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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틸드 Mar 06. 2019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 나는 아프지 않다.


얼마 전, 몇 년간 인간적인 삶을 되찾기 위해서 싸웠던 두 분의 식당에 방문했다. 상가세입자로 철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다른 곳에서 가게를 재개업하기는 했지만, 두 분의 건강이 어떨지 늘 걱정되던 차였다. 그런데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한 분이 얼마 전 대상포진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병원에 찾아갔고, 소화불량이나 변비로 처방을 받아 약을 먹었지만 차도가 없던 중에 통증이 너무 심해지고 반점같은 것이 올라와 다시 병원에 가보니 그제서야 대상포진 진단을 내렸다며 무능한 의사들을 탓하던 그 분의 이야기는 결코 낯선 비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진짜 가슴아픈 이야기는, 그 식당 바로 맞은 편에서 몇십 년을 그 안에서 먹고 자며 장사하던 노부부 두 분이 급작스럽게, 비슷한 시기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이야기라 지면에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평생을 힘든 자영업으로 고생만 하다가 질병으로 인해 생을 마치셨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올해 유독 십여년 전에 알고 좋아했던 음악인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잊고 있었지만 꽤 인상깊었던 한 의사 트위터리안의 글귀가 생각났다. “질병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중이지만, 확실한 건 질병의 발생은 ‘랜덤’이라는 사실이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요점은 ‘랜덤’에 있다. 환경이나 개인 성향의 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술담배에 쩔어 살면서도 아무 이상 없이 장수를 누리며 사는 사람도 있고 철저하게 관리를 해도 ‘불시에’ 질병에 맞닥뜨리는 사람도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병원’과 ‘고통’이라는 단어가 연관되어 떠오른다. 그러면서도 괜히 내 몸엔 이상이 없을지 생각해보고, 별다른 ‘질환’이, 다시 말해 몸에 뚜렷한 고통이 있지 않으면 “나는 아프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지나가 버린다. 나 또한 때때로 “이러다 밤새 심장마비라도 일어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잠못 이루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는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며 안도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프지 않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질병의 발병이 ‘랜덤’이라면, 평생을 큰 질병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미 질병을 겪으며 또 다른 영역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느 인생이든 “삶”이란 건 모두 동등하게 소중해서 존중받을만한 것이라는 사실이며, 아프지 않은 사람들 또한 평생을 아프지 않다 하더라도 결코 아픈 이들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아픈 이들과 그를 돌보는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 “아픈”


아서 프랭크의 이 책, “아픈 몸을 살다”는 두 차례의 질병을 겪은 몸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의 수기이다. 그는 심장마비, 고환암이라는 질병을 삶과 몸에 맞아들였다. 우리가 ‘병’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고통’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것이 질환의 가장 대표적인 흔적이기도 한 동시에 치료과정에서도 늘 따라다니게 되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두 경우 모두에서 ‘고통’을 통해 질병의 존재를 발견한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 “행복 전도사”라고 불리던 어떤 분이 질병이 가져다 준 몸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일이 있었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우리는 고통을 결코 좋아할 수도 없고, 친해질 수도 없다. 

아픔은 아픔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나’,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내가 겪고 있는 것이기에, 질병 또한 어느 외부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질환과 질병 모두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병원의 시스템과 의사는 최대한 이러한 질병의 주관성을 잘라내려 든다. 병원은 아픈 이의 고통과 질병을 ‘타자화’시킨다. 그를 돌보는 사람들도 그런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환자 자신이 먼저 “아픈 나”, “아픈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몸의 경이”를 알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내 몸이 죽어가든 회복되어가든 몸에서 일어나는 그 일 그대로를,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나를,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 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 “몸”


아픈 몸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공포감을 심어준다. 내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아프기 전까지는 내 정신과 의지가 나를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내 몸은 질병이라는 또 다른 현상에 의해 통제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저자는 질병에는 얼굴이 없다고 말한다. 질병은 내 몸 안에 살아가는 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것일 뿐이다. 내가 내 몸을, 아픈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게 할 때에만, 나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심지어 건강할 때의 나조차도 그럴 수 없음을, 내 몸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뿐임을 알게 된다.

이럴 때 질병은 더 이상 “싸움과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아픈 몸을 산다는 것은 질병이 함께 하는 내 몸, 내 인생을 산다는 의미이지 다시는 질병이 얼씬도 못하도록 그것을 뿌리뽑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생명체는 누구나 아픔을 겪으며 결국에는 죽고, 우리는 다만 삶을 살 뿐이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바, 마치 안개에 가려진 낭떠러지와 같다는 건강인과 환자의 경계선은 질병에 대한 공포를 환기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신정론적인 속뜻도 담기지 않은, 마치 우리가 별들을 이루는 성분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자명한 과학적 사실과 같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의식과 정신이 몸에 속박되어 있다고 슬퍼하거나, 나를 이루는 건 지금 이 하나의 유한한 육체뿐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고립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질병이 있든 없든 나와 우리는 여전히 “몸을 살아가고” 있고, 그 사실 속에서 경이를 발견하는 일의 중요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 “살다.”


환자는 질병과 병원에 의해 자신이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여전히 “이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책 후반부는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책 전반을 통해 병원 제도와 그것을 지탱하는 사람들인 의사, 간호사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만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 환자를 둘러싼 지인들에 대해서도 충고한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환자의 질병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각자의 이유로 “연락하지 않고,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이들이 여러가지 이유를 대고는 있지만 사실상 환자의 질병을 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픈 이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질병을 “알고 인정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픈 이의 질병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어설픈 위로나 잘못된 태도로 오히려 부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환자와 병원과 함께 이를 둘러싼 지인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돌보는 사람이다. 저자의 돌봄은 아내인 캐디가 맡았는데, 몇개월 간의 돌봄은 그 두 사람을 새로운 경험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기도 했지만 마치 몸에 새겨진 사라질 수 없는 질병의 흔적처럼 사라지지 않을 결핍 또는 벽을 만들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환자 본인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을 통해 잃어버리는 만큼 무언가 얻을 기회도 있지만 돌보는 사람은 오히려 모든 것을 소진시켜버리기도 쉽고, 그것을 다른 무언가로 보상받기도 힘들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환자가 되는 순간, 마치 우리가 요즘 보고 듣고 접하는 소수자들 –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 - 처럼 그들 또한 자신들만의 특수한 상황을 살아가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실상 사회는 소수자로 취급하면서도 말이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돌보는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당사자와 아주 가까이에서 깊이 연대하는 개인 또는 단체”로 바꿔볼 수 있다. 이들의 위치는 어떤 면에서는 당사자인 환자보다도 더 잘 숨겨지거나 삭제된다.

저자는 질병“과 함께 살며” 이 책을 썼다. 하지만 살아남아 이런 수기를 남기지 못한 환자들도 숱하게 많다. 비록 저자가 삶과 죽음이 결코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남기는 흔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오랫동안 질병과 함께 살다 죽음을 맞이한 이의 주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 아픈 몸을 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나는 머리가 아픔을 느끼고 있다. 단순히 늦게 잤거나 신경쓰는 일이 많거나 해서일 수도 있고, 좀 더 안 좋은 상황을 가정한다면 여러 가지 상상을 하다가 병원을 찾을 수도 있다. 대개 아픔에 대해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은 아픔의 강도와 지속성이다. 이러한 태도가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단지, 그것이 우리가 평소 사회로부터 학습한 ‘질병을 대하는 태도’가 반영된 결과라면 한 번쯤은 되짚어 생각해 볼 이유는 된다.

우리는 많든 적든 크든 작든 아픔을 느끼는 몸,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간다. 이 책은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인생을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그럴 때, 질병과 건강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질병의 발생이 ‘랜덤’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 주기에 외면하고 싶어지는 얼굴없는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빛과 어둠이 구별되지 않고 늘 함께 자리하듯이 우리 인생의 또 다른 면에 자리잡은 우리의 숙명이기에 제대로 마주하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편지다.

과연 내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이 책을, 그리고 이 서평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나 자신이 기독교인임에도 서평에서만큼은 책 전반을 흐르는 기독교 영성적인 분위기를 담는 일은 피하려 애썼다. 저자의 말처럼 질병의 “경험”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은 독특하고 고유한 것이어서, 그 경험을 겪어낸 후가 아니라면 결코 뭐라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머리가 아픈 이유는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병은 내게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며,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는 이 책의 내용은 그 감정을 북돋우며, 무엇보다 읽는 순간마다 내 주변의 아픈 이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누군가의 질병은, 아픔은 결코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 이후의 내 삶이 아주 조금이라도 아픈 몸을 사는 이들과 함께 사는 쪽으로 흐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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