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1
*이 글은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과 판넨베르크의 "인간학 : 인간 본성론", 그리고 도로테 죌레의 몇 권의 책의 논조에 영향을 받았다.
인간은 태어난다. 자란다. 늙는다. 죽는다. 그 어떤 인간도 이러한 생물학적 한계지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창조주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큰 증거가 바로 이 인간의 사멸성에 있지 않나 싶다. 먼저 인간은 태어난다. 현대 인간학 (특히 포르트만이 주장한 논리)을 보면, "자궁 외 출산기"라는 인간 양상이 있는데, 이것을 설명하면 이렇다.
인간과 동물을 비교했을 때 동물은 태어날 때 생존에 필요한 본능과 인지 능력 등이 완성된 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본능과 인지 능력이 완성되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그것을 대신할 어떤 또다른 능력이 필요하고, 자궁 외 출산기에서 인간이 사회에 소속되고 그 안에서 성장하면서 동물과는 다른 능력을 배양하게 된다. 그것이 사회성이고, 사회로부터 부여되는 혹은 개인이 능동적으로 취하는 능력들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인간이 가지는 이성적인 능력, 고도의 기술력, 문화들, 이런 것들이 바로 결핍된 본능과 인지 능력을 메우기 위한 도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인간은 자아를 형성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아는 기독교적 용어를 빌리자면 "타락한 자아"이다. 조금 다른 측면을 논해보자면 인간의 타락은 필수불가결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자아의 형성이 꼭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묘사된 최초 인간의 타락은 현대 인간론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이 열린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나를 온전히 죽이고 하나님만 살게 하소서."라는 신앙적인 고백은, 나라는 자아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해달라는 간청이 아니라 옛 자아가 죽어지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하는 중생(고후5:17)의 표현이 된다. 다시 돌아와서, 이 때 형성되는 자아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미운 일곱살 등으로 표현하는 인간 성장의 한 국면은, 나와 타인을 분리해내는 시기이고, 그것이 활발하게 표출되는 시기이다.
인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하면서 사회성을 발달시키고, 때로는 주체적으로 때로는 수동적으로 타인 (넓게는 공동체, 사회 영역)과 관계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인식이 발달된다.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서, 옛 자아를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말할 때, 옛 자아 그러니까 자기 중심성을 아직 벗지 못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단절 (폴 틸리히의 개념으로는 소외)의 상태에 있다. 인간이 이러한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일을 해야 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타인과의 관계에도 변화를 준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면서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상태를 끊임없이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의 관계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예수의 핵심적인 명령이다.
이러한 인간의 발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의 사태들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초현실, 초자연, 초월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권위(power)에 있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선을 행하도록 '유혹'하고 '설득'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나눔으로 인간을 인도한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존재적으로 선과 생명을 선택하도록 끊임없이 이끌어 낸다. 그 이끎은 폭력적이거나 군주적이지 않고 수평적이다.
이러한 이해를 갖는 기독교는 교리에 초점이 있지 않다. 실천이 중심이다. 동시에 기존의 전통을 재활용하고, 예전을 중시한다. 종교적 기독교와 실천적 기독교가 통합적으로 작용하는 영역이 된다. 게다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악의 존재와 인간의 고난에 무력한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을 협동적으로 극복하고 해결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수직적인 것이 아니라, 신인협동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새로운 기독교의 핵심이 제시될 때, 기독교의 나머지 영역도 변화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