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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Dec 22. 2022

복음을 압축하지 말라

2012.11.17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막1:1


걷다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써붙인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더 걸어가니까 교회에서 파라솔을 펴놓고 몇몇분이 커피 전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에 붙은 문구를 보고 차 주인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당신은 나를 사랑하시나요?”

커피 전도를 하시는 분들은 커피 뿐 아니라 전도지나 화장지같은 것을 줄 것이다. 그 안에는 복음을 간명하게 설명한, 대략 사영리와 비슷한 내용의 글들이 적혀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복음은 압축된 글귀나 정보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이 한계에 부닥쳤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며칠전 들은 얘기. 지하철에서 어떤 분이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라며 전도하자, 어떤 분이 “그렇게 좋은 천국, 지금 당장 가시지 그래요?”라고 말했고, 전도자분은 아무 말 없이 다른칸으로 가더란다.


한국교회는 크게 구원에 있어 두가지를 요구한다.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 그리고 감정적인 체험. 하지만 문제는 이 두가지를 충족하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객관적인 도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난제가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을 모조리 기억해야 구원받은거라고 말하는 구원파와 같은 곁가지를 낳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해당 교단의 평신도가 "해당 교단에 그러한 교리는 없으며, 성경과 찬송, 복음주의자들의 간증,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의 경험에 의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는 날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문제점은 구원 혹은 복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이야기가 아니라 개념으로 전해지는 데서 오는 문제들이다.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듣는 핀잔이, 이성적이기는 한데 성경적이지 않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가 구원이나 복음에 대해 개신교신학을 이성적으로 체계화한 칼빈주의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구원이나 복음은 개념도 아니고 신학의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들려주듯이, 예수의 삶이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 그의 이야기 전제가 구원과 복음이며, 구원과 복음을 위한 통로라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야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의 삶 전체가 구원이자 복음이며, 그것은 십자가나 부활과 같은 용어로 압축시켜서는 안된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에 대한 강력한 표징은 될 수있으나, 이것으로 소급될 수는 없다.


한국 교회가 ‘간증’을 좋아하는 요인 중에는, 이렇게 압축되지 않은 복음에 대한 열망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일으키는, 구원과 복음이 일으키는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압축을 풀어놓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서 또한 이러한 이야기로 읽어야 할 것이다. 압축되지 않은, Full Gospel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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