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일 수 있겠지만 이제야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봤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이놈의 나라가 영어에 미치더니 이젠 대놓고 음역을 밥먹듯 하는구나'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니 번역할 방도가 없었겠다 싶었다.
뒷북일 수 있겠지만 최근에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봤다.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지인들이 왜 이 책에 엄지를 세웠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싶었다.
여러분이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양자경은 <ㅇㅇㅇㅇㅇㅇ>의 주인공이고, 물고기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인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데? 책을 끝까지 보면 알겠지만, 물고기(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과학적인 사실이다. 근데 이게 엄청난 스포일러다. 에세이에 스포일링이 있다니...여튼 물고기가 주연급인 에세이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포스터와 영화 내용이 찰떡으로 어울린다는 걸 말이다. 저 원들의 의미도, 곳곳에 깔린 오브제들도. 다만 한국어로 표기된 "그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구할 거야!"는 차라리 안 들어가느니만 못한 것 같다.
예전엔 수수한(?) 학술서 따위에, 글자에 먼저 관심을 갖던 내가 요즘 책 표지 디자인에 먼저 끌리는 사람이 되고서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책이 가산점을 얻게 되었다. 이 정도면 음, 합격. 과학 에세이 느낌이 물씬 풍기는군.
양자경과 물고기로 대표되는 이 영화와 책은 나의 올해의 작품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22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 두 작품에서 공통된 주제를 읽었기 때문이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 앞에서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영화의 제목은 한국어 제목에서 <ㅇㅇㅇㅇㅇㅇ>라고 자음놀이 처리되어 핵심 주제를 드러내 준다. 베이글과 눈알로 대비되는 삶에 대한 관점, "모든 것은 허무하다"와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두 서사의 얽힘이 그것이다. <물고기...>는 "인생에 의미같은 건 없어. 순간 순간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거야."라는 아버지의 충격선언(!)에 맞서는 저자의 몸부림을 담고 있다.
2020년의 부초처럼 떠다니던 무의미의 시절을 벗어나 새로운 걸음을 내딛었지만, 버틸 힘이 더 생겼을 뿐 생의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한 건 아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나 또한 수시로 찾아오는 고독 속에 이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이며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허무와 무의미의 총체 앞에 몸부림치곤 한다. 그저 타고난 성향 안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를 바지런히 찾아볼 뿐.
두 작품의 해결책은 궁극적으로 비슷하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와 관계하는 이들과의 사소해보이는 이 시간을 충분히 마주하고 즐기고 누리라는 것. 아무리 빡빡하고 심각한 인생의 굴곡을 지난다 할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오히려 사소한 장난과 농담과 여유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나에 갇히지 않고, 실제로 나라는 존재가 갇히지 않고 열려있는 존재임을 알고 생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고.
점점 우리를 조여 오는 기후위기,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 중국의 장기독재화, 미얀마와 중동 등 세계 각지의 전쟁들, 10.29 참사, 봉화 광산 인부 매몰 등 우리를 불안과 공포에 빠뜨리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절망한다.
그럼에도 이 두 작품과 같은 예술의 힘은 말한다. 그렇게 몰두할수록 우리는 '나'에 갇히게 되고, 모든 가능성을 다 이뤄본 양 교만하게 굴고, 미리 예단하고, 절망하고, 회의하고, 몸과 마음은 뻣뻣해져만 가고, 그렇게 굳어져 '돌'이 되어버린다고. 하지만 지금 내가 절망하는 이 시간 어디에선가는 다른 미래를 그리며 움직이는 누군가가 있고, 그들은 생각보다 가까이 내 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고.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친절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우리가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휘젓고 다닐 때, "물고기는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물고기는...>에서 평생을 어류 분류에 힘썼던 학자가 사망한 뒤 과학계는 분류체계에서 "어류"란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일생을 쏟아부은 학자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생의 의미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소식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채 발견하지 못한 생의 다양성이 숨어있고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임을 알 수 있다면, 그런 자세로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ㅇㅇㅇㅇㅇㅇ> 후반부 최후의 격투 씬에서 주인공 양자경은 지금까지의 전투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싸움을 한다. 적을 쳐서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읽어내어 사랑, 우정, 보살핌 등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하여 물리치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상대의 힘을 받아치지 않고 흘려보내는 주짓수를, 어떤 면에서는 나와 너의 상생을 도모하는 비폭력 투쟁을 닮았다. 누군가의 진부한 표현처럼 정의와 자비가 동전의 양면이라면, 우리는 필요할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열심히 뒤집으며 새로운 미래를 그려낼 수 있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 등 소수자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도 분명 같은 주제로 비슷한 결론을 낸 예술 작품들이 많았을텐데도 유독 이 두 작품이 내게 와닿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아마 이 소수자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삶을 마주한 기록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악이 강하게 창궐할수록 그에 맞서는 이들의 색채도 더 뚜렷해지는 법이다. 소리없이 버티던 작은 이들이 이렇게 서사를 만들어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작업물도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여전히 모르고 있다면 귀 기울이지 않고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예술은 말한다. 나와 당신이 갖고 있는 생의 허무함, 무의미함은 결국 서로의 경계를 넘어 돌봄으로써, 그럴 수 있는 구조를 상상하고 실현함으로써만 '무화'할 수 있다고. 자연과, 비인간과, 사람이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라고. 환경 문제,국제관계,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기술... 그 모든 것은 이제 바로 이 "ㅇ", 서로의 눈동자를 향한 시선으로 수렴되어야 한다고.
지금이야말로 인류의 최대 위기이자 마지막 기회가 공존하는 시기가 아닐까? 허무의 베이글로 빨려들어가느냐,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삶을 지켜내느냐, 나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두 작품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