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페어 컬처>, 볼프강 M. 헤클
여러분은 최근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고장난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유선 이어폰? 핸드폰? 세탁기? 드라이기? 멀티탭?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유선 이어폰이 안 들리면 버리고 편의점에서 사면 되고, 핸드폰 액정이 박살나거나 이유없이 느려지면 신형 제품으로 바꾸면 되니까요. 그렇게 슬쩍 흘려낸 물건은 우리 기억에서도 금세 흐려지게 마련이죠.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선 이어폰 (심지어 제가 이어폰을 처음 쓰던 때에는 블루투스라는 기술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 고장이 나서 버리고 새로 샀다기에, 예전에는 이어폰이 단선이 되면 그것만 전문적으로 수리해 주던 이른바 '장인'이 있었다며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저보다 많이 어렸던 지인은 그런 건 상상조차 못하더군요.
블루투스 이어폰이 나오고 이어폰 자체가 1인 1이어폰이 될 정도로 보편화된 지금, 애초에 단선될 때까지 쓰는 경우도 드물고 단선이 되면 버리고 아주 비싼 제품이 아니라면 바로 아무 제품이나 새걸 구입합니다. 지금은 그런 대접을 받는 유선 이어폰은 한 때 어떻게든 소리가 나오게 하려고 이리 꼬고 저리 꼬아서 최대한 나오게 하려 애쓰는 꽤 귀한 물건이었지만요.
저는 작년까지 에어팟 2세대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게 윈도우 계열과는 확실히 호환성이 안 좋은지, 몇 번 윈도우 노트북에 물려서 화상회의를 했더니 어느 순간 마이크가 먹통이 됐습니다. 에어팟은 처음이라 습관적으로 수리가 가능한지 찾아보니 수리가 불가능하다더군요. 그냥 버리기에는 들리기는 잘 들려서, 싼 값에 중고거래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수리권 Right To Repair 이라는 개념에 대해 처음 알았습니다. 요즘의 디지털 기기들은 예전처럼 일부러 수명을 정해놓고 출시되는 것을 넘어서 배터리 교체 등의 수리를 시도할 수 없는 구조로 출시되고, 이 때문에 같은 제품을 계속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수리할 권리를 침해당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기에 내가 산 물건을 수리해서 쓸 권리를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오늘 소개드릴 이 책 <리페어 컬쳐>는 독일인인 저자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물건들을 어떻게 만나고 고치며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나가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내 물건을 고치고 재사용하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 인문학적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비추어줍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하면서 세상은 우리에게 제품을 정해진 사이클 안에서 소모하고 소비하도록 부추깁니다. 핸드폰은 2년이면 배터리가 급격히 성능저하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고, 내구성이 생명인 것처럼 여겨지는 제품들 또한 알 수 없는 고장으로 교체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 책에서는 프린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어찌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고, 이로 인해 제한된 지구의 물질 자원은 현재 급격하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고쳐 쓰는 행위는 이렇게 거대한 소비와 소모의 물결을 거스르는 작지만 중요한 저항이자 창조의 행위가 됩니다. 이 행위가 창조인 이유는, 물건을 고쳐 재사용함으로써 그 물건의 기능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이고, 또한 고치는 행위 속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의 계기들을 쌓아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어폰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불과 어제 있었던 일이네요. 저는 3년째 쓰고 있는 3.5mm 플러그 규격의 이어팟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음악을 듣다가 리모트 컨트롤러를 작동시켰는데 볼륨조절도, 곡 넘기기도 안되는 거죠. 그 때부터 제 뇌는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먼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변수를 제거합니다. 접촉되어 있는 아이패드의 단자는 불과 며칠 전까지 문제 없이 사용해 왔으니 확률은 낮습니다. 게다가 이어팟은 가끔 음악을 들을 때 한 쪽이 안나와서 플러그를 돌리면 정상으로 나오곤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인은 이어팟 플러그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다음은 추정입니다. 그렇다면 소리는 잘 나오지만 뭔가 접촉이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리모트 컨트롤러만 작동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저는 이어폰을 뺐다가 다시 꽂아봤고, 리모트 컨트롤러는 정상 작동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일까요? 평소에도 꾸준히 이어폰이 문제를 일으켰고 그 문제가 플러그 부위에 있음이 분명해졌으니, 인터넷을 뒤져서 그 부분의 접촉 불량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차례입니다.
물건을 고치는 행위는 새로 물건을 사느라 돈을 낭비하지 않고 잘 쓸 수 있는 물건을 계속 쓸 수 있게 되었다는 효율성만을 선물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에 몰두해서 원인을 찾고, 변수들을 제거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해서 오류를 잡아내고, 다시 시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저자에 의하면 머리와 몸이 함께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운동이자 전체를 파악하는 힘을 길러주는 훈련입니다. 제가 이어폰이 이상하다고 즉시 버리고 새 제품을 주문했다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이어폰의 작동 원리나 내 물건의 컨디션을 알아채는 경험은 얻지 못했을 겁니다.
한 가지 더, 제 경험담입니다. 이 또한 불과 며칠 전의 일이네요. 회사 동료와 차를 타고 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핸드폰 배터리 이야기가 나왔는데, 동료가 얼마 전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이리 저리 바쁜 일정이 있어 밖을 돌아다니다가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되었는데, 카드고 뭐고 핸드폰 안에 내장되어 있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더라는 겁니다. 충전기는 가지고 있어서 간신히 조금 충전을 하고 위기를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핸드폰이라는 기기에 얼마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는 거죠.
그러면서, 지금 자라나는 세대만 봐도 핸드폰 액정 터치로 모든 것을 경험하기에, 심지어 화폐조차 만질 일이 없기에, 촉감 등의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액정에 다 빼앗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핸드폰은 둘째치고 아주 단순한 물건인 연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원리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인지, 연필을 가지고 스테인리스 재질에 글씨를 쓰면 왜 써지지 않는지, 호기심을 가질 기회와 몸으로 경험할 기회를 빼앗겨 버린 채 과정 없이 결과만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리페어 컬처> 저자 또한 같은 흐름의 고민을 던집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기술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서도 안되고 그렇지도 않지만, 어떠한 기술의 역사와 그 과정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널린 호기심 꺼리들에 대한 관심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서울 을지로에는 세운 상가가 있습니다. 재개발과 관련해서 몇 년째 떠들썩한 동네이지만, 변함없이 그 곳을 지키고 있는 '기술 장인'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키보드 (건반)가 고장나서 살펴보니 어댑터가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시 세운상가에는 전압 맞춤으로 어댑터를 만들어주는 유명한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어댑터를 구입해 키보드를 다시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리페어 컬처>의 저자가 사는 독일과는 달리 한국은 기술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장난 물건을 버리기보다 고치려고 할 때, 몇 단계만 거치면 이 곳을 지키고 있는 기술자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지는 것이죠.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고치는 문제를 상의하더라도 기술을 가진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내가 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둘 사이의 장벽은 급격하게 허물어진다."고요. 어떤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면 먼저 도움을 요청해 보라고요. 고장난 물건을 고치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누군가가 호의를 가지고 도와주는 와중에 우리는 리페어 컬처를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한 올 엮는 셈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 둘씩 더 많이 연결되면, 그래서 물건을 고쳐 쓰는 일이 당연해지고 재활용과 쓰레기, 자원 순환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 얼마 쓰지도 않았던 물건을 버리며 찝찝함을 느꼈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일상이 뭔가 무기력하고 지루하다면, 분명 집 어딘가에 하나씩은 있을 고장나거나 헤진 물건들에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물건을 고치면서 얻게 될 경험과 성취감은 생각보다 훨씬 짜릿합니다. 나도 뭔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도 생기고요. 물건을 버리기보다는 아까워서라도 어떻게든 붙들고 오래 쓰려고 해왔던 저도, 이 책 <리페어 컬처>를 읽으며 내가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노력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에 새로운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 글을 마치면 이어팟 플러그를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되살릴 수 있는 검색을 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하나 둘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 언젠가 세상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지만 근거 있는 희망을 가지고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