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0
신학이 겪는 핵심적인 갈등 포인트는 “자연을 통해 (때로는 예수 없이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무력화할 수도 있는 질문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통한 계시와 성육신, 구원 등등의 일련의 사건은 사실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신비주의적이라고 부르든 뭐라 부르든, 하나님이 창조주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창조의 의미와는 다릅니다.)임을 고백하는 기독교에서 세계(자연)을 통한 하나님 경험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 삼위일체를 경험하거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는 단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느냐는 질문보다는 좀 더 핵심에 접근한 질문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구원의 주권이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께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 (혹은 도구)는 될 수 있어도,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어떤 질문이든 간에,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의 성육신 사건 그리고 삼위일체를 통한 구원 사역은 굳이 세계(자연)와 연관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인간 외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구원되는지, 구원이 필요한지는 인간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자연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분리됩니다.
성서와 하나님 계시 사건들의 무대는 주로 인간의 세계입니다. 출애굽, 예언자들의 출현, 예수의 성육신까지 그 모든 것의 중심 관심사는 인간의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연세계는 인간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받은 적은 많이 있지만 인간이 자연세계의 존재질서나 법칙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한 (성서와 삼위일체의 주요 관심사인) 상황으로 인해 자연세계가 ‘피해’를 받은 것이지, ‘타락’했는지는 알 수 없거나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 안에서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분리시켜놓고 나면, 좀 더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성서와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이 만든 세계 다시 말해 정치, 사회, 경제 등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안에 속하거나 그것을 만들어 가는 인간 개인의 정황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세계가 자연세계에 폐를 끼치는 이유 때문에 인간을 구원해야겠다 결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이러한 입장에서는 자연신학과 기독론, 구원론이 충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이 만든 세계의 정황이고, 인간이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자연세계에 대한 생태신학적 관심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세계이기 때문.)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 세계의 구원이고, 이는 개인의 실존적 구원과 정치사회 영역의 구원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냅니다.
자연신학이 자연을 통한 인간의 하나님 경험을 열어놓고 있음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동시에 기독교 신학 전반이 관심하고 있는 영역이 인간이 만든 세계라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서로가 가진 포인트를 인정하는 가운데, 두 신학은 신론 기독론 구원론과의 충돌 없이 인간의 구원과 그것으로 인한 세계(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포괄한)의 궁극적인 화해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