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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덕질

나의 덕질 이야기 (3)

덕질은 신나게!

by 엔틸드


하이큐 : 덕질이 나이를 앞서가기 시작했다


냥이의 간택으로 집사가 되는 것처럼 덕통사고 또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덕질의 대상이 내 눈에 들기까지의 과정에 삶의 맥락이 자분자분 속삭이지 않으리라 속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하야, 처음으로 독립하여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찾으며 그 필수 아이템으로 장만한 것 중 하나는 하이큐 전집이었다.


인기 배구만화 <하이큐!!!>를 처음 안 건, 역시 지인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 사람의 피드를 채우기 시작한 배구 만화 이야기를 보면서 궁금해하던 차, 무심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본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필이면 하이큐 사상 스토리가 가장 흥미진진하던 회차였기에, 나는 저항할 틈도 없이 하이큐에 빠져들어버렸다. 당시는 부모님과 같이 살던 때라 나이 든 놈이 이제 와 “만화영화”에 빠져 있는 모습을 노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덕질은 모든 경계를 이긴다. 나이와 장르와 타인의 시선은 거들 뿐(?).


만화책까지 사는 것보다 애니메이션만 보는 게 비용이 훨씬 싸다. 공간도 아낄 수 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버전과 만화책 버전은 작화의 상태도 다르기에 자칫 둘의 간극 때문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심은 그런 걱정도 뛰어 넘었다. 애니와 만화책의 약간씩 다른 연출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고, 언젠가 만화책을 모셔놓고 휴식의 좋은 친구로 삼으리라는 목표가 생겼다. “아나타오 붓타오시떼 젠고쿠에 이키마쓰 (당신을 쓰러뜨리고 전국대회에 갈 겁니다!)”부터 시작해서 도처에 널린 명대사를 외우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요, 꾸덕꾸덕 묻어있는 개그컷으로 삶의 활력소를 삼았다.



그리고 드디어, 첫 독립과 함께 내 방에 <하이큐>를 들여놓았다. <요츠바랑!>과 <세인트 영멘>도 함께였다. 이후로 신간이 발매될때마다 하루라도 먼저 보려고 일부러 서점에 찾아가 구입하고, 브로마이드가 딸린 달력 한정판을 구입해 벽에 걸어놓고, 주인공 히나타와 카게야마 피규어를 사서 장승처럼 세워놓았다. 무려 30대 중후반의 나이에 말이다. 슛돌이와 통키를 그렇게 좋아했어도, 슬램덩크 때문에 농구를 하게 됐어도 이렇게까지 덕질을 할 생각은 못했는데, 이 무렵 찾아온 하이큐에게는 남다른 정성을 쏟아부었다. 아마 그 때와는 달라진 자본력이 한몫 했겠지.


1편에서도 말했듯, 덕질의 대상과 나 사이에는 적당한 공통점과 적당한 차이점이 공존해야 한다. 하이큐의 기본 플롯은 언뜻 슬램덩크를 떠올린다는 면에서 나와 공유할 수 있는 정서가 있었다. 하지만 하이큐는 그것을 뛰어넘어, 비슷한 플롯을 다르게 해석하는 맛이 있었다. 시대에 맞는 해석을 함과 동시에 아주 꼼꼼하고 치밀한 작가의 성향이 반영된 연출이 가미되어 그 해석을 극대화한다. 물론 그냥 청소년 열혈 맹진 장르로 봐도 전혀 문제없는 재미를 가지고 있다.


하이큐는 내가 거리낌없이 맘껏 즐길 수 있었던 첫 덕질의 대상이었다. 만화가 완결되고 애니 4기가 엉망진창으로 발매되어 실망감을 주었어도, 나는 여전히 하이큐 캘린더를 잘 모셔놓고 있고 화장실에 갈 때면 만화책을 들고 간다. 언제 보아도 내 안의 피를 끓게 하는 마성의 책, 주의 깊게 읽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하는 에너지가 있는 책, 화려한 연출과 음악으로 사로잡아 가볍지 않은 메시지로 감탄을 자아내는 애니메이션, 하이큐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었지만 당분간 내 삶의 한 켠을 채우는 좋은 친구로 남아있을 듯하다.





오마이걸 : 덕질이 나이를 초월했다. "뭐.. 그렇게 됐다."


왜, 우리가 가까이 지내던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둘이 손잡고 나타나 영문을 묻는 사람들에게 "뭐, 그렇게 됐어." 라고 말하는 장면, 한 번쯤은 직간접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가까이 지내다가 마음이 생기고 꽁냥꽁냥하다가 스며들어 어느덧 연인이 되는 그런 과정, "그렇게" 된 과정에 대한 짧은 표현.


아무리 나이를 앞서간 덕질을 시작했다지만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청소년 열혈 학원물 만화였고, 케이팝 아이돌 음악 세계는 나에게는 여전히 어색하고 내가 낄 자리는 없는 별세계였다. 그저 인디음악에 흥미를 잃어갈 무렵 재즈나 옛날 록밴드의 음악을 듣다가 가볍게 즐기고 싶을 때 내게 친숙했던 "가요"를 꺼내 들으며 가끔 시대순으로 만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가장 접점이 있는 그룹은 윤상이 힘을 보탰던 "러블리즈"였다.


러블리즈를 통해 허들이 조금 낮아지면서, 그 때부터 아이돌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당시 트와이스, 레드벨벳, 블랙핑크 같은 팀이 신나게 고공행진을 했었고 남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여돌 언저리에서 한동안 음악이나 가끔 들어주는 아재로 남아있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러블리즈 음악이 최고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성 편향의 방송계에 여성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경연 프로그램 <퀸덤>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AOA나 마마무 정도를 알고 있었고 러블리즈가 나온다기에 클립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오마이걸이라는 팀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진정한 실력파이자 컨셉 장인들이며 무대가 완벽 그 자체라고.


나라를 구하고 세우고 다 하시는 두 분.


오마이걸... 그 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오마이걸은 예능에 나온 승희나 효정이 해맑은 모습으로 열심히 하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짠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정감 가는 그룹일 뿐이었고 걸크러시 노선에 약간 더 기울어 있던 나에게는 음악도 그닥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때가 되었던 걸까? 평소 좋아했던 러블리즈의 <Destiny>를 재해석한 무대를 본 순간부터 나와 오마이걸은 지인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옴며드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뭐.. 그렇게 됐다."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스토리와 의미를 찾아내며 감동하다가, 누구나 겪는다는 입덕부정기를 지나 새 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예약구매 버튼에 손을 올리고, 드디어 손에 넣은 앨범과 포카와 브로마이드를 보면서 행복하고, 예능이며 브이로그며 이런 저런 콘텐츠와 팬메이드 영상을 보며 히죽거리는 사이 영화나 드라마와는 작별을 고하고, (아니 오마이걸 안에 희노애락 감동과 재미 그 모든 게 다 들어 있는데 다른 걸 뭐하러 본담?), 어느새 멤버들 말투 내가 하고(맨날 술이야?), 결국 티켓값에 상관없이 공연에까지 가게 되는, 아 이런 게 덕질이구나, 다시금 깨닫는 1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입 벌려 사진 폭탄 들어간다.)

입덕 후 첫 컴백 앨범.
1년에 한 두 번 먹으면 많이 먹는 아이스크림. 우리 애들 때문에 10년치 아이스크림을 한 달만에 다 먹었다.
하이큐와 오마이걸 덕질의 콜라보레이션.



연애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지호가 탈퇴한 지금 시점에서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늘 힘이 되어주기만 했던 지난 1년같은 마음은 아니게 되었지만, 그들이 날 모른 채 나 혼자만 좋아해도 왠지 행복한, 그러면서도 당신들이 왜 좋은지 모를, 그런 덕질의 신비한 세계에서 나는 아직도 살고 있다. (도대체 이놈은 왜 이렇게 오마이걸을 좋아하는지 더 궁금하신 분들은 "찾았다 오마이걸 시리즈" https://brunch.co.kr/@ntild/123 https://brunch.co.kr/@ntild/126 를 참고해주시길 바란다.)




난 내가 덕후인줄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난 덕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깊이 빠져본 적 없이 그냥 이것저것 조금 손만 대고 마는 인생이었다고. 하지만 스스로는 "조금 손만 댔다"고 생각했던 수준은 알고 보면 나 자신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몰두했다가 금방 싫증을 느끼고 다른 곳을 쳐다보는 변덕이 아니라, 인생의 큰 흐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지금 무엇을 필요로하는지 알아가는 여정의 일부였다.


얼마 전 브런치에 <리페어 컬처> 서평을 쓰면서 물건과 수리 과정의 "몰두"를 이야기했다. 리처드 세넷의 <장인>이란 책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다. 사람이 좋아하게 되고 깊게 빠져드는 대상에는 한계가 없다. 다만 그게 건강하려면,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흐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조언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나는 '덕질'이라는 영역이 그 조언의 일부를 건네준다고 생각한다.


무한한 애정을 쏟을 만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물건에 몰두하여 그것을 고치고, 연예인에 몰두하여 내 삶을 건강하게 하는 자양분을 삼고, 음악에 몰두하여 좋은 음악을 널리 소개하거나 좋은 노래를 직접 만드는 사람이 되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로 남을 좋아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다. 건강한 연애가 서로에게 성장과 행복을 선물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가? 그 이유는 좋아하는 게 없어서인가 있지만 말하기 쑥쓰러워서인가? 나는 내가 오마이걸 팬송을 만들어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당신이 지금 덕질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오늘은 한 번쯤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고 답해보는 시간을 갖자.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