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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덕질

찾았다, 오마이걸!

by 엔틸드


고백하자면, 저는 케이팝의 상징과도 같은 아이돌 시스템에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예전 인디씬에 심취했을 때는 아이돌계를 "주류 음악계"로 퉁쳐 비판할 정도로 호감이라곤 없는 사람이었죠. 심지어 그 소녀시대조차 노래 잘하는 태연만 좋아했고, 그 후론 간간이 윤하나 아이유의 "음악"을 조금 좋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음악적 관점과는 별개로 삶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여성 아이돌 (통칭 여돌)에 관심을 조금씩 갖게 되었고, 아무래도 처음에는 음악적인 연결고리가 되어줄만한 윤상 님이 참여한 '러블리즈'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고보면 여돌에 눈을 돌린 게 몇 년 되지 않은 것이죠. 그나마 러블리즈도 히트곡 / 타이틀곡 위주로 게임할 때 가끔 듣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시절 사랑했던 우리>는 예외로 매우 자주 들었습니다만.)


그러다 만난 게 바로 "오마이걸"입니다. 2015년 4월 21일에 활동을 시작했던 오마이걸이었지만 초창기 활동 당시 제가 알던 멤버는 메인보컬이자 예능보석인 승희, 리더이자 인상적인 웃는 모습으로 알려진 효정 정도였고 그땐 그룹명부터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와 참 특이한 스타일의 멤버들이 모인 걸그룹이군.'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더랬습니다.


그러다 "퀸덤"이 터졌죠. 보이그룹이 강세인 한국에서 드디어 걸그룹이 자신들의 끼와 재능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무대라는 소문에 은근히 관심을 갖던 차에, 제가 관심갖고 있던 러블리즈의 <Destiny>를 오마이걸이 리메이크한 버전이 멋지다는 평을 듣고 찾아보면서 제 입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였어요. 오마이걸에 빠지기 시작한 게..."


동양풍의 편곡, 동양풍의 여'전사' 컨셉을 잡은 것도 좋았고 멤버들 각자의 기본적인 춤과 노래실력도 돋보이는 무대였습니다. 효정과 승희만 알던 제게 다른 멤버들의 매력이 보이고 들리는 순간이 찾아온 거죠.


그렇다고 바로 덕질에 돌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살짝 설렜어>가 대박을 치면서 저의 귀에도 그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처음엔 돌핀도 별로였던 제가 어느 순간 오마이걸 1집부터 정주행을 하게 되었죠.


당시 저는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였습니다. 내면의 상태가 어두운 바닥이었죠. 아주 작은 삶의 즐거움이라도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 좋아하던 새로운 노래 듣기조차 하지 않은지 몇 개월 째, 어느 트랙 하나 버릴 것 없는 오마이걸의 모든 앨범이 삶으로 옴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덕질의 굴레에 빠져들게 되고 맙니다. 던던댄스 컴백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부턴가 저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교차편집 영상, 예능 클립, 멤버별 라이브 방송 등등을 찾아보며 모니터에 대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때부터 조금씩 내면의 깊은 수렁으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죠. 오마이걸이 저에게 분명 그런 힘을 주었습니다. 오마이걸이 저의 삶의 의미,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죠.




덕질엔 이유가 없죠. 사랑에 빠지는 덴 이유가 없으니 말입니다. "크리"(오마이걸 팬덤 애칭)가 아니라도 덕질을 하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물어보면 같은 대답일 겁니다. 제가 왜 오마이걸을 사랑하게 됐을까요? 왜 크리가 됐을까요? 저도 몰라요.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하지만 오마이걸의 매력이 무엇인지는 몇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1. 버텨낸 세월이 증명한다.


이건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미리 말씀드리면, 제가 알고 느끼던 아이돌 세계를 기준으로 한 겁니다. 지금 어딘가 오마이걸과 비슷한 길을 열심히 걷고 있지만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누군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제게 오마이걸은 다른 아이돌, 다른 걸그룹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미 7년째에 돌입한 그룹의 역사가, 그리고 빛을 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수명이 짧은 아이돌계,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걸그룹 세계에서 몇 년 동안 음원차트에도, 음악방송에도 그럴듯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버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EXID나 브레이브걸스 같은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죠. (물론 오마이걸에게는 '미라클'이라는 '기적'이 있지만요.)


그런데, 그럼에도, 오마이걸은 묵묵히 자신들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면서 그 보이지 않는 터널같은 시간을 견뎠고, 춤과 노래와 같은 개인의 기본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단단한 팀워크 또한 만들어 갔습니다. 이게 말이 쉬운 일이죠.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자기 길의 의심하게 마련이고, 그러면 중심이 흔들리고, 그러다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미로로 스스로 걸어들어가게 마련인데, 가뜩이나 7명이라는 작지 않은 규모를 가진 걸그룹이 그 안에서 한 마음으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를 다독였을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을 겁니다.


멤버들이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텼을지는 먼저 예능이나 라이브 방송에서 간혹 밝히는 속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멤버들은 공통적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도록 도와주며, 누군가의 탓을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실력을 쌓는 데 집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보컬 선생님조차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보컬 디렉팅을 해주고, 상대적으로 춤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멤버가 뒤쳐지지 않도록 돕는다는 것은 이 팀의 뚜렷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죠.


앨범을 들어보면 서로를 아끼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죠. 파트 분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킬링 파트는 보컬 역량이 떨어지는 멤버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고, 기교가 필요한 부분은 가장 능력이 뛰어난 멤버가 들어가되 그게 곡의 균형을 깨지 않도록 절제한다는 건 한 파트라도 더 등장해서 자신이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는 가수에게는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2. 뭔가 다르다. 다른 아이돌과는.


오마이걸 완전체가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처음 보았을 때, <전.참.시>에 나오는 일상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먼저 든 생각은 "정말 옴망진창이다."였습니다. 물론 흥과 텐션이 폭발한다는 좋은 의미입니다. 한 라디오 디제이가 러블리즈의 리더인 베이비소울에게 "비글 일곱 마리의 주인같다."고 표현했는데, 오마이걸은 멤버 전체가 비글인 느낌이니까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부럽기도 하고, 저렇게 놀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또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방송매체에서 저렇게 논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방송에서 매니저가 말했듯이 "회사에서 걱정할" 수도 있는 모습이지만, 거리낌없으면서도 사랑스럽게 자신들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말입니다.


리액션이 좋고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방송에 임하는 오마이걸의 태도는 멤버들끼리 있을 때 배가되는 이런 "비글력"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하게 진심을 표현하는 마음가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희한하게 어디에선가 티가 나는 리액션 덕분에 뻥을 치면 금방 들통나는 것처럼, 진심을 가지고 임하는 태도와 솔직함이 바탕이 되니 무엇을 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흐뭇한 기분을 갖게 합니다. 다른 아이돌이 아닌 오마이걸을 사랑하게 하는 오마이걸만의 매력이죠.


#3. 내 길을 간다. 누가 뭐라하든.


솔직함과 진심으로 무장한 태도는 방송에서만 나타나는 것 아닌 듯합니다. 음악에서도, 실생활에서도, 심지어 팬덤에게도 "On My Way"를 선언할 수 있는 멋진 멤버들이 모여있는 걸그룹이 오마이걸입니다.


오마이걸의 앨범을 정주행하다보면, 이런 장르다 저런 장르다 말할 수는 있지만 그걸로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몇 년 동안 스스로 만들어 온 오마이걸만의 분위기, 장르랄까요? 처음엔 청순, 아련, 몽환으로 알고 있던 오마이걸의 음악이었지만 제가 직접 음악을 들어보니 오히려 상큼, 발랄이 더 잘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상큼 발랄 쾌활의 상징인 <Liar Liar>나 <컬러링북>은 제가 애정하는 넘버입니다.


대중의 반응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아이돌계에서, 아직 자리잡지 못한 걸그룹이 자신들의 색깔과 이야기를 지키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단지 버티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분명해야만 하죠. 이 또한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회사는 수용하며, 마지막으로 멤버들이 그것을 완성해 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오마이걸입니다. 그렇게 걸어온 자신들만의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오마이걸이 만들어낸 앨범의 퀄리티로 증명되고요.


오마이걸의 "On My Way"가 통했음이 증명된 결정적인 순간은 역시 "퀸덤"일 겁니다. 오마이걸이 지금의 "컨셉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건 그간 자신들의 앨범을 통해 꾸준히 다양한 시도를 했고, 그런 가운데 보컬과 랩, 춤 등이 서로를 소외시키지 않고 반대로 잘 표현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리엔탈, 걸크러시, 섹시 컨셉 등 그 넓은 스펙트럼을 훌륭히 소화할 수 있었죠. 꾸준히 자신들의 색깔을 살피고 그 색깔을 펼치기 위해 자신들만의 길을 걸은 끝에 얻어낸 값진 능력입니다.


더 매력적인 건 오마이걸의 멤버들이 개인의 삶에서도 "My Way"를 열심히 외친다는 점입니다. 외모를 비하하는 악플에 당당히 대처하고 (승희), '나'를 알아보고 질문하기 위해 독립을 하는 (효정) 멤버가 있는 걸그룹이 오마이걸입니다. 멤버 전체가 외부의 시선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멤버들도 서로 그런 노력을 지지하고 응원해 줍니다.


위에서 언급한 <전.참.시>에서 차에 탄 다른 멤버들이 노래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출 때 혼자 곤히 자는 아린이의 모습, 그리고 그런 아린을 깨우거나 타박하지 않는, '다름'을 존중하는 모습에서 오마이걸의 멤버들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산다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삶의 기본 태도로 장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팬(크리)들도 이러한 멤버들의 태도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팬과 가까이 소통하고 또 팬을 아끼는 오마이걸이지만,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거나 발언을 할 때는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농담으로 한 것이지만 어떤 걸그룹 멤버가 팬덤에게 "생각하자" 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또 자신이 "밈춘기"라며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히 하려고 애쓸 수 있을까요?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신을 지키고, 또 알아가고, 성장하며, 팬들이 그런 자신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또한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건강한 동기에서 비롯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긴 무명의 시간을 버티며, 그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신만의 길과 자신의 삶을 지키는, 그런 멋진 그룹이 제가 사랑하는 오마이걸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던던댄스라는 좋은 곡을 가지고도 음원차트에서, 음악방송에서 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 아쉬워하는 저를 비롯한 많은 크리들에게 멤버들이 오히려 고마움과 사랑을 전할 때, 말로 할 수 없는 아쉬움과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멤버들이 정말 크리들 때문에 행복해하고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하게 덕질을 하는 지금 이 순간 이 시점, 던던댄스의 활동이 끝난 지금, 멤버들이 입버릇처럼 자주 하는 "아직 보여줄 것들이 더 많이 남았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오래오래 영원히 그렇게 하고 싶다."는 승희의 바람은 아마 멤버 모두의 바람이기도 할 겁니다.


이 길고 서툰 사랑 고백의 끝을 뭐라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중이지만, 어떤 좋은 말로도 부족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문득 떠오르는 건, 오마이걸이 등장할 때마다 외치는 바로 그 멘트, "찾았다, 오마이걸!" 제가 이제야 드디어 찾아낸 오마이걸과 함께, 각자의 삶에서 서로의 '기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미 오마이걸은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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