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힘차게!
원래 2부작 분량으로 쓰려 했는데,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져서 한 조각 더 나누기로 했다.
오늘은 힘들고 어두웠던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었던 고마운 덕질의 역사를 나누고자 한다.
80년대, 지능개발이란 이름으로 오락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수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이 바보가 되고 말 거라며 한탄했다. 저녁밥 먹으라는 불호령에 이어 엄마의 등짝스매싱을 맞고 나서야 집으로 질질 끌려갈 때까지 놀아댔던 본인들의 과거는 생각도 못하고 말이다. 여전히 편견의 늪에서 오물을 뒤집어 쓰고는 있지만, 게임은 이제 조금씩 취미이자 덕질의 대상으로서의 제 모습을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 곁들여진 중독성도 한 몫 한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컴퓨터 게임에 빠졌던 사람이었지만, 고백하건대 게임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주로 스토리를 겸비한 RPG 장르를 좋아했다. 용기전설, 파랜드택틱스, 삼국지 시리즈, 창세기전… 둠 같은 총싸움은 보고만 있어도 멀미를 했다. 시간을 들이면 그만큼의 적절한 보상이 따르면서도 타인과 경쟁하기보단 차라리 협력해야하는 장르가 내 성격에 더 어울렸다.
내가 열심히 했던 게임의 마지막은 디아블로 2였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그 여름날에도, 나와 친구들은 국대 응원이 끝나면 근처 피시방으로 달려가 스타나 디아를 할 정도였다. 얼마 전 리마스터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새삼 반갑긴 했지만, 디아블로는 추억일지언정 더 이상 나를 설레게 하는 게임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덕질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와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였다.
워크2와 3가 활개를 치며 스타와 경쟁하던 시절에 늘 스타의 손을 들어주며 워크라곤 “닥치시오, 우서”라는 명대사(!)밖에 모르던 내가 와우에 빠져든 건 순전히 주변 사람들 때문이었다. 음악 작업때문에 한동안 자주 놀러갔던 지인의 집에 있던 아이맥에는 와우가 깔려 있었고, 그 때는 아마 “리치왕의 분노” 확장팩 때였을 것이다. 지인은 내게 은근슬쩍 와우를 권했지만 가진 거라곤 후달리는 노트북 한 대 뿐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나는 음악이 더 큰 덕질의 대상이었고 게임은 어린 날 추억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름만 알고 지내던 와우와 급격하게 친해진 건 2015년, <주간 엔틸드> 라는 개인 음악 프로젝트를 끝내고 이제 먹고 사는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제대로 된 구직을 하지 못하고 소일거리같은 알바를 했는데, 부모님과 살면서도 내 현재 상황을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말했다간 “그러니까 좋아하는 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잖아. 니 친구들처럼 오래 다닐 안정적인 직장을 알아봐!” 같은 류의 압박면접에 날마다 시달릴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적당히 아점을 먹고 어디 출근하는 척 동네 카페를 일터삼아 저녁까지 그 곳에 죽을 치는 게 하루 일과였다.
카페 사장님 입장에서는 날마다 와서 자리 하나 차지하고는 리필도 안 시키고 7~8시간씩 죽치고 앉아있던 내가 얼마나 꼴사나웠을까? 당시에도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돈도 없고 가오도 없던 나는 그냥 쫓겨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몇 달을 버티고 앉아 있었다. 와우에 빠져든 건 바로 그 때였다. 당시 나는 음악작업 업그레이드를 위해 지인으로부터 값싸게 맥북 한 대를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도 쓰고 있다!) 그 친구로는 좀 힘겹지만 와우를 해볼 수 있었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로 소음 공해를 유발하면서 나는 와우에 빠져들었다.
돈과 삶의 의욕 모두 바닥을 치던 그 때, 차마 부모님에겐 말할 수 없어서 지인들에게 손을 벌렸다. 그 때의 내 모습은 정말 부끄럽고 굴욕적이었다. 정말 “돈이 급하다면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구해야 하는 거 아냐? 넌 왜 이렇게 게으르고 못났니? 그래서 음악은 제대로 해보긴 할 거야? 이렇게 시간이나 죽이고 있을 거야?” 같은 자책과 물음이 똬리를 틀고 독사처럼 나를 물어뜯고 있었고,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럭 저럭 어떻게 생활비를 융통해 카페에 죽을 치고 앉아 접속한 와우의 세상은 내게 부딪쳐오는 거칠고 황량한 현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하늘을 날며 아름다운 석양과 하늘을 수놓은 별빛을 감상할 수 있었고, 호랑이를 타고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느끼며 한없이 달릴 수 있었으며, 현실에서 얻을 수 없던 성장과 보상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놈이라는 자책이 나를 휘감아 끌고 내려가던 시절, 와우는 그게 뭐가 됐든 나도 여전히 살아있으며, 움직여볼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 주었다.
김민희 김태리 주연의 영화 <아가씨>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와우는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였다. 당시의 나의 최선은 와우로의 도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며 부딪쳐야 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와우는 그 시간을 지체시켜 어느 정도는 나를 망쳐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이 흐른 지금 내가 ‘덕질’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할 만큼 와우는 나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자신감을 준 게임이기도 했다. 푹 빠져서 최선을 다했던 음악이라는 현실로부터는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했지만, 와우라는 가상으로부터는 적어도 심리적인 보상을 얻었으니 말이다. 인간에게는 “할 수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그걸 채워줬다는 측면에서 와우는 게임이라는 장르에서 나를 살린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아직도 심규선이란 뮤지션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지금 한창 빠져있는 오마이걸을 대중적인 인기를 끈 후 제대로 알게 되었다면, 심규선은 내가 인디씬 음악에 한창 빠져 탐닉하던 시절에 알게 된 뮤지션이다. 초창기 앨범인 데칼코마니라는 EP 앨범을 낸 시절에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인디씬 음악을 들을 때 늘 음악의 호불호에만 기준을 두던 나에게 심규선의 음악과 무대 퍼포먼스는 그 기준을 뚫고 들어와 나를 흔드는 독특함이 있었다.
심규선의 음악에서는 기독교적인 흔적이 짙게 묻어난다. 본인의 음악적인 지향을 관철하려는 욕심이 강하기에 더더욱 잘 드러나는 부분일테다. 그런 면에서 당시 기독교 음악과 멀어지려 애쓰던 내가 심규선에게 빠져들었다는 건 모순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기독교 음악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더 이상 채울 수 없었던 그 공간을 다른 모양을 한 심규선의 음악이 열쇠가 되어 문을 열고 채워준 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시간이 나면 어디든 걸어다니기를 좋아했던 나는 봄이면 봄이라고, 가을이면 가을이라고, 귓가에 심규선의 음악을 달고 몇 시간이고 걸어다녔다. 그 부드러운 중저음과 유려한 음악적 색깔, 음악만으로도 한 편의 뮤지컬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 그리고 언제든 내 마음을 파고 들어와 무력하게 만드는 빛나는 가사까지, 심규선을 덕질하던 그 때의 나는 주린 배와 마른 목에 지쳐 깊은 산을 헤매다 음식과 물을 허겁지겁 밀어넣는 심정으로 음악을 들었다.
심규선의 음악을 듣다 보면 조금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듯했다. 때로는 이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다는 감정에 빠지기도 했고, 저 멀리 어딘가 환상속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희극과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그 감정에 깊이 빠져보기도 했다. 앨범 한장을 들을 때면 마치 한 권의 문학서적을 읽는 듯했다.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음악, 나는 낼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그러면서도 알아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들. 사람과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코드 중 몇 가지가 다름과 같음이라는 씨실과 날실로 절묘하게 엮여 어떤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어냈고, 나는 그 작품과 사랑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심규선 덕질과 멀어진 사건이 발생했다. 아마 그 때가 2013년 <꽃그늘> 앨범 발매 콘서트였을 것이다. 평소 큰 규모의 공연에 유료입장을 한다는 건 생각지도 않던 내가 덕질의 힘으로 처음으로 몇 만원짜리 콘서트 티켓을, 그것도 앞 자리로 예매하고, 심지어 기타를 들고 가서 어떻게 싸인이라도 받아볼까 전날까지도 고민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향했던 콘서트였다. 바로 그 콘서트에서, 내 눈 앞에서, 심규선이 첫 곡의 첫 소절도 채 다 부르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진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많이 좋아하는 뮤지션이 콘서트가 시작하자마자 내 눈 앞에서 실신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의 심정을 말이다. 스태프가 뛰쳐나와 심규선을 데려가고 잠시 객석이 술렁거릴때만 해도 도무지 믿을 수 없던 나는 이것도 무슨 퍼포먼스의 일부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곧 관계자가 나와서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을 진행할 수 없으니 곧 환불처리나 재공연 관련 공지를 하겠다고 말했고, 충격에 정신이 멍해진 채 공연장을 빠져나온 나는 토요일 푸르른 한낮의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지인을 불러내 진탕 술을 먹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쳤다.
물론 그 후로 오랫동안 심규선의 노래를 듣기는 했지만, 그 사건 때문인지 덕질의 생애주기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인지 심규선은 더 이상 덕질의 대상이 아니라 내 플레이리스트를 채우고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으로 돌아갔다. 덕질도 그 대상에 따라 주는 아픔과 기쁨과 고통과 행복이 다르다는 걸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심규선에 이어 오마이걸 지호와도 가슴 아픈 경험을 나누게 된 지금에 이르러, 어쩌면 심규선을 덕질하며 얻었던 경험치가 지금의 아픔을 견디기 위한 쓸모있는 예방주사가 된 건 아닐까 싶다.
오마이걸 지호를 떠나 보면 아픔에 여전히 힘들지만, 심규선을 통해 아픔이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지금의 슬픔도 슬기롭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 경험은 2021년, 내 인생의 길고 긴 침잠과 무기력의 시절이 끝나갈 무렵 심규선의 노래가 다시금 마음을 파고들며 찾아왔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조해 주시길! https://brunch.co.kr/@ntild/129)
덕질은 중독적이다. 그래서 덕질을 중독과 헷갈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덕질은 의미나 목적을 갖는다. 적어도 내가 아는 덕질은 그렇다. 혹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덕질이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는 커녕 피폐하게 만든다면, 당신의 정서와 마음의 풍경을 망가뜨린다면 그건 덕질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 두 번의 덕질은 어쨌든 나를 버티게 하고 살아나게 하는 힘을 주었다. 덕질이 굳이 진지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색깔의 덕질이든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건네줄 것이다. 그 선물을 즐겁게 받아 누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