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한파를 뚫고 걷다가 문득 랜덤재생된 노래 하나에 꽂혀 집에 오는 길 내내 반복해 들었다. 오마이걸 미니 8집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된 Swan.
정신줄 놓은 크리로서 오마이걸의 모든...곡을 사랑하지만 이 곡은 곡과 가사의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자주 듣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가사가 마음을 훑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바닥을 치고 올라와 마침내 얻은 나만의 평화를 노래하는 이 곡은 생각해보면 이렇게 촘촘한 노트와 힘찬 편곡으로 만들어질만했다. 하지만 곡의 완성은 역시 오마이걸의 보컬이었다.
이 곡을 들으며 새삼 크리와 다름없는 한 음악평론가의 말이 떠올랐다. 오마이걸의 노래에는 벅참이 있다는 말. 나는 오마이걸의 음악을 지금껏 정중하다고 표현해 왔는데, 그 정중함과 함께 자리한 핵심이 벅참인 것 같다.
Swan을 들으며 벅차오름을 느꼈다. 비바람을 견뎌낸 백조가 몸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엔 그로 인한 상처가 없는지 돌아보며, 자신이 떠 있는 호수 바닥까지 훑어내렸다가 마침내 올라와 내면의 평화를 얻는다는 내용은 백조가 힘차게 날아오르는 장면이 아님에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선물한다. 과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지만 듣는 이를 정중하게 벅차오르게 만드는 힘이 오마이걸에게는 있다.
요즘 <사랑의 노동>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어떤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고 도서관에 신청했는지 기억조차 안 나지만, 읽다보니 이 책은 요즘 내 관심사가 되고 있는 돌봄을 아주 탁월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에세이이자 연구서이자 개인적 고백서가 되었다.
백조가 저 정중한 벅참을 노래하기까지, 그것을 가능케했던 것은 호수였을 것이다. 호수를 떠나 사는 백조는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비바람이 몰아친 뒤 바닥 끝을 찍고 올라와야만 할지라도, 호수는 여전히 백조로 하여금 백조가 될 수 있게, inner peace를 얻을 수 있게 떠받쳐주는 기반이다.
우리가 하나의 인격체로 사회 속에서 존재하게 하는 데에는 엄청난 돌봄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는 돌봐지고 있다. 가정이든 사회든 공동체든, 제아무리 돈이 많고 건강하다해도 '보이지 않는' 돌봄의 직조 속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심지어 '자연인'이라 할지라도, 자연이라는 거미줄 위에 자리잡고 돌봄을 받는다.
그러므로 백조가 백조가 되게 하는 호수는 더럽혀지지 않아야 한다. 호수가 호수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순간 백조도 죽게 된다. 바닥끝까지 찍고 다시 올라오기도 전에 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어버려서는 안 된다. 드러나지 않는 돌봄이 해체되고 망가지는 것은 호수가 더렵혀지고 더는 백조가 마음껏 떠다닐 수 없는 죽음의 터가 된다는 뜻이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 등등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돌봄을 해체할 수도 있고 더 건강하고 견고하게 할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찾아 채우려는 습성이 있다는데, 나 또한 그렇다. 맑스주의, 비폭력, 공동체, 돌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를 돌아보면 내 성향 속에, 내 주변에, 이 세계에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저들 주제에서 찾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아, 종교도 그렇다.
오늘은 커피를 사는 김에 카페에서 팔던 미니붕어빵을 사서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집에 오면서는 지하철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짜증보다는 좀 다른 마음을 품어봤다. 지금의 정권이 하고 있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작태에 대한 분노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동안 나에게 돌봄은 나의 저항, 투쟁, 정의, 일상이고, 삶, 종교를 아우르는 열쇳말이 될 것 같다.
이런 마음들도 내게는 새로운 것이기에 내일이면 다시금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지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이 가사를 기억하기로 한다.
일어서는 법도 헤엄치는 것도
숨 참는 법도 몰랐던 거야
어른이라 해도 다 어설픈 게 많지
겉으론 다들 아닌 척을 해
바닥끝을 짚고 나서 빛을 따라 올라가
어디든 가도 돼 겁없는 아이같이
어릴 적 보물을 찾아내 듯 마침내
아무도 본 적 없던
비밀스런 호수 위에 inner peace
- 오마이걸, S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