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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Oct 27. 2021

<생각한다는 착각> 그리고

본질주의에 반대한다

인류는 오랜시간동안 다양한 것들과 싸워왔습니다. 전염병, 전쟁, 가난, 차별, 편견, 고정관념 등.

그러다보니 그 배후에는 어둠을 만드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빛을 만드는 무엇이 있을 거라는 상상도요. 제가 알기로 이런 본질주의는 서양정신사에서 더 두드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근대에 들어서는 프로이트로 인해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이 모든 본질주의적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세 권의 책 중 첫번째 책은 바로 이 무의식에 대해 최근의 뇌과학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정면으로 반박한 도전적인 책입니다. 요지는 단순합니다. 원제가 바로 그 요지인데, Mind is Flat. 간단히 번역하면 마음은 평평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이 있고, 무의식에서는 우리의 자아, 동기, 의미, 해석, 욕망, 꿈, 기준 등이 우리도 모르게 만들어진다는 설명은 오늘날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모르는 것은 무의식의 작동이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를 인지하고 그것을 해석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통합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미 매우 짧은 시간에 그리고 우리도 모르게 해석된 결과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의 저장소라고 상상하는 장소에는 무의식이 아니라 전혀 정리되지 않은 기억의 파편들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없는 무엇을 경험할 때, 그래서 저게 무엇인지 '해석'되지 않아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뇌는 기억의 파편들을 뒤져 그것들을 재료로 해석을 만들어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스쳐가는 많은 생각들은 바로 우리가 과거에 쌓아놓았던 그 기억의 파편들로부터 즉흥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무의식의 장난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이 평평하다, 다시 말해 무의식이라는 알 수 없는 깊은 차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쌓아놓은 기억들, 해석의 결과물들, 그런 것들이 평평하게 여기저기 흩뿌려져있을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충격적일 것입니다. 저자가 윌리엄 제임스나 데이비드 흄 등을 인용할 때는 그를 특정한 분파로 몰아놓고 '뚜까' 패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의식이라는 게 실제 없다 해도 그닥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들 찾아보려고 발버둥칠 에너지를 좀 더 의미있게 쓸 수도 있을테니까요.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평평한 마음을 가진 인간의 지적인 유연성, 상상의 힘, 끊임없이 또다른 해석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인류의 유일하고도 강력한 힘이라고 말합니다. 제게는 이 주장이 '가능성은 인간의 가치판단을 넘어선 채 늘 존재하고, 우리는 늘 그 어디쯤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가능성을 실현하고 해석하여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들렸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역시 직접 책을 확인하는 게 좋겠죠? 과학에 문외한인 제가 놓치거나 잘못 소개한 부분이 있을테니까요.







이 책의 내용에서 저를 사로잡았던 부분은 감정과 이성에 대한 구분, 그리고 은유의 중요성을 다룬 구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개드릴 두 권의 책은 감정과 이성의 관계, 은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우리 일상 속의 본질주의를 환기하거나 깨부수고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착각>, 그리고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모두 우리가 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흔히 인식하는 방식인 "이성과 감정의 싸움"이라는 관점을 해체해버리고, 감정의 작용으로 느끼는 그것조차 뇌의 작동, 다시 말해 이성적인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우발적으로 홧김에 사람을 죽이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재된 감정적 기제가 일으키는 반응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 감정사례를 따른 것이며 생리적 반응 또한 뇌 속에서 우리 모르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해석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것입니다.


설령 내면의 존재,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안에 본질적으로 구성된 세계의 모판이나 무의식적 필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뇌 속에서 벌어지는 작용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무의식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세계를 지각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뇌 속에서의 일들이겠죠. 간의 대사작용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생각한다는 착각> 초반부에 등장하는 소설의 예처럼 우리의 세계 인식 또한 이처럼 그 시작이 해석에 기대고 있고 의미들이 뇌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소설에 대한 인식과 실제 세계에 대한 인식이 실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통합성과 전체성, 일관성, 방향성들은 다 무엇일까요? 그것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저자는 '은유'를 꺼내듭니다. 저자의 설명은 조지 레이코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지언어학 개념과 아주 비슷합니다.


은유는 일상생활로부터 자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우리의 인지체계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근원적인 단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음이 따뜻하다", "생각이 깊다"에서 마음과 생각은 물질이 아님에도 물질을 묘사하는 표현을 접목시킵니다. 전혀 다른 범주가 어우러졌음에도 우리는 저 문장들이 가리키는 내용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자 떠올리는 심상이나 구체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세계는 이렇듯 은유로 가득 차 있고, 그 은유를 통해 촘촘하게 짜인 의미와 해석의 총체가 바로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입니다.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 개념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스승이자 세계적인 진보진영 석학으로 불리는 놈 촘스키와의 논쟁으로도 유명합니다. 촘스키의 인지언어학은 한마디로 본질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지언어학계의 이단아였던 레이코프는 위에 짧게 언급한대로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풍성한 해석들 (은유)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죠. (그럼 은유가 본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은유라는 개념 또한 우리의 해석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본질-비본질이라는 계층구조화는 무효하게 됩니다.)




위에서 소개한 세 권의 책 모두, 본질주의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흐름 위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직관, 상식, 습관을 흔들고 뒤집으려는 시도는 과학적 성과를 근간으로 세상의 모든 분야로 확산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흐름에 발을 담그면서 한 편으로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럽지만 한 편으로는 있지도 않았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후련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각자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뚜렷해지는 듯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좋은 자극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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