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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강정에 계신 예수님 따르기

2011년 어느 날, 한창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 현장을 방문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글. 해군기지는 완성되었고 이제 투쟁은 제2공항 저지로, 비자림로 훼손 반대로 넘어갔지만, 그렇기에 이 날 이 때의 마음이 더 절실한 요즘이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그 분의 자녀된 여러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부를 여쭙니다. (너무 바울 따라하기인가요?)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에게는 내 죄를 사하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곳,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사형 도구, 누군가에게는 장신구..... 하지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낮고 천한, 억압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의 모퉁이 한 가운데 오신 예수가 당신의 인생을 다 바쳐 내달린 결과 도달한 곳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하고 힘없고 이름도 없어 늘 권력과 국가와 자본의 밑에서 아무 소리 못하고 죽은 듯이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오신 예수, 그 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기 삶을 던졌을 때 인생의 마지막에 받은 이 세상에서의 보상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예수의 부활보다는 그가 죽은 이유를 먼저 묻게 합니다. 그 십자가가 꽂힌 저 곳, 저 곳은 우리나라 남쪽 끝에 있는 제주도, 그 곳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강정이라는 마을의 포구 방파제입니다.


제가 방문한 날, 파도와 바람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쓰러지지 않고 의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부활했으나 그가 달렸던 십자가는 오늘날에도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저기 저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런 곳에 십자가가 꽂혀 있을까?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인가? 오늘은 여러분과 바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강정과 해군기지, 그 악연의 이유

제주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아름다운 강정, 그 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2007년. 실질적으로 마을에 거주하는 1000여명의 주민 중 80명만 참여한 투표 결과 '찬성'이 나왔다. 나머지 주민들은 투표가 있는지도 몰랐다. 뒤늦게 700여명이 모여 투표를 했다. 680명이 반대였다. 불참한 나머지가 모두 찬성 의견이었다 해도 70%가 반대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와 해군에 의해 공사는 강행되었다.


제주도 내 해군기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1993년, 당초 화순이 예정지였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몇 군데의 후보지 중 강정이 선택되었다. 해군 기지 건설에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지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안보, 둘째는 환경, 셋째는 마을의 보존이다. 해군기지를 추진하는 정부, 해군과 찬성하는 이들의 입장은, 앞으로 중국과 일본이 이어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면 신속하게 남해안 영해를 지킬 해군의 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강대국의 분쟁 속에서 국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다. 한국이 우방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은 21세기의 대외 정책, 특히 태평양 지역에서의 패권을 지키기 위한 정책 기조를, 각 국가가 자체적으로 건설한 기지를 미군이 이용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한국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짓는다면, 현재 큰 반발에 부딪혀 있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 대신 근방 지역에서 이용할 만한 새로운 기지를 얻을 수 있다.


미군이 제주 해군 기지를 이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자명하다. 중국은 이를 미국의 적극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고, 미국에 자국 기지를 빌려 준 (그리고 이미 만 명이 넘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은 초강대국의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해군 기지 건설이 과연 득일지 실일지 꼼꼼이 따져봐야 할 부분들은 여전히 많고, 심사숙고 거듭한 끝에 진행해야 할만큼 국제관계에 있어 중요한 결정이지만, 정부와 해군은 이에 대한 국민적인 환기나 검토과정 없이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며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환경. 강정은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마을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서귀포 주민의 70%에 해당하는 인구의 식수원이 되는 냇길이소, 그리고 강정천과 바다가 만나는 멧부리, 이미 파괴되었지만 그 아래 귀중한 해양생태계를 지니고 있던 구럼비 바위이다. 해군기지의 건설로 인해 냇길이소 주변에는 관사와 도로가 들어설 예정이며, 이에 따라 강정천의 오염과 멧부리의 훼손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냇길이소 옆에 있는 수령 600년의 나무인 냇길이소당은 도로 건설로 인해 잘려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미 파괴된 구럼비 바위는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해양 생태계도 타격을 입었다.


셋째는 마을의 보존.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오면 필연적으로 해군의 부대시설 뿐만 아니라, 공군 기지 또한 들어오게 된다. 현대전의 양상은 이미 해군과 공군이 공조하에 작전을 수행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에 전투기가 적재된다는 사실만 기억해도 해군의 소속되어 있는 것일지라도 공군 관련 시설이 들어오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군사부지가 들어오면 사실상 예전 마을과 마을 주민이 생존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의 걱정이다. "강정에는 지금 제대로 된 술집이 하나밖에 없다." 이 말 뒤에 붙을 말은 뻔하다. 군대가 들어서면, 마을의 문화와 보존에 필요한 시설이 아니라 군대와 군인을 위한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마을이 아니라 군사 기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아주 쉽게 이해하려면, 한국군 부대 주변이나 미군 기지 주변의 부동산 가격이 어떤 지를 살펴보면 된다. 타지역보다 현저히 저평가 되는 지역이 군부대 주변 지역이다. 강정에 군부대가 들어선다는 것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함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적 환경 또한 심각한 훼손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2. 국가 권력과 자본의 횡포, 그리고 싸움.

여기까지가 강정과 해군기지의 악연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하실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부나 해군이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고 진행하는 일일테고, 반대하는 입장이 일리가 있다 해도 그것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을 것이니 서로 잘 타협해 나가면 되는 문제 아닌가?" 이제는 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 좀 더 다가가 보면서 그 질문에 대답해 보려 합니다.


위에서 2007년에 강정에 해군 기지 건설이 결정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격적인 공사는 2011년에 착수되었습니다. 국회에서 예산이 거의 전액 삭감되다시피 했으나, 해군은 집행되지 않고 남아있던 예산을 벌충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 3월 6일, 강정 포구 해안가에 1km가량 펼쳐져 있던 구럼비 바위에 대한 폭파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부터 강정 문제에 다양한 각도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구럼비 폭파를 기점으로 그 관심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싸울 명분이 없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도 사라졌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구럼비 폭파를 막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싸워왔던 문정현 신부님, 영화 평론가 양윤모씨, 개신교 단체인 '개척자들'의 송강호 박사, 강동균 강정 마을회장을 중심으로 한 주민과 지킴이들은 여전히 투쟁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한 쪽에 해군 기지 반대를 외치는 미을 주민과 활동가들(지킴이들)이 있다면, 한 쪽에는 해군 기지를 찬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수의 마을 주민과 정부, 해군, 그리고 삼성과 대림이라는 기업이 그들입니다. 이 싸움이 국가 권력과 자본과의 싸움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해군 기지 건설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 기업이라고 불리는 삼성과 대림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고, 이는 건설 경기의 불황 속에서 기업의 배를 채워주는 도구가 됩니다. 특히 삼성은 노동자에 대한 매우 야만적인 처사로 악명 높은 기업입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한 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용철 변호사 뿐만 아니라 피해 당사자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해군 기지 건설은 이러한 비인간적인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에 더더욱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2007년 이후, 강정 마을은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마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격화되어 이제는 관계마저 단절된 상황입니다. 찬성측 주민 나름대로, 반대측 주민 나름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을 내 심각한 갈등에 대해 정부나 해군, 기업, 심지어 제주도 행정 기관 그 어느 곳에서도 관심을 갖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쪽은 없습니다. 해군 기지 건설에 있어 마을 주민들의 평화는 신경쓸 만한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군 기지를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은 2007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여기에 외부의 활동가들이 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 이전부터 싸움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라는 투쟁 기간 동안 수많은 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부와 해군, 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절망감을 가져다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투쟁의 현장을 뛰어다니는 것은 50여명의 현지 활동가들이며, 반대측 마을 주민들은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후방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전환했습니다. 현장에서 함께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장기간의 투쟁으로 지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지킴이(활동가)들과 마을 주민들을 힘겹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절망감과 장기전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피해의 누적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나타납니다. 첫째로 재정에 대한 압박입니다. 경찰은 강정마을 공식 후원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습니다. 진행되는 동안 계좌에 있는 돈은 사용하지 못하고, 관련인들은 경찰에 소환되는 일들을 계속 겪어야만 합니다. 참 치사합니다. 수백 수천억원 대의 조작과 탈세가 벌어져도 그렇게 철저하게 조사하지 못하던 경찰이 얼마 되지도 않는 민간 후원 계좌는 영수증 하나 누락된 것까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니 말입니다. 최근 만들어진 '강정사람들'을 통해 후원을 할 수 있는 길은 열렸지만, 육지와 제주도내 사람들의 관심 부족으로 재정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입니다.


둘째로 마을 주민과 지킴이 내에서의 갈등들입니다. 특히 지킴이들은 각지에서 다양한 배경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민족주의자, 개신교인, 천주교인, 채식주의자, 환경보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인권운동가, 혹은 그저 강정을 사랑하는 사람가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다보니 여느 공동체에서처럼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문제들을 해결해가고는 있지만, 이것이 저해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셋째로 육체적, 정신적 피해의 누적입니다. 육체적 피해는 쉽게 말해 부상입니다. 문정현 신부님은 경찰에 의해 허리가 다치고 해군에 의해 바닷가에 빠지셨으며, 송강호 박사는 레미콘 밑에 들어갔다가 턱과 치아에 큰 부상을 입은 채로 구속되어 수감중입니다. 제가 강정을 두 번째로 방문했던 8월7-9일 3일 동안에도 이미 두 명의 큰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두 분 모두 경찰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응급 후송되었습니다. 이러한 피해는 활동가 본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며, 활동가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 투쟁에 어려움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금전적 손해 또한 따라옵니다.


정신적인 피해도 큰 문제입니다. 이는 기도회나 문화제 등 주민과 지킴이가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에 가장 명확히 느낄 수 있는데, 사실상 진짜 적이 아닌 사람들, 전경들과 용역들을 상대로 하는 싸움 속에서 몸싸움이 격화되고 지킴이가 부상을 당하거나 부당하게 연행되고 구속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쌓이는 분노가 진짜 적이 아닌 사람들에게 분출되어 서로 격화된 감정을 갖게 되고, 이것이 더 큰 충돌을 낳기도 합니다. 또한 분노와 같은 이러한 감정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마을 주민과 지킴이 자신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내 안의 괴물과의 싸움"이라 칭합니다.


마지막으로 거대 국가 권력과 기업과의 싸움 앞에서 느끼는 절망감입니다. 이들은 경찰, 해군, 용역이라는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싸웁니다. 여기에는 국민의 무관심, 왜곡된 정치관념, 이데올로기적 반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인도 작용합니다.


강정 주민들과 지킴이들 대부분은 그들에게 '불법, 범법행위자'라는 딱지를 붙인 정부와 기업에 의해서 연행되거나 재판에 회부되고, 무거운 벌금형에 처해진 상황입니다. 현재 육지에 있다가 재판만 받으러 제주로 내려오는 지킴이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억 단위의 벌금형에 처해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경찰과 기업에 의해 채증되어 감시의 대상이 됩니다. 정부와 해군, 기업은 이들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악을 쓰고 욕을 하며 때로는 조롱을 퍼붓는 이유는,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그닥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절망에 대한 강력한 거부의 몸부림으로 보일 때조차 있습니다. 경찰과 정부가 함부로 적용하는 상황법이 아닌, 헌법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성을 잃지 않으며 최대한 평화롭게 투쟁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그냥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있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포기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가져다 주는 힘겨운 짐과 같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은 사람들의 무관심입니다. 이것은 제가 서울에서 1인 시위를 펼칠 때도, 또 강정 현지에서 만난 여행객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강정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인 육지의 상황, 그리고 아름다운 강정을 보러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을 와서 처절한 현장의 상황을 구경하듯 잠시 바라보고는 떠나버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들. 주민들과 지킴이들은 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붙잡고 설득하기에는 사람도, 시간도, 힘도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강정을 방문했던 7월과 8월, 그곳을 떠나기 직전에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활동가들은 늘 그렇게 부탁합니다. 제발, 육지에 가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일들을 널리 알려 달라고. 저는 그들의 그 부탁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강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3. '새로이' 예수를 따름.

저는 서두에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물었었습니다. 비록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못하지만, 십자가에는 개인적인 구원의 통로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삶이 개인 구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늘 사회에서 버림받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이른바 '죄인'이라고 부르던 이들과 어울리는 '먹보에 술꾼'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사채업자(세리), 성매매 노동자(창녀), 사회에 불만을 가진 이들(열심당원)과 같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과 함께 다녔습니다. 동시에 당시의 지도자들, 잘 사는 사람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는 '개새끼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설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한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곧 나(하나님)에게 한 일이다"라며, "그런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제가 서술한 예수의 모습은 모두 성경 본문에 적혀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면 어디에 계셨을까요? 2천년 전 나사렛이라는 촌동네와 갈릴리라는, 사회부적응자와 정치적 불만세력이 가득했던 땅에 오셨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 두 가지 모습이 함께 보여지는 강정이라는 마을에 태어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국가와 자본 권력의 압박과 횡포 아래 악전고투하던 사람들과 함께 싸웠을 것입니다. 국가 권력에 의해 살해당하기까지 말이지요. 오늘날에는 십자가가 아닌 다른 도구로 살해당하겠지요. 어쩌면 정치적인 살인을 당하거나, 아예 그 존재가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영구적으로 추방되는 일을 겪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함께 죽으러 가자는 요청입니다. 예수가 국가 권력과 자본이라는 희대의 우상을 향해 돌진했듯이, 그렇게 너희도 하라는 초청입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술담배 안하고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으며 가정을 잘 돌보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개인으로 살라는 요청이 아닌, 그 이상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세상도 칭찬합니다. 멋있고 바른 시민이라고 평가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산다면 기독교의 이미지도 좋아질지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섬기는 교회'로 평가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같이 죽으러 가자는 예수의 부르심은 어떻게 된 걸까요? 멋있고 바른 시민이 되기 위해 감내했던 나름대로의 희생들이 그 십자가였던 걸까요? 만약 예수가 그렇게 살았다면 십자가에서 살해당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기까지 세상과 불화했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땅을 헤맸던 예수의 마음, 그 마음은 바로 그의 인생길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세상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그가 누려야 할 하나님 자녀로서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불의한 권력과 자본에 의해 희생되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아파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광야에서의 마귀의 시험을 통해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만국(세상 국가)의 권력이 마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본 순간, 예수는 그 권력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에 저항하기를 마음 먹은 것입니다. 예수가 있었던 자리, 그 저항의 자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자리이며,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 십자가는 아마 우리 삶 전반을 불편하게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과 다투게 하고, 논쟁하게 하며, 비판하게 하고, 늘 불만을 달고 사는 사람으로 비춰지게 할 수도 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빨갱이'로 보이게 할 수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열등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단지 멋지고 바른 개인이 되기 위해 만나는 희생보다 더 큰 것들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얼굴이 채증되고, 국가의 사찰 리스트에 오르고, 직간접적인 불이익이 나와 내 가족에게 미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가 가는 곳마다 종교 정치 지도자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따름을 선택할 때 지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이 십자가를 지고 정치 권력에 의해 살해된 어린 양, 예수를 따르시겠습니까? 그 분을 따를 때 보장되는 축복은, 글쎄요. 제가 경험한 한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축복을 받기 위해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가 가신 길이기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하루에 몇 번씩 절망과 답답함과 분노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물질적으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기도와 말씀 묵상 중에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말입니다. 그것들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크고 무거우며 중요한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표면적인 부와 편안함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삶을 새로이 구성해내는 힘,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위로와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새로이 예수를 따르는 그 길을 간다고 할 때,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널리 알려서 강정에 대한 관심과 정보를 제공한다거나, 강정 마을에 재정적으로 후원을 한다거나, 강정과 연대하는 교회 (향린교회)를 통해 도움을 주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물론 직접 강정을 방문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을 자세히 보셨다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도와야 할지 각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발견한 그 방법대로, 실천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먼저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말씀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과 예수, 눌린 자와 버려진 자들의 친구를 만나보는 것이 어떨까요?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모든 일을 함께 하시며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새로운 발걸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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