 떼어버리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도 화용론적 공리가 적용되고, 그 "하지만..."이 어떤 의미인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정말 페미니즘에 동의하고 있다면, 일단 닥치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발언이 발화지점에 따라 오해되는 불상사를 피하고 싶다면, 페미니스트의 대화에 주목하며 내가 끼어들고 빠질 자리를 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클럽하우스에서 교회 내 페미니스트의 대화 자리에 입만 산 남성 목사들이 끼어들었다가 결국 발언권을 빼앗겼다는 웃픈 일화는 남성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동등한 발화자로서 여전히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그리고 닥치고 듣다보면 깨닫게 될 겁니다. 내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말을 섞는 것보다 지금 당장 일상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크고 작은 실천이 훨씬 많고 시급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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