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을 지내며
2012년 대통령 선거 직후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눅 2:14
이 글을 쓰는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어제 대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에 대해 분노, 절망, 슬픔, 반성, 분석 등의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대선 후보도 우리의 기대를 완벽하게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차악"을 이야기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 그 외의 사법부와 입법부가 이끌어 가는 정치 영역에 대한 거듭되는 환멸이 우리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수정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은 가져봅니다.
이천년 전의 세상도 아마 오늘날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헤롯 대왕 이후 그 아들들에 의해 나뉘어진 땅, 그리고 점령국 로마제국의 간섭과 통치 속에 시달리며 새로운 왕이 '선출'되기만을 바랐던 이스라엘 민중. 하지만 그 어떤 왕도 민중들의 기대를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아마도 이스라엘 민중을 크로산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의 대청소를 시행할 메시야"에 대한 기대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초인과 같은 하나님의 메시야가 어느 날 들이닥쳐서 로마 제국과 저 못된 헤롯 일가를 싹쓸이하고 다윗의 그 나라를 세워 주기를!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열망에 조금은 동감을 표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자유주의, 재벌의 횡포, 국가 기관의 억압, 세계를 뒤덮는 거대한 불평등과 억압과 폭력을 일거에 정리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몰고 올 그러한 지도자 !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늘 이러한 열망에 부응하여 편승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기독교도 신사도운동이니, 예언 운동이니 하는 잘못된 종말론적 신앙을 설파하는 이들에 의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이러한 지도자, 메시야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땅 곳곳에서 힘겹게 투쟁하며 버티는 이들을 생각하면 말이죠.
북아현에서, 강정에서, 철탑 위에서, 천막 속에서,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추위와, 질시의 눈초리와, 몰이해와, 폭력과 맞서 싸우고 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있자면 분노를 넘어서 살의까지도 생깁니다. 대체 왜 이런 꼴로 살아야 하는가?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올바르게 돌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의로운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천 년 전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은 모여서 젤롯당이라는 집단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 중에도 젤롯당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탄생, 즉 성탄절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시나요? 누구한 마굿간, 말구유 위에 누워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아기 예수와, 그 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동물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위에서 언급했던 이천년 전 이스라엘의 상황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온이고 뭐고,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위협들이 예수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실제로 고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탄생이 아름다움이었고, 빛이었으며,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 변화된 이들에게 예수는 더 이상 혼란스런 시대에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간 실패한 개혁가가 아니라,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위용을 등에 업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렸던 로마 황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낸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 : 기름부음 받은 자)"였습니다. 서두에 나눈 말씀에서는 예수의 탄생이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말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천사의 이 선포는 주기도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잠시 인간의 몸을 빌려 입은 것이 아니라, 죄악과 어둠으로 가득한 이 땅,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인 이 세상에 빛과 평화와 복음이 나타났다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된 결정적인 사건, 이것이 바로 예수의 탄생입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성육신(또는 화육 :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육신(인간)이 되었다는 것이죠. 성육신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논의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 싶습니다. 바로,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상적으로 빚지고 있는 칼 라너, J. B. 메츠, 불프하르트 판넨베르크와 같은 일련의 유대 -신학적 색채를 지닌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야 말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유대민족이 구약성서를 통해 그리고 바라던 바로 그 "진정한 메시야"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유대 민족이 생각하던 그런 유형의 메시야는 아닙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그 길을 달리 합니다. (아니, 그래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시온주의와는 말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철저히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게서, 특별히 히브리인과 하나님의 관계의 역사 지평 위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 지평 위에서 보면, 예수의 탄생은 만물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첫번째 창조의 질서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그리는 시작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예언자들이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려 왔던 때가 바로 예수의 때입니다. 이 사건, 새로운 창조의 사건은 요한묵시록과 같은 비전을 낳습니다. 요한묵시록의 비전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요한의 청사진이며, 새로운 창조의 완성인 종말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입니다.
라너, 메츠, 판넨베르크가 지적하듯이 종말이 물화되면, 다시 말해 어떤 특정한 이 세계에서의 상태로 지시되면, 그것은 유토피아를 상정하는 것이 되고, 종말론의 진정한 동력을 소멸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완성인 종말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겠지만 언제나 그 진행은 열려 있으며, 도식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 관계 속에서의 작용들을 거치며 완성되어 갑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 그것이 하늘에 있는 실재 세계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오직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는 세계라고 말하거나 이 양 극단을 무의식중에 선택하곤 합니다. 요즘은 절충선을 그어, 하늘에 실재하는 "죽어서 갈" 천국도 있지만 이 땅에서도 그런 "좋은 나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이 대세인 듯 합니다. 이 지면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풀어제낄 수는 없습니다. 워낙 방대한 논의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창조-종말"의 지평 위에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라너, 메츠,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야말로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창조의 결과인 아담이 실패한 세계, 그 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 만들기 위해 두 번째 창조의 주인공이 된 이가 예수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선포하고, 살아냈던 흔적들 그 자체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형상들입니다. 예수의 탄생, 삶, 죽음, 부활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본 하나님 나라의 모습, 그가 그리고자 했던 새로운 세계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드러내 주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이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에 처하기 전, 빌라도 앞에서 한 것입니다. 예수가 만들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방향지을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석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 있는 실재계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은 요원하다는 것입니다. 루터도 두 왕국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월터 윙크나 크로산과 같은 신약 학자들의 의견을 빌리면,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중간 부분을 보면 해답이 보입니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이러한 언급은 정확히 유대인들의 기대, 즉 "세상 권력을 폭력적으로 청소할 하나님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지칭합니다.
예수가 거부하는 것은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메시야관, 하나님 나라 건설 방식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폭력과 군사력과 세상의 군주들이 권력을 쟁취는 방식, 민중을 다스리는 구조, 기존의 세계 질서틀을 거부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법과 질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새로운 창조주로서 이 세계에 돌입한 예수, 그리고 그가 만들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과연 어떤 것인가? 앞에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민족과 국가로 대표되는 기존의 세계 질서틀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거나 그 위에 설 수 없음을 알고, 그렇게 하려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거절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만물의 주인이자 창조자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고통스러워도 우리에게는 이천년 전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 세계에 한 줄기 섬광으로 나타나신 예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이미 새로운 창조의 작업을 시작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세계는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뜻, 종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은 결코 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창조" 예수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해 집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 세상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흐름들, 이야기들, 가능성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 도 이러한 예수의 "창조적 능력"을 힘써 배워야만 합니다. 이는 기존의 교리들에게, 신앙에, 선입견에, 제도에, 사회에, 정치에, 문화에 새로운 대화를 제시하고 도전을 주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절망이고, 하루 하루의 끼니를 염려해야 하는 삶이며, 어둠이 더욱 엄습해오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볼 때 떠올리게 되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한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시던 기억이었습니다. 6일이라는 기나 긴 시간을 오로지 "창조"에 쏟으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칼 라너 : 하나님의 양여) 하나님께서는 7일째 되는 날 , 자신의 쉼을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창조를 완성하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창조자 예수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새로운 창조의 여정을 돕고 계시다는 사실이고, 결국 그 창조가 완성되는 그 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며 거룩 의 현장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다립니다. 아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슬픔이 없는 세상, 더 이상 메시야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그리고 나아갑니다. 만물이 함께 즐겁게 노래하며 평화를 누리는 그 나라를 향해. 그리고 믿습니다.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곧 오소서 지혜의 주 온 만물질서 주시고
참 진리의 길 보이사 갈 길을 인도하소서
곧 오소서 소망의 주 만백성 한 맘 이루어
시기와 분쟁 없애고 참 평화 채워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