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새벽> 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
요즘 인생이 너무 신나시는 분? 별 일 없이 사시는 (feat. 장기하) 분? 없으시죠? 모든 인간-사람의 삶에서 무탈이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하다못해 집밖으로 나왔는데 날씨가 덥고 추운 게 별 일이 될 수 있어요. 이건 인류 초창기로부터 지금까지 항상성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든 생명체가 갖는 공통점입니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아마 이런 걸 가리키는 개념일테죠.
개인의 삶이 이럴진대 세계는 오죽할까요?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계가 처한 곤경은 다양한 방식으로 명명됩니다. 신자유주의, 신냉전, 극우의 발흥, 기후위기, 이민과 난민의 폭증 등으로요. 그런데 조금 더 긴 역사를 가지는 화두고 있으니, 바로 (불)평등입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평등이 공정과 대응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MZ세대가 추구하는 공정을 이르는 개념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 한국의 공정은 (왜곡된) 기계적 평등이라고 불러야 할 듯 하지만요.
여기에 얽힌 개념이 자유(와 책임)이죠. 전 대통령 현 내란범이 취임사때부터 부르짖던 그놈의 자유, 자유, 오! 자유! 말입니다. 저는 그 당시에 마음껏 장사할 자유를 박탈당한 을지로의 어떤 맥줏집을 위한 공연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내란범의 자유를 제 식으로 해석해서 멘트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동자가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자유, 여성이 차별받지 않을 자유,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사랑할 자유 등으로요. 그랬더니 제 노래를 듣던 60대쯤 돼보이는 아재들이 슬쩍 자리를 뜨더라고요. 뭐, 그거야 그 분들 자유니까요.
근현대 역사는 불평등과 부자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대 아테네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여전히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여겨지고, 그나마 가장 차악 혹은 차선으로 여겨지는 국가의 다양한 형태와 민주적인 운영에 사회의 역량을 때려넣고 갈아넣는 중입니다. 개중에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거를 동그란 세모같은 모순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요.
지금의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방법을 제시한 철학자를 꼽는다면 대표적으로 장 자크 루소와 토마스 홉스가 있습니다. 둘의 사상은 상극이어서, 루소가 인류의 희망편이라면 홉스는 절망편이죠.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의 본성, 사회의 기원과 진화 발전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분법적 담론의 고착은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기가막힌 헛점이 있습니다. 루소와 홉스 모두 공히 어떤 역사인류학적, 고고인류학적 근거를 가지고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논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당대 자신들이 가진 문제 해결을 위해서 어떤 가정presumption 혹은 가설을 세웠고, 이후 사람들이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가설 위에서 사회를 조직하려 애쓰고,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는 것이죠.
약간 허탈해지지 않으시나요?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평등, 자유, 민주주의,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 정의와 내용들이, 과학적 연구 결과나 일상의 경험을 토대로 하지 않고 특정한 시대의 몇몇 학자 혹은 학파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기반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어느 맑스주의자의 말처럼, 우리가 자본주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이유는 사회 전체가 자본의 운동을 사회적 규칙이자 약속으로 믿고 따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의 새벽>이라는 벽돌책을 구워낸 두 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데이비드 웬그로는 바로 이러한 답답한 이분법적 고착의 구조를 깨뜨리고, 지금의 일상으로부터 인류 역사 전체에까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재구성할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길을 펼쳐놓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신화임을 안다. - 724쪽
그래서 책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불평등은 왜 이슈가 되었는가?"(42쪽) 한국사회에서 공정(기계적 평등)을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로, 전가의 보도로 여기고, 평등과 자유를 대립시키고, 권리와 책임의 균형을 강조하는 흐름도 모두 루소와 홉스의 가상대결의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선사시대(원시시대)의 생활상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도 한몫을 합니다. (이 책에서도 거듭 등장하지만) 채집인은 적은 수확물로 궁핍하지만 자유롭게 살았고, 농경인은 수확물을 비축하지만 노예처럼 살았다는 식의 그림은 근거가 없습니다. 인류역사의 평등은 물질적인 것을 얻을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에 관한 결정에 도움을 줄 능력의 평등(19쪽)이었으니까요. 인간을 진정으로 정치적 동물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이런 의미에서라야 올바른 지향점을 향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사시대에 대한 편견, 루소와 홉스의 가정에서 탄생한 계몽주의 이후의 세계상은 어디에서 연원한 걸까요? 저자들에 의하면 "선주민 비평", 그러니까 북아메리카가 신대륙으로 알려져 유럽의 침략을 받고, 유럽인이 선주민의 정치사회적 삶의 형태를 접함으로써 자신들의 불평등한 상태를 자각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튀르고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진화, 사회의 단계적 발전 개념이 널리 퍼져나갔죠. 우리에게 익숙한 도식입니다.
소규모 집단에서 채집과 사냥을 반복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 안전을 위해 야생동물을 가축화하고 농사를 짓다보니 권력과 위계관계가 생기고, 잉여자원을 기반으로 타부족을 무력으로 점령하며 점점 거대해진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사제와 왕이 필요했으며, 이를 보좌하는 방식으로 관료제가 자리잡았다. 여기에서 발생한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의 민주적 국가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하는 제레미 다이아몬드, 스티븐 핑커를 비롯해 세계적인 팬덤을 보유한 유발 하라리와 토마스 피케티 모두, 위의 도식에 내재한 루소/홉스적 빅-히스토리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연구한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어 있다면 문제가 해결될 리 없습니다. 저자들은 방대한 고고학적 근거와 그 분석을 통해 왜 우리의 질문이 잘못되어 있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그러면 어떻게 질문하고 어떤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쏟아냅니다.
저자들이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지금의 고착된, 그러니까 굳어져 답이 없는 일방통행식의 역사인식으로는 절대로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기 때문에, 굳은 것을 녹이고 부수고 깨워 자유롭게 해야만 오래된 역사로부터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세계 역사에 대해 자신만의 제목을 입력하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내용은 궁금한데 벽돌책이 부담스러워서 망설이게 되신다면, 1, 2장만 읽으셔도 저자들의 핵심 주장을 알 수 있으니 자신있게 도전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3장부터는 아주 풍부한 고고인류학적 최신 연구와 근거에 대한 분석이 장대하게 펼쳐지니까, 그 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짭짤하게 읽으실 수 있겠습니다.
아래는 제가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게 정리해 놓은 내용의 일부입니다. 독서에 참고가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회의 방향(지향)을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왜 그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공개적으로 논의에 부칠 수 있는 능력이 곧 정치적 동물인 인간의 정치의 본질이다.
옛날 (선사시대)의 인간들 또한 지금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회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의 원시적 사회들도 지적 성인이며, 그들이 세우거나 거부한 사회적 세계를 성찰할 능력이 있었다.(290쪽)
인간 군집의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관료제, 왕정, (소규모 집단을 관리하는) 행정기관, 곧 '문명'이 발달하는 것은 아니다.(390쪽)
농경은 사회적 지위의 발생, 불평등, 사유재산의 기원이 아니다. (349쪽)
사회적 자유의 기본 형태는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형식적 원리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환경에서 떠나거나 자리를 옮길 자유, 타인이 내린 명령을 무시하거나 그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 완전히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형성하거나 상이한 현실들 사이에서 옮겨다닐 자유이다.(6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