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이전 어느 날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리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우리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채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데나리온 한 닢을 나에게 보여다오. 이 돈에 누구의 얼굴상과 글자가 새겨져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씀을 책잡지 못하고, 그의 답변에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눅 20:21-26)
본문은 예수가 종교권력자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들과 벌인 논쟁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등장한 사건의 기록이다. 이번 혁명기도원 저녁기도의 복음서 말씀이기도 했는데, 이 말씀은 늘 나를 어렵게 한다. 이 말씀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이렇다.
"예수님이 가이사(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신 것은 정치와 종교 사이의 분리를 말한 것이다. 종교는 정치나 경제와 같은 사회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로마서 13장 1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대해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불의해 보일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다."
뉘앙스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이사와 하나님, 세속과 신앙을 분리하는 것만큼은 거의 일치한다. 신학도로서 신약을 공부하다보니 논쟁적으로 느껴진 만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에 자연스레 눈이 간다. 위의 일반적인 해석과는 달랐지만, 신학의 답변들이 나를 만족시킨 것도 아니었다. 맥락상 종교권력자들과 예수의 논쟁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본문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재치있는 논점 전환기술이 돋보인다는 정도의 언급이 대부분이었다.
이 말씀에서 예수가 종교권력자들의 논쟁을 무력화시키는 화법을 구사한 것은 맞다. 종교권력자들의 목적은 예수가 어떤 대답을 하든 꼬투리를 잡을 생각으로 질문을 던진 것인데, 예수는 이를 절묘하게 피해나간다. 그러나 예수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결구도를 뛰어넘는 동시에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려주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이사의 초상이 그려진 그 동전조차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이사의 권력, 그의 군대, 영토, 주민 등등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가이사보다 더 크고 높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유대인으로서 "제국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종교적 행위를 통해 돌려드리는 것도 가능해진다. 예수는 이 대답으로 "세금을 낸다면 유대인으로서 민족에 대한 반역이다 /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국가에 속한 자로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옳지 못한 국민이다"라는 함정을 모두 피해간다. 다시 말해 민족과 국가를 한번에 초월한 것이다.
월터 윙크의 기본적인 주장이 이런 것이다. 국가, 제도, 공동체...이러한 사회적인 요소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인간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타락할 수 있고, 타락했고,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에 대한 다양한 예시 연구와 견해가 발달한 현대의 신학자와, 국가와 그 통치자가 절대화, 신격화되는 시대를 살았던 예수의 입장에 별 차이가 없다면, 예수는 말 그대로 시대를 초월하는 중요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필자는 예수가 '민족과 국가를 한번에 초월함으로써' 종교권력자들의 반론을 무력화함과 동시에 새로운 그림(비전)을 그리며 선언했다고 말했다. 성서에서 의미를 추출해낸다고 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그려낸 새로운 그림일 것이다. 그것은 언급한 대로 "민족과 국가, 경제, 정치, 제도, 공동체 등 사회 구성 요소들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고, 그 다스림 안에 있다."라는 선언이다. 필자는 이것이 지금도 여전히 아주 급진적인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선언을 현명하게 해석하고 펼쳐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작금의 한국 개신교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많은 이들이 한국 개신교회에 '선언은 많은데 실천은 없다', '늘 말의 잔치만 벌인다'고 평가한다.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 한국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언어와 수사법은 상당히 당위적이고 도덕(윤리가 아님)적이다. 어디까지나 상식선 안에서 발언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당연하게'는 여겨지지만, '옳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옳게 여겨진다면 그것을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야 한다. "바르게 살자"라는 선언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하지만, 내용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언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한국 개신교가 하는 선언의 수준이 이 정도이다. 그러니 선언 자체의 수준도 떨어지고, 선언에 내재된 능력도 없다. 누구에게도 밉보이고 싶지 않으면,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법이다. ((계 3: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선언이 이 모양인데 실천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사회적 실천은 90년대 이후 진보 기독교 진영이 축소되면서 더욱 줄어들었는데, 그나마 개신교회의 사회 속에서의 실천이라고 해 봐야 복지단체에 자금을 대거나 직접 복지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수준이다.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의 중론은 복지기관의 설립과 운영, 자금 지원은 교회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미약하나마 실천은 있으되 방향은 없다. 올바른 선언이 없기 때문이고, 실천할 내용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국 개신교회에 필요한 슬로건이 '실천적 선언, 선언적 실천'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먼저 '실천적 선언'이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서 선언이 실천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용이 들어간 선언이 필요하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언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시의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가 종교권력자들과의 논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던졌던 것과 같은 선언 말이다.
좋은 예로, 나치 집권 당시 독일 고백교회의 선언이 있다. 그들은 나치가 독일을 제국으로 만들어가던 그 시점에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언했다 (바르멘 선언). 이는 선언만으로도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데, 당시 나치는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정권"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구체적이면서 시의성을 가지고 있다. 폭력의 억압으로 막는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하겠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곧 나치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오늘날 독일 교회가 같은 선언을 한다면? 별 특별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선언이 실천적이려면 시대의 맥락에 대한 인식을 던져줌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변화나 도전, 행위로 이끌 수 있다.
둘째로 '선언적 실천'이다. 선언적 실천은 선언의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고백교회는 바르멘 선언 이후 실제로 불족종적인 실천을 감행했고, 탄압받았으며, 고백교회의 일원이었던 본 회퍼 목사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선언이 선행하고 실천이 따라오거나 선언과 실천이 분리되는 것만은 아니다. 선언과 실천이 함께 드러날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 한국 개신교회에 필요한 것은 선언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선언적 실천'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언적 실천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실천 자체가 선언과 같은 충격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예수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누가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예수에게 "당신이 오실 그 분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는 어떤 선언도 하지 않는다. 단지 "일어난 사건", 다시 말해 "자신의 실천"을 답변으로 제시한다. (눅 7:17-23) 예수의 사역 행위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언이 된다.
이러한 삶은 예수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언적 실천을 삶 속에서 끊임없이 궁리하고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저자 쉐인 클레어본은 월스트리트에서 희년의 나팔을 불며 소액 지폐 다발을 뿌리는 행위를 했다. 이것은 부의 재분배, 가난한 사람들과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 사이의 관계를 재정의하자는 선언임과 동시에 가시적이고 파괴력이 있는 실천이기도 했다. 이렇게 거대한 실천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이는 작은 실천들, 그리고 그 실천 속에 견고한 의미들이 숨쉬고 있다면, 그것이 드러났을 때는 창조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충격과 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예수와 같은 자세가 요청된다. "네가 어디에 속하는지 밝히라!"는 요청에 대해 그 요청 자체를 무력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그림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실천적 선언'과 '선언적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 이는 기독교인 개개인에게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 전체에도 요구되는 것이다. 이 지면에서 톺아볼 수 있는 스케일은 아니지만, 선언과 실천에 있어서 필자가 느끼는 한국 교회 내부의 걸림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진보적 기독교가 안고 있는 "민족" 프레임이고, 또 하나는 "국가" 프레임이다. 양쪽 모두 한국 근현대사를 꿰뚫는 중요한 주제이고, 역사 속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형성되어 왔다는 데서 접점을 갖는다. 이 두 가지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해방 정국과 이승만 정권, 박정희 독재와 전두환 공안정국을 지나오면서 진보진영 기독교는 민중운동을 중심으로 통일의 문제를 중심 테마로 삼았다. 당시 진보진영으로서는 민중과 통일을 함께 다루는 것이야말로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사회는 민중이나 통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접근법을 요구하고 있다. 민중신학이 21세기 민중에 대한 새로운 탑색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지만, 진보진영 대부분의 분위기는 여전히 민중과 통일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둘째 보수 개신교 진영은 겉으로는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웠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국가"라는 프레임을 뚫지 못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의 친정권적 행위로부터 정권의 불의에 대한 침묵까지, 광범한 영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개신교회는 국가라는 프레임 앞에 무릎을 꿇어 왔다.
한국 교회는 이천년 전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거대한 존재 앞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진보와 보수 개신교 진영은 진영 논리를 넘어서 진지하게 이 문제 앞에 고민을 시작해야한다. 진보나 보수, 어느 쪽으로의 양자택일은 차라리 쉽다. 하지만 민족과 국가, 진보와 보수 이 모든 것을 초월함과 동시에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는 창조적인 작업을 요하는 제 3의 길은 흐릿하면서도 어렵다. 이러한 창조적 작업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많은 담론들이 오고갈 수 있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유의점만 제시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당정치에 대한 건강한 거리 유지"다. 사실 정교분리처럼 허약한 주장은 없다. "침묵도 정치적 행위다"라는 주장을 굳이 가져오지 않아도, 정교분리가 불가능하며, 설사 인위적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해도 결코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맑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주장을 통해, 당시의 기독교가 대사회적인 영향력 뿐만 아니라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정체성조차도 잃어버렸음을 역설하고 있다. (맑스의 주장을 모든 종교에 대한 무용론으로 여기고 맑스를 무신론자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맑스의 논점은 국가에 귀속되어 종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종교에 있다.)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정교분리가 아니다. 오히려 정치영역과의 역동적인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는 개신교의 정당정치 참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기독당 운운하며 정계진출을 시도하는 몇몇 세력에 대해 환멸까지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교회나 개인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건강한 거리 유지"다. 정치영역과의 건강한 거리 유지를 위해서 지금 당장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정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정치를 비판할 수 있는 기독교적 내용을 정립하고 그 내용을 선언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제도, 조직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가 요청된다. 사실상 교회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바꿔내야 한다. 속된 말로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교회 내부에서의, 교회에 대한 성찰과 변화는 반드시 정당정치 영역을 비판함과 동시에 새로운 그림을 제시하려는 목적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가 정당정치에 대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려면, 교회 내부에서 민주적인 구조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어느 정도 이루어 내야 한다. 교회의 이러한 변화 과정과 결과물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요, 실천이 될 수 있다.
개개인이 견뎌내기에는 과도한 하중을 가하는 세계의 정황을 맞딱뜨릴 때, 진지한 사람들은 아예 신앙을 버리거나 종말론적 유사-신비주의에 경도되곤 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려는 모든 도전들을 물리치고, 그는 삶 전체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의 삶도 어찌 보면 예수가 맞딱뜨렸을 그 도전에 직면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하나의 길이 되고 빛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에게,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진 교회에게 믿음이 요구되고 시험받는 때가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