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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피곤한 땅, 피곤한 사람들

2013년 이전 어느날



감출 수 없는 한반도의 피곤함

3초에 한 명 씩 자살하는 나라, 성폭력 왕국, 교통사고 1위, OECD 국가 중 부패지수 상위 랭크. 이런 수식어는 더 이상 우리에게 생경하지 않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실상이 그렇다. 이러한 한국의 그림자는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단지 민주화라는 과정이 독재정의 시절보다는 이러한 그림자를 조금 더 잘 보이게 만들어 줬을 뿐이다. 절차적 민주화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20년 전,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전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우리가 경악해 마지않는 충격적인 사건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건들이 버젓이 기사로 실려 있다. 배고픔(경제발전)과 억눌림(독재정)이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슈가 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슈가 되더라도 그것은 교수, 학자, 정부 관료라고 하는 전문가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형식적이며 꼰대적인 대안을 내놓을 때 뿐이었다.


참기 힘든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 이른바 전문가들이 내놓는 해법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국민들의 의식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강력한 법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에 따라붙는 내용은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국민에 대한 인식이나 문제 해법의 핵심에 있어서는 변한 게 없다. 하지만 다양한 학문들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이 모든 현상의 원인에 '피곤함'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피곤함은 다양한 징후들을 통해 나타났다.


급속한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억압된 욕망의 표출, 한국 사회 전반을 뒤흔든 다이내믹한 시민운동의 출현 등. 다양한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 피곤함이 하나의 원인만 갖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모든 현상의 원인을 피곤함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사회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 전반을 감싸고 있는 이 피곤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그 원인과 연원에 대해 생각해 볼 틈조차 갖지 못할 엄청난 피곤함 덩어리에 떠밀려 살아왔다. 한국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겪고 있는 만성피로는 역사의 흐름이 쓸어온 결과물을 개인이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청소년은 입시 스트레스에, 청년은 입시와 스펙과 취직의 압박에, 직장인과 장년층은 가족 부양과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압박에, 노년층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자신의 상황과 안정적인 노후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인생의 어느 한 부분도 편안함을 느낄 만한 시간이 없다. 개인이 거대한 피로의 덩어리와 맞서 싸우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거대 담론처럼 보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에너지를 쏟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피로의 덩어리를 분쇄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사실 이 땅의 사람들은 개화기라고 불리는 시점부터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피곤함과 싸워왔던 역사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그 피곤함의 원인이 크게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타락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민중들은 본능적으로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저항에 들어갔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학 농민 운동이다. 이후에 펼쳐진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도 결국은 이 지긋지긋한 피곤함을 벗어버리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서양문물과 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도, 식민지 상황에서 일어난 거국적인 3.1 만세운동도, 북간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 힘있게 벌어진 독립군의 투쟁도 모두 역사가 가져다 준 피곤함을 제거하기 위한 사투였다.


하지만 역사가 진행될수록 피곤함은 줄어들기는 커녕 쌓여만 갔다. 해방 후에는 남북 분단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던져주었고, 남쪽에서는 반공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집권한 독재정권의 압제가 피곤함을 가속화시키고 고착화시켰다. 경제가 압축적으로 성장한 만큼 피로도 압축적으로 쌓이고 스며들어 사람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제까지 뭉쳐졌던 피로의 덩어리를 더 꾹꾹 눌러 단단하게 만들고, 그 위에 덕지덕지 무언가를 첨가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러한 작업이 국가적으로 발생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 피곤함이 개개인의 정서와 일상에 파고들어 만들었을 압박 기제, 금기어들, 자유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마련된 소시민적 환상. 이러한 구조는 단시간 내에 극복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피로는 이 땅에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이들에게는 보편적인 것이다. 특수적인 보편이다.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나, 그것이 같은 강도나 형태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 보편적인 피곤함과 연관을 맺고 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피곤함에 의한 징후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 피곤함은 정치적 냉소주의를 낳았고, (기성세대가 연약함을 이유로 드는) 자살률의 급증을 불러왔으며, 피곤한 경쟁의 밀림 속에서 자신만을 생각하게 하는 이기주의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스트레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간혹 정치적 의제 설정과 참여를 통해 이 '당연한 것'을 극복해 보려는 이들 조차도 '당연한 것'이 만든 구조적 그물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소수의 사람들이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여 어느 쪽도 이 피곤함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나, 그 결과물이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여 얻어진 것이기에 능동적이고 발전적인 에너지로 변환되는 과정이 요구된다.



피곤함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개신교의 신학자 월터 윙크에 의하면 근대로 인해 잃어버린 신화적 상징과 용어들은 그 시한이 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발굴되어 현대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인식시켜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용어들은 신약성서 시대에 존재했던 '사탄, 마귀, 천사, 영혼'인데, 여기에서는 특별히 '국가의 천사들'이라는 개념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국가의 천사들'은 쉽게 말하면 하나의 개별 민족이나 국가의 내면성임과 동시에 외적으로 표출되어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역동성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치의 출현은 1차 대전 패배 후 독일 국민들에게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좌절감과 패배감, 또한 한 편으로 존재했던 적대감이 내면화하여 존재하던 상황에서 나치에 대한 지지로 표출될 때 가능했다. 그 시대에 흐르는 보편적 국민정서와 지도체제의 성격 등이 국가의 천사들의 모습을 결정하는데, 이 국가의 천사들은 능동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흐름에 개입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당연한 것들', 다시 말해 우리가 상식이라고 간주하는 많은 것들이 국가의 천사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축적되고 승인된 것들이다. 물론 국가의 천사들이 개별적인 인격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의 천사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나라 전체에 감도는 어떤 '분위기' 같은 것이 국가의 천사들이 나타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존재하는 국가의 천사의 모습은 어떠할까? 먼저 나는 천사가 50년을 넘는 세월동안 고개를 왔다갔다하느라 바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이라는 국가로 통합되어 있던 땅이 어느 날 갑자기 둘로 나눠졌으니 본인이 남쪽 천사인지 북쪽 천사인지 혹은 둘을 합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천사인지 많이 헷갈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 천사는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병을 앓고 있지 않을까? 하나의 민족이 크게 둘로 나뉘어져 서로에게 적대감을 내뿜고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정당성을 보증할 수 없는 상황일 때, 그 정신분열증은 부메랑처럼 이 땅을 사는 개개인에게 침투해 들어와 자신의 역사적, 사회적 위치와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눈가리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이 원인이 되어 남과 북 사회에 오랫 동안 악영향을 끼친 것이 눈가리개라면, 이후의 역사는 그 속에서 서서히 내면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가는 과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천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들은 눈가리개를 한 상황에서도 손을 뻗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심지어는 눈가리개를 벗어버리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4.19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화 대투쟁, 남북정상회담 같은 것들이 눈가리개를 벗으려는 사회적인 시도였고 그것이 잠시나마 눈가리개를 올리도록 해 주었으나 여전히 눈가리개는 벗겨지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눈가리개를 벗어버리기 보다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중얼거림'으로 해소하려 한다. 중얼거리는 소리는 중얼거리는 본인에게는 하나의 발산이지만, 타인은 쉽사리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한국 사회를 뒤덮은 힐링 열풍과 같이 개인이 어떻게 하면 '잘 먹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컨텐츠들은 다양한 매체적 형태를 통해 쏟어져나오고 있다. 물론 이러한 힐링이 백해무익한 것은 아니겠으나, 결국 진정한 힐링은 눈가리개를 벗겨내는 데서 시작된다.



피곤함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 : 끊어냄.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하나 밝혀둘 것이 있다. 나는 민족주의자, 통일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사회의 수많은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분단이나 통일과 같은 의제들은 그것이 거대 담론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만드는 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 민족, 통일의 의제를 7,80년대의 방식으로 풀어낼 생각은 전혀 없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성서와 한국 역사를 만나게 하는 작업 속에서 하나의 개념을 추출해냈는데, 그것은 바로 '단(?)'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의 단(끊어냄)인가? 끊어내야 할 것은 '한(?)'이다. 구약성서의 히브리인들은 이집트 치하에서 400년이라는 세월동안 '한'을 쌓아왔다. 그리고 그 한은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모세라는 지도자를 따라나서는 '주체적' 결단으로부터 '단' 되었다. 이후로도 히브리인들은 광야의 세월 동안 무수한 단련을 받아야했지만, 이집트에서의 '단'이 없었더라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은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남동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 또한 한이 축적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함석헌은 이러한 한국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리하여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표현했다. 동북아의 모든 추악하고 쓰레기와 같은 역사의 배설물들이 모인 곳이 한반도라는 것이다. 그 땅에서 살았던 이들이 나름의 거대한 '한'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이 글에서 주장했던 '피곤함'은 사실 서남동이 말한 '한'의 다른 이름이다. 서남동의 한은 그러나 '피곤함'이라는 단어가 빠지기 쉬운 심리학적 분석틀에 갇히지 않는다.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내면적 억압과 부재와 단절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정서적인 언어가 바로 '한'이다.


이는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관념적 추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정서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국가의 천사가 정신분열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 '축적된 한'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의 한은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아주 복잡하고 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어디를 잡아당겨도 더 꼬여갈 뿐, 풀리지는 않는 실타래이다.


사람들은 보통 꼬인 실타래를 끊어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실타래를 끊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 실타래 속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실 몇 가닥이 섞여 들어있고, 그 실들이 실타래 전체를 엉키게 만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실들은 분단이라는 상황 자체일 수도 있고, 충분히 달성되지 못한 민주화일 수도 있으며, 광범한 제도적 불합리일 수도 있고, 국민의 형편없는 인권의식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실들이 특정 정당이나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적이고 정서적인 성질이 강하며, 우리에게는 각자가 생각하는 이 실들을 최대한 잘 분별하여 모아낼 수 있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식틀과 사회적 합의의 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실들은 잘라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 잘라냄은 '단' 그 자체는 아니고, '단'의 첫번째 과정일 것이다. 서남동에게 있어서 '단'은 단순히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내는 작업도 포함하는 것이다. 엉킴을 만들어내는 실들을 잘라낼 때 올 충격과 부담은 당장은 더 격한 피로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지나며 쌓이고 쌓인 피로를 없앨 수 있는 회복의 길이다.


나는 이 지면에서 '단'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단지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을 뿐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 각자가 서 있는 풍경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싶었을 뿐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대한 피로감에 맞서 싸울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다는 점이며, 그 싸움은 이 글을 읽는 각자의 결단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결단이야말로 나와 당신의 단잠과 가벼운 아침을 보장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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