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이전 어느 날
졸리고 귀찮은데 안쓰면 까먹을 것 같아 불친절하게 대충 적고 자련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막 7:26
유명한 말씀이다. “자녀들 빵을 개한테 줄 수 있겠니?” 라는 예수의 답변. 여기에 그 여인, “부스러기는 얻어먹잖습니까… 굾굾” 당황한 예수, “어잌후…….그렇게 말하다니…..돌아가, 딸이 나았으니깐! ㅎㄷㄷ ‘ㅅ’;;;” 뭐 대략 이런 상황 되겠다.
이제부터 설을 풀자면 - 왜 마가복음은 여인이 시로페니키아 출생이라는 말을 굳이 집어넣었을까? 무슨 중요가 있다고? 그리고 지금 예수는 두로와 시돈 지방에 있다. 그건 또 무슨 의미가 있어서 기록했을까? 예수님 일거수 일투족이니까? 그게 아니라 이야기를 꾸미는 데 매후 중요하니까 넣은거다. 시로페니키아는 당대에 아주 잘나가던 동네였다. 제국이었다.
배경을 살펴보면 그 여인은 사회적으로 귀부인급의 지위와 정체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여인이 딸이 아프다는 이유로 먼 곳을 여행하여 예수를 만나러 온다. 예수 짱짱맨 x_xd+ 이라는 소문을 듣고.
예수가 시돈과 두로 지방에 있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한마디로 이방인의 지역이다. 예수가 무슨 의중으로 그곳에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유대인인 예수에게는 유대와 이방인 지역의 경계 정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부담되는 행보였다. 그래서인지 여인을 만난 후에는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온다. 중요한 건 지금 경계선상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종교적 성적(성적지향은 확인이 안되지만 적어도 생물학적으로는) 정체성을 지닌 두 사람이 만났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다. 오늘날로 치면 한국의 일반 남성 개신교인과 무신론자이면서 잘나가는 기업 임원인 야빠(아, 이건 아닌가? ‘ㅅ’;;;) 여성이 만난 격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이상한 만남이겠는가? 그것도 심지어 여성이 그 남성에게 뭔가 엄청난 기적을 바라고 접근한 것이다. 이게 가능이나 한 만남이냐고 당장 되물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음 내용을 어서 궁금해 해라! 궁금해 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성서에 이미 기록되어 있으므로…음….대화 내용은 글머리에 기록한 바와 같다. 저 구절을 갖고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저렇게 말한거라는데…….아니 다른 지역 다른 나라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이 딸 고쳐달라고 기적을 바라고 왔는데 거기서 “종교적” 믿음을 시험하는 게 말이 되냐능? ‘ㅅ’?
예수의 반응은 굉장히 솔직한 것이며, 한편으로 예수로써는 민족적 열등감을 찌질하게나마 해소할 수 있는 나이스 타이밍이 온 것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덥썩 문 거임. “개 주제에 어디서 빵을 달라고 구걸하냐!” 뭐 이런 거다. 적어도 이 대화에서 만큼은 예수가 자신이 속한 정체성을 우위에 놓는 카타르시스를 누린 것이다. 그런데 여인의 반응 좀 보시게. “네 맞아요.”
맞긴 뭐가 맞아. 기적 베풀고 성노동자나 강도들도 아무렇지 않게 만나 어울릴 정도면 고상한 인품을 보여 마땅할진대 저거는 선지자요 나중에는 그리스도라고 불릴 닝겐이 뭐가 어쩌고 저째? 내가 개라고? 니 꽉막힌 인격도야를 위해 엄마젖이나 더 먹고 오렴 ㅗ^_^ㅗ 이라고 해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 맞다니. 지금 이게 말이 되는 반응인가? 게다가 한 술 더 뜬다. “하지만 개들도 부스러기는 주워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내 딸이 아픈 게 더 중요하다. 세상 다 주고 바꿔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내 딸, 나아가 한 생명이 죽어간다는데 개가 된들 먼지가 된들 고칠 수만 있다면 뭐가 문제랴.
한 생명을 향한 정직한 돌진,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 성적 경계, 그 묵직하고 복잡한 경계를 단 한 마디 말로 돌파해서 예수의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에 예수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 예수를 깨웠다. 뭍 생명, 풀 한포기, 날아가는 새 한마리도 먹이시는 하늘의 아버지,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한 은총의 단비를 내리시는 너른 품의 당신, 모든 경계가 있기 이전에 세상을 “하나”로 만드신 하나님 그 분. 그 분이 진정 내 아버지이심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예수와 여인 사이의 서로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생명이 살아나는 사건이, 두꺼운 경계가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로 이야기를 끌고 와 본다. 아까 설명했던 상황을 빗대자면, 일반 개인교인 남성이 자기보다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데다 기독교인과는 다른 지향을 가진 무신론자를 만난 것이다. 여기에 성적 지향도 이성애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다면 완벽하게 이상한 만남이 되겠다.
근데 이것봐라, 그 남자가 궁시렁 궁시렁 때론 욕도 섞어가면서도 그 여인이 간청을 하니까 신유의 은사를 발휘하여 그 여성의 딸을 고쳐주는 거다. 이게 말이 되나!??! 알려지기라도 하면 사회가 파괴되고 가정이 무너지고 바람핀걸로 오해받고 치유 비용으로 돈을 받았네 마네 둘이 잤네 안 잤네……..별의 별 소리가 다 떠다닐거다. 둘 다 신상 털리고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여자는 직장에서 짤릴 수도 있고 남자는 이혼할지도 모르고 교회에서 쫓겨나고 등등……..헉헉……….@_@ 뭐 하여간 인생 쫑난다 이 말이다.
근데 성서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참 신이자 참 인간인 예수니까 그런 거라고? 예수가 한 말을 보라. 그런 여인을 만나는 건 예수로써도 힘든 일이었다. 예수에게도 자신을 둘러깐 세계에 대한 경계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존재했던 것이고, 그것을 뚫고 나온다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정직과 결단과 의지를 요하는 일이었다.
나를 넘어 남을 향해 경계를 뚫는다는 건 사실 그런 일이다. 가시에 찔리고 피가 나고 주위 사람들의 칼바람이 살을 에일듯 파고드는 걸 각오하는, 동시에 잔잔하던 실존을 뒤흔드는, 내적 외적 진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춤사위가 될지, 두렵고 떨리는 일이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주체의 모험이다. 예수는 그 경계를 돌파했다. 뭐가 예수의 무기였는가? 정직함이었고, 피하지 않음이었다. 직면했다. 적어도 내 앞의 여인의 존재를 눈가리고 아웅 하듯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가진 편견을 온전히 드러냈다.
그것은 최소한, 나와 마주선 사람이 자신의 편견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것이라는 “인간적인” 신뢰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정직함과 피하지 않음 (직면)을 바탕으로 한 “모험”은 성공했다. 타자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만남이자 소통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 그럴 의지조차 품지 않고 판단하고 갈라내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하지만 결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닌 듯 하다. 예수는 여전히 그 여인이 개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인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다. 그리스도인도 그래야 한다. 말로만 “동성애자는 죄인이지만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말하지 말고, 실제로 만나라. 그리고 말하라.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하지만 당신도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형상임을 믿습니다.” 동성애자와 인간이라는 희한한(?) 간극을 메우는 건 신학적 성찰만으로 되지 않는다. 나와 그 사이를 넘어서는 경계 돌파의 경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장애인, 노숙인, 해고노동자, 성적 소수자 등등………….나와는 다른 경계 안에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경계인들(?)을 모두 용납하고 사랑한다는 건 사실 거짓일 수 있다. 그런 사랑을 한 인간 주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 같다. 하지만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는 있다. 나를 가장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스캔들)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그 경계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정직하고 피하지 않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경계를 넘는 “모험”으로의 한 발자국. 유난히 수꼴들이 설치는 5월의 어느 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필수 덕목이 아닌가 싶다.
쓰고 나니 무지 거대해졌네………..대부분이 뻘소리고 핵심은 간단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