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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1. 2022

누가복음서 9장 이야기


2009년 어느 날



때로 성서는 우리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또한 놀라움은 때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깨달음을 가져다 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깨달음이 올 수 있도록 경험치를 축적하는 마음으로 성서를 읽어나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음성이 목사님을 통해, 세상 만물을 통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귀 딱 닫고 살아가던 제가 결국 마음 문을 빼꼼 히 열고 성서를 맞아들였습니다. (계 3: 20) 이제는 성서를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로 만들기 송구해서 한 글자라도 펼쳐보도록 심기일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화장실에 앉아 누가복음서 9장 말씀을 통독해 보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집중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더군요. 예수님은 정말 바쁘게 사셨습니다. 33년 공생애 기간 중, 30년 동안 쌓았던 내공을 단숨에 토해내기라도 하듯, 그 분의 발걸음이 참으로 분주합니다. 제자를 파송하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변화산에 오르시고, 귀신 들린 소년을 고치시고, 자신의 죽음을 알리시고, 제자들의 분쟁을 막으시고, 사마리아 동네로 가시고, 다시 또 새로운 제자를 모으시고.. 


성서를 비평하여 보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성서의 구성이 어떻게 구전되어 편집되고 재구성되었는지에 집중하는데, 편집과 재구성을 거쳤더라도, 누가 공동체에 의해 구전이 문서화된 것일지라도, 아마 역사적 예수님의 일상은 여기 마지막 편집본 성서에 담겨있는 것처럼 그렇게 바쁜 삶이 아니었을까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의 삶은 열정과 긍휼 (Passion & Compassion) 그 자체였으니까요. 


오늘 저의 눈에 들어온 구절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9장 초엽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셨는데, 저는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헤롯왕의 반응이 전 구절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민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새로운 리더의 등장은, 헤롯왕으로부터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누구는 엘리야라고, 누구는 예언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떠들어 댄다. 내가 선지자 요한을 죽였거늘 대체 또 누가 이런 소문을 몰고 다닌단 말인가? 대체 그가 누구냐!" 


예로부터 권력자들은 비밀을 싫어합니다. 자신은 비밀을 수없이 간직하고 통제하면서도, 민중이 비밀을 갖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렇기에 이 나라의 수많은 예언서들을, 또 민중의 바람을 담은 유언비어들을, 그것을 만들고 유포한 자들과 함께 땅에 묻어버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나 봅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민중은 다시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담아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민중의 바람을 담아 제자들을 파송한 것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수많은 희망과 비전의 비밀들이 전파될 것입니다. 헤롯은 완전히 씨가 말랐다고 생각했던 선지자의 소리가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독특한 예수에 의해서, 그리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 누룩처럼 퍼져가는 데 다시 한 번 당혹해 합니다. 


헤롯을 비록한 권력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 어떤 권력도, 총칼도, 억압도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뿌리뽑을 수 없음을. 설령 그 뿌리를 뽑는다 해도 그 순간 자기들 또한 설 땅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도. 결국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민중이 땅의 주인임을. 그리고 그들의 호소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거침없으신 예수는 수고하고 돌아온 제자들과 함께 쉴틈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십니다. 그 분 사역의 본령, 또 교회의 사명, 바로 하나님 나라의 전파에 힘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어떠한가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전하고 있는가요? 무엇을 전해야 할지 모른다면,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른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높으신 주님을 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어 유숙하게 하자고 제안하지만, 예수께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허나, 제자들로써는 기가 찰 노릇이지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한단 말입니까? 제자들의 반문은 당연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나서십니다. 오십 명씩 짝지어 앉게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기하게도 열 두 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가득하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 그 기적이 단지 상징이든, 근본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이 예수께 있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안에서 어떤 비춤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제가 떠올린 상상은,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이 사람들을 먹인 방법입니다. 이 시대에서 분명 부자들의 창고에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능력을 사용하시어, 그 창고에 쌓여있던 떡과 물고기를 순간이동(!) 시키지 않으셨을까요? 이렇게 상상하자, 정말 즐거워졌습니다. 조선시대 홍길동이나 일지매 같은 의적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피를 보고 음식을 되찾았다면, 예수께서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하늘에 간구하심으로 부자들의 창고에서 음식을 되찾으신 셈이지요! 창조의 때에, 땅이 있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채소를 허락하시어 농부가 그것을 취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본다면, 결국 농부의 손에서 움직일 때에라야 그 채소가 사람과 동물의 힘이 되는 제 몫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모여 있던 민중은 채소를 심어도 제 손으로 움직일 수 없고, 물고기를 잡아도 제 손으로 팔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권력자의 손이 이른바 법의 이름으로 이것을 강탈해 갔기 때문이지요. 부자들의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음식들은 어쩌면 제 주인을 찾아 밤마다 슬피 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예수의 능력으로 음식과 그것의 주인이 감격의 상봉을 합니다. 심고 거둔 사람이 제 댓가를 돌려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역천이 순천으로 바뀌는 순간! 이렇듯 놀라운 사역의 주인공, 저들의 스승 예수를 제자들은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역천을 순천으로 바꾸는 그의 삶은 바로 이러한 칭호를 얻기에 전혀 부족함 없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초점은 그리스도라는 칭호나 변화산에서의 영광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건 사건의 행간에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놓치지 않고 증거합니다. 이제는 스승의 뒤를 이어 제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야 함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제자들의 철없는 행동에 예수는 즉각적으로 회초리를 가하십니다. 누가 크냐는 논쟁에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 이르시고, 사마리아 땅을 불태워버리자는 성질 급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WWJD) 운동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또한 동명의 책을 감명깊게 읽고 도전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단지 이러한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똑같이 카피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분이 남기신 정신과 방향과 실천의 구체적인 형태들을 보고 우리 삶의 거울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로봇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누가복음 9장의 이야기는 열정과 긍휼을 가득 안고 달리는 예수의 뒤를 쫓으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초청장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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